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룰 플로우가 도는 군. 카페에서도 자작룰 얘기가 좀 나오길래 여기다가 몇 줄 적어 봄.

어쨌든 제목에 메이킹 가이드라고 되어 있으니 도움이 되는 말들은 적어 보겠음.


냉혹한 현실

들어가기 전에 일단 하나 말하자. 님 자작룰이 경쟁해야 할 상대는 댄디 베이직이랑 던전월드, 페이트임. 이 세 개는 공짜로 할 수 있고 한글화도 돼 있고 퀄리티도 좋음. 자작룰을 만들기 전에는 애들이 걍 던전월드 하지 왜 이걸 하냐고 물었을 때 답변할 말이 필요함.


1.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골라라.

여기서 중요한 건, 최대한 이전 TRPG가 안 다뤘던 컨셉을 잡는 게 중요함. 물론 영어권 TRPG까지 치면 안다뤘던 영역은 거의 없어지지만... 그래도 최소한 한글화된 룰이랑은 겹치지 않는 장르나 컨셉이 필요함. 중세풍 판타지를 컨셉으로 잡는 건 최악의 선택이고, 스프롤이 나왔으니 룰-라이트한 사이버펑크 부분도 좀 타격이 있음.

혹시 여기서 "난 범용룰 만들거임!" 한다면, 단호하게 포기하라고 말하겠음. 훨씬 자본과 능력과 경험이 많은 제작사들도 범용룰 부분에 도전해서 좋은 성적 거둔 경우가 별로 없음. 미친 퀄리티의 서플을 찍어내던 겁스도 거의 준 폐점 상태에 들어갔고 크툴루와 룬퀘스트 덕에 규모로는 최상위권인 카오시움도 BRP 결국 포기함.


2. 개발 철학을 정하고, 데이터룰은 피해라.

흔히 게임주의/서사주의/모사주의 등으로 분류되는 쪽에서 어디에 넣어야 할 것인지 정해야 함. 어떤 부분을 특히 강조할 것인지를 고르고, 룰을 관통하는 주제나 분위기 같은 것도 정해야 함. 기존 게임에서 개발 철학을 보자면 패스파인더는 "D&D 3.5에서 불합리한 부분을 고친 개선판", D&D 5판은 "D20 시스템의 틀은 유지하되 룰을 간소화하고 현 시대 개발 트렌드를 최대한 수용", 던전월드는 "아포칼립스 월드의 시스템을 기존 D&D 체계에 최대한 욱여넣음" 정도가 되겠지.

자작룰 개발자들은 항상 어설프게 게임주의나 모사주의 쪽에 손을 대는데, 제발 그러지 마셈. 자작룰이라고 올려놓은 것들이 대부분의 항목을 (특기: 힘+1) 이딴 걸로 채운 것만 보면 짜증부터 남. 데이터룰을 지양해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임.

1) 데이터룰은 시간과 노력이 엄청나게 필요함. 님이 겁스 제작진처럼 온갖 장르의 클리셰에 정통해서 일일히 고증을 맞출 수 있거나 댄디 제작진들처럼 수십종류 피트를 다 돌려볼 게 아니라면 그냥 포기하셈.

2) 편집 기술이 부족하면 데이터룰은 굉장히 지저분함. 읽는 사람 입장에서 딱히 읽고 싶지가 않음.

그냥 얌전하게 룰 라이트하고 서사성 지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트셈.


3. 엔진을 쓰거나 기존 룰을 개수하는 걸 생각해봐라.

AWE로 나온 인디 게임만 수십 종류임. 준 엔진인 페이트나 새비지 월드는 말할 것도 없고. 뉴쨍도 틀은 그대로 두고 초자연체 종류만 새롭게 만든 팬 라인은 10종류가 넘음. 판타지 소설을 TRPG화 할 때 새로 룰 만들 거 같음? 대부분 디앤디 서플리먼트로 내지. 이렇게 상용화된 엔진을 쓰거나 기존 룰에 새 규칙을 조금 추가하는 경우는 난이도가 훨씬 낮아지고 편해짐.

아, 물론 엔진이나 원작 룰의 개발철학과 합치하는 방향이어야 함. 던전월드 개수룰이랍시고 +4, +5 보정치 이딴 식으로 붙여놓는 애들 있는데 그건 AWE 계열의 개발철학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부분임. "능동판정" 같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아니, 그리고 던전월드가 AWE 베이스인데 왜 AWE로 안 만들고 던전월드로 만듬? 물론 그런 개발철학을 좀 바꾸겠다고 결심할 수 있지만(던전월드 자체가 좀 그런 경우고) 최소한 원 룰이 원래 뭘 위해 만들었는지는 알아 둘 것.


4. 참신한 아이디어라고 좋은 것이 아니다.

자작룰 만드는 사람들이(심지어 몇몇 기성 출판사도) 착각하는 게, 참신한 거랑 좋은 건 다름. 가령 내가 한국식 TRPG를 만들겠다고 판정법을 화투 카드로 해서, 고스톱에서 점수가 나는 패(광, 고도리, 초단) 등에 따라 성공수가 달라지는 걸 생각해 봤다고 하자. 참신하지? 근데 이게 좋을까? 화투 패의 점수는 상당히 자의적이고 비직관적임. 플레이어들이 고스톱 규칙을 안다는 보장도 없고. 낼 때마다 계산하느라 흐름 끊길걸. 정 카드를 쓰고 싶다면 트럼프 카드를 이용해서 포커처럼 하는 편이 훨씬 나을 거임. 물론 그 경우도 딱히 재밌을 거 같지는 않지만...


5. 판정법과 시트는 최대한 직관적이어야 한다.

초보자들이 다이스풀 만지면, 주사위의 깊이와 넓이를 모두 조작할 수 있다는 생각에 빠져서 이런 걸 할 때가 있음. [기능] 개수의 주사위를 굴려서 [능력치] 이하의 주사위가 나오면 성공입니다. 멋져 보이지? 실제 플레이 하면 주사위 굴릴 때마다 헷갈려서 엄청 늘어질 걸. 판정법은 최대한 직관적이어야 함. 상향판정, 하향판정, 다이스풀 등이 있다면 무조건 하나만 써. 주사위 종류도 하나로 통일하는 쪽이 편함(이걸 지키지 않고 성공한 거의 유일한 반례가 새비지 월드 정도임).

캐릭터 시트도 마찬가지임. 딱 보면 추가적으로 계산할 필요 없이 나와야 함. 뭐가 덕지덕지 붙게 하지 마. 능력치는 능력치, 기능은 기능, 장점은 장점, 마법은 마법. 다 분리해서 놓고 서로 영향을 끼치지 않게 하셈. 그러니까 장점(힘 +1) 같은 거 하지 마. 그럴 거면 힘을 그냥 1 올리게 해 줘.

시트에서 곱하기나 나누기 부분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절대 계산기 쓸 일 없게 하셈.


6. 편집과 룰의 순서에 신경써라

편집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함. 편집 구린 룰은 시작부터 읽고 싶지도 않음. 기존 룰 참고해서 자간이나 글씨체, 문단 구성에 신경쓰셈. 글씨 색깔이나 이탤릭체 같은 것도 필요하면 쓰고. 이건 사실 디자인적 영역이라서 전문적인 룰과는 백 배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든 신경은 좀 써.

그리고 표준적인 RPG 룰북 순서는 1. 소개 - 2. 간단한 판정법, 설정, 개념 설명 - 3. 캐릭터 작성법 설명 - 4. 캐릭터 옵션 - 5. 기본 판정법(설명 추가해서) - 6. 전투 규칙 - 7. 기타 등등 비전투 규칙 - 8. (있다면) 마법 - 9. 장비 - (여기서부터 마스터링 파트) - 10. 마스터링 가이드 - 11. 배경설정 설명 - 12. 적 목록 - 13. 부록임.

여기서 한 두가지 순서가 바뀔 수는 있겠지만 이 순서를 따르는 쪽이 제일 무난하게 설명할 수 있음.


7. 하고 싶은 부분 뿐만이 아니라 필요한 부분의 룰을 만들어라.

좀 실력이 찬 사람들이 자작룰을 만들면, 기초적인 아이디어나 컨셉 같은 건 괜찮은 경우가 있음. 문제는 모든 TRPG에는 쓰는 입장에서는 별로 귀찮고 재미없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필수적인 요소들이 있다는 거임. 가령 던전월드에서 "한 번에 여러 명이 덤볐을 경우의 처리법" 이라던가 "탐험 및 구인, 잔치 규칙" 등이 여기 해당될 거고, 좀 더 모사주의적 룰에서는 "부위 타격 및 판정법, 극한 환경의 페널티, 추락 데미지" 등이 여기에 해당함. 모사주의적 룰을 추천하지 않는 것도 이렇게 필요하지만 지루한 파트가 엄청나게 늘어나기 때문임.


8. 다른 게임의 시나리오를 하나 잡고, 그 시나리오를 컨버전해보려고 시도해 봐라.

필요한 파트를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른 게임의 시나리오(던전월드처럼 그런 개념이 좀 희미하다면, 배경설정 가이드) 하나를 붙잡고 "내가 이 시나리오대로 돌렸을 때 막히는 부분이 없나?"를 확인해 보는 거임. 거기서 어떻게 처리할 지 모르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룰을 다시 손 볼 필요가 있는 거고.


9. 설명과 예시를 추가하자.

설명과 예시는 가독성에 엄청나게 중요함. 파딱이 글 썼지만, 글 쓰는 사람 머리에서 무슨 생각이 오가도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알 방법이 없음. 예시를 추가하면 쓰는 쪽에서도 예측치 못한 상황이나 머릿 속 생각을 또렷하게 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