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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글에서는 전선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봤지? 이번에는 어떻게 악당 혹은 악당 세력 하나 하나를 써먹을까에 대해 다뤄 보도록 하자. 아, 그냥 조우 하나 끝내고 말 악당이면 그냥 몬스터 매뉴얼 뒤져서 툭 던지고 얼마나 빨리 죽나 구경하면 되니까, 여기서는 관심을 둘 가치가 있는 악당. 그러니까 최소한 한 세션 이상, 길게는 캠페인 전체를 관통하는 악역에 대해서 말하도록 하겠음.


유능하지만 만능이 아니도록

좋은 악당은 유능해야 한다. 똑똑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멍청해서는 안 됨. 이건 작품의 현실성과도 관련이 있지만, 뭣보다도 멍청한 악당은 매우 빨리 지루해지기 때문임. 오늘도 내일도 계속 똑같은 수법으로 돌격하는 오크 대장이 나오면 플레이어는 "아 저 귀찮은 놈 또 나왔네" 하겠지? 로켓단처럼 좀 어수룩한 악당을 내보내고 싶다고? 로켓단이 어떻게 쓰이는 지를 생각해 보셈. 그런 컨셉은 분위기 환기시키는 개그용 NPC지 플레이어를 적대하는 반동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움.

물론 그렇다고 악당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서 "그것도 이미 준비해 놨다!" 고 외치는 건 별로 좋지 않음. 이것도 작품의 현실성 이전에 플레이어들한테 의욕을 싹 가시게 하잖아. 악당은 결국 플레이어한테 져야 하는 도구임. 더 이상 쓸모가 없다면 버리고 새 거 꺼내셈.


정체성, 거미줄과 전선

그럼 이제 예시와 함께 악당을 만들어 보자. 혹시 작법서를 꺼낼 생각이 있다면 일단 집어넣어 두셈. 작법서에는 매력적인 악당을 만드는 법이라고 하고 백스토리나 성격이나 이런 걸 막 쓸 텐데, 그것도 괜찮지만 TRPG에 필요한 건 보기에 멋있는 악당이 아니라 상대할 때 재밌는 악당임. 그 점을 생각하고 악당의 정체성을 몇 단어로 적어보자. "노련한 부패 형사", "색욕의 대악마", "피그탈 족 현상금 사냥꾼" 식으로. 이제 이 악당이 어떤 전선에 속하는 지 생각해 보고, 그 전선의 목표와 일치하는 악당의 목표를 적어 주자. 만약 기존 전선에 속하지 않는 악당이라면 새로 전선을 만들어 주거나 독립적인 목표를 주면 됨.

그리고 이제 악당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마인드맵 식으로 줄을 긋자. 줄에 연결된 건 이 악당과 관련이 있는 PC이거나 다른 NPC임. 그리고 줄 위에 어떤 식으로 연결되었는지 적어 주자. "PC의 가보를 빼앗은 도둑", "방앗간 주인의 딸에 빙의함", "레이온 사 회장의 오른팔" 이런 식으로. 붕 뜬 악당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적어도 하나는 연결을 해 둬야 PC들을 끌어당기기도, 뒷 이야기로 나아가기도 쉬움.


예시) A는 마법소녀를 상대할 중견 악당이 필요하다. 소드락꾼 괴수 한 명이 고등학생의 몸을 빼앗은 다음 임용고시를 쳐서 교사가 되어서 이 학교에 다시 왔다고 하면 좋을 것 같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빌런 썰을 본 A는 개량한복 입고 다니는 한문 교사가 젊은 여교사면 그것도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악당의 이름은 서세리로 하고, 소드락꾼 전선에 속한다고 놓는다. 옆에 줄로는 을의 캐릭터 한민지의 담임 선생님이고, 음침한 학생 신유라에게 고서적을 제공해 주고 있고, 외부 세력인 강이찬 교수를 대학 은사로 두고 있다고 한다. 다른 소드락꾼 세력을 붙일까 하다가, 첫 소드락꾼이니만큼 더 이상의 정보를 공개해 주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태그와 유기적 타격

그러면 이 악당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영해야 할까? 지루해지지 않도록 최대한 다양한 개성을 가진 악당으로 하는 게 낫겠지? 가장 쉬운 방법은 악당들한테 태그를 붙여서 구분하고, 그 태그가 선호하는 방법과 선호하지 않는 방법을 적는 거임. 가령 "공세적" 이라는 태그를 붙이면 "선호: PC들이 준비하기 전에 직접 공격함. 비선호: PC들이 공격할 때 까지 앉아만 있음" 같은 거겠지? 다시 말하지만, 악당들을 멍청하게 만들지 마. 악당들은 유능해야 하고, 그 뜻은 유연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PC들의 약한 부분을 찔러 들어가라는 거임. 비선호하는 방법을 택하지는 말아야겠지만, 선호하지도 비선호하지도 않는 방법은 적당하다 싶으면 쓰게 하셈.

RPG 책들에 대부분 나오는 거지만, PC들의 약점은 PC들의 강점 이상으로 그 캐릭터를 정의하는 요소임. 다만 그렇다고 때린 데 계속 때리지는 말고. 그것도 재미없으니까. PC들을 잘 보고 최대한 다양한 약점을 여러 각도에서 칠 수 있도록 해 보셈.


예시) A는 서세리에게 최면과 정신 조종 능력을 주기로 한다. 서세리의 컨셉은 학생들을 최면에 빠뜨려 마법소녀들의 비밀을 유출한 다음, 마법소녀들을 딜레마에 빠뜨리는 것으로 한다. 또 학교 밖에 인맥이 있어 기묘한 능력을 쓸 수 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A는 서세리의 태그를 인형술사(선호: PC들이 공격할 수 없는 사람을 조종해서 PC들을 궁지에 몰아넣음. 비선호: 직접 PC들과 대결함)와 기재(선호: PC들의 시야 밖에 있는 수단을 사용함. 비선호: 단순하고 투박한 공격을 함)로 정한다.

실제 세션에서, 서세리는 PC들의 친구를 최면에 빠뜨려 공사 현장을 교대로 지키게 하고, 마법소녀들이 조사하러 오자 세뇌시킨 신유라를 이용해 방심한 한민지가 변신을 풀도록 유도한다. 한민지의 정체를 알아내자, 다음 날 강이찬 교수와의 인맥으로 받아온 실학사상주입기로 한민지의 도덕성을 없애려고 한다.


힐(Heel)의 운명: 잘 맞아주는 법

PC들이 아픈 곳을 아무리 후드린다 해도 결국 악역은 결국 져야 악역임. (몇몇 예외 사례를 제외하면)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지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맞깔나게 져주느냐의 문제임. 플레이어들이 테이블을 나오면서 "저런 적을 해치울 수 있었다니 멋진 세션이었어!" 할 수 있도록. 그리고 플레이어들이 만족한 채로 나올 수 있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캐릭터를 짜면서 머리에 떠올렸던 판타지를 실현할 수 있게 해 주는 거임. 그것도 아니면 플레이어의 기지로 캐릭터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게 했다고 느끼게 만들거나. 잘 이해가 안 간다면, 화염술사 앞에 얼음 정령을 내보내서 다 태워버릴 수 있게 하는 것도 플레이어가 이번 판을 캐리했다고 느끼게 하겠지, 하지만 화염 저항 적들을 잔뜩 내보내 놓고, 그 옆에 나무로 된 통에 독가스를 채워놔서 화염술사가 통을 터뜨려서 적들을 제압하게 유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임.


언제 써먹어도 괜찮은 팁이 있음. MTG 개발자 마크 로즈워터가 말한 "약점이란 너무 나간 강점이다" 라는 개념임. 교활하게 사람을 말처럼 써먹는 적 보스는 한번 써 먹고 버려진 부하들이 선한 마음을 가진 주인공들을 도와준다면 큰 곤경에 처하겠지. 용맹한 돌격대장은 힘으로 넘지 못하는 함정을 만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고. 악당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PC들을 공략해야 재밌는 것처럼, PC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적들을 공략해야 다양한 PC가 빛나는 재밌는 캠페인이 됨.


예시) A는 서세리와의 대결에서는 정의 캐릭터인 김수정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주기로 한다. 이 세션은 김수정의 장점인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과 크로스오버 특화 스플랫인 비스트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공사 현장에서 최면에 걸린 친구들이 스크럼을 짜고 막아서지만, 반에서 친구가 없는 수정은 그냥 두들겨 패 버리고 내부를 확인한다. 한민지를 속여서 실학사상주입기를 사용하려고 하자, 비스트의 감각으로 그것이 초자연적인 기구라는 것을 경고한다. 정체가 들통난 서세리는 마법소녀들의 분노한 맹공 앞에 아는 것을 분 뒤 쓰러지고, 사직서를 내고 지방으로 발령 처리된다.


이제 정말 다음 주제로는 뭘 해야 할 지 모르겠군. 의견 있으면 댓글로 달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