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내가 마스터링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 시절

나는 판타지 모험 ORPG 중편을 열기로 하고 인원을 구인함. 룰은 심플하게 던전월드. 총 4인 팟이었는데 사람을 모으고 보니 플레이어가 3명이 모임.

한 명이 없던 참에 좀 더 기다려볼까, 생각하고 있으니 플레이어 한 명이 문득 말을 꺼냄. 그 플레이어는 이전에 세션을 같이 해서 알고 있는 플레이어였는데 고맙게도 이번에도 같이 세션을 해주기로 한 사람임. 이하 A로 지칭.

A가 꺼낸 말이란 자기가 전에 단편 세션을 한 번 같이 해본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고정된 팀이 없어서 세션 자리를 찾고 있으니 '그 사람'을 끼워주는건 어떠냐는 것.

A는 좋은 플레이어였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임. 그렇게 4명의 모험가들이 모이게 됨. 직업은 성기사, 마법사, 전사, 그리고 A의 추천을 받은 그 사람은 도적을 고름.

세션은 정말 무난하기 짝이 없는 중세 판타지 세션. 흔히 생각하는 고블린 나오고 마을 촌장이 의뢰하는 그거 맞음. 나는 세션을 하기에 앞서 캐매를 완료한 플레이어들의 시트를 한번씩 훑어봄.

고블린들한테 동료들을 잃은 경비병 출신 전사... 정의의 여신을 섬기며 교단의 명을 받고 파견된 성기사... 성기사의 절친한 친구로 마법으로 이름을 떨치고 싶어하는 마법사...

모두 무난하고 재밌는 백스토리였음. 이름도 닉, 에오윈, 카산드라에 포트도 백인 남녀의 실사풍. 세션 내용이 머릿 속에 그려지는 듯한 그때 눈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들어옴.

'나츠메 나기사'

이질적인 이름에 프사에 그려진건 카타나를 들고 있는 일본 전통 복장의 은발 미소녀. 물론 '그 사람'이 짜온 도적 캐릭터의 시트임. 당황한 나는 그 사람에게 물어보았는데 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설명을 함.

나츠메는 동방에서 온 검사인데, 소유자는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는 저주 받은 검 흑룡도의 현주인임. 오직 피와 싸움,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냉혹한 검사로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세계의 여러 강자들을 죽이는 모험을 떠나고 있다는 것.

순간 뇌정지가 왔지만 그래도 나는 최대한 친절하게 협상을 시도함. 캐릭터가 붕 뜨는 것 같으니 조금 바꿔보는게 어떠냐, 하니까 나츠메 쟝은 처음에는 "..." 같은걸 치면서 꺼려하는 듯 보였지만 이내 내 진심을 알아줬는지 그럼 세션과 어울리게 바꿔오겠다고 함. 안도하며 얼마 뒤 나는 새로 써온 시트를 확인함.

'나츠메 킨 르블랑'

동방에서 이주해온 전사 가문 출신으로 집안이 싫어서 가문의 비보 마검 흑룡도를 훔쳐 도주,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강자들을 죽이는 모험을 떠나는 중. 피와 싸움, 그리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냉혹한 검사. 물론 포트는 그대로.

어쨌든 세션 날짜는 코앞이었고, 성기사를 맡았던 A가 나츠메 쟝을 체포하려고 쫓아다니다 애증의 관계가 되었다는 설정을 넣어주는 등 어떻게든 세션에 녹여낼 구실을 만들어줘서 나도 OK 했음. 그리고 그때 난 착한 마스터 콤플렉스에 걸려서 너무 뭐라하는 거에 거부감이 있었음.

수정된 시트를 보고 많은 말을 참고 있었으나, 한가지 더 이상한게 눈에 들어옴. 분명 도적일텐데 시트에 전사 특유의 고유병기가 멋대로 작성 되어있었음. 이건 또 뭔가요, 하고 물으니 나츠메 쟝이 대답함. 저주 받은 마검 흑룡도라고.

마스터인 나는 아무런 이야기도 못들었고 파티에 진짜 전사도 있었던만큼 나는 다시 협상에 들어감. 치열한 토론 끝에 저주 받은 마검 흑룡도라는 설정은 유지하되, 고유병기 같이 수치적 이점은 줄 수 없다고 서로 타협함. 이때까지만 해도 이게 다 좋은 마스터가 되기 위한 시련이 아닐까 하고 넘김.

마침내 세션 시작. 지나가는 npc들한테 갑자기 시비를 걸거나, 혼자만 아는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고양이처럼 고롱거립니다, 같은 매콤한 플레이를 보여주는 나츠메 쟝이었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의 활약으로 어찌어찌 굴러는 감.

게다가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나츠메 쟝의 흑룡도를 스토리의 중심 소재들 중 하나로 설정하고 다른 캐릭터들의 백스랑 버무려 스토리를 진행하기로 정함. 이러면 나츠메 쟝도 극이랑 잘 어우러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흡족해했음. 하지만 동방검사 나츠메 쟝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매웠음.

파티가 우호적인 NPC 무리랑 만났고, 그 NPC들이 저주 받은 마검 흑룡도에 얽힌 전설을 파티에게 들려줌. 그러면서 나츠메 쟝에게 흑룡도에 대해 경고를 하는 식으로 떡밥을 대거 투척했음. 나츠메 쟝도 마음에 들었는지 보기 드물게 알아들을 수 있는 대사를 하면서 역시 나는 대단한 마스터라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이었음. NPC들과의 대화가 갑자기 끝난 직후, 우리 나츠메 쟝이 한가지 선언을 함.

나츠메 쟝: 흑룡도를 뽑아서 NPC들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립니다.

??? 나는 눈을 비비며 재차 삼차 확인하고 NPC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경고했지만 나츠메 쟝은 꿋꿋이 선언을 강행하겠다고 함. 일단 판정을 굴려보랬지만 설마 했던 대성공. 아는게 조금 많았을 뿐인 무력한 NPC들은 그 자리에서 피를 뿜으면서 쓰러짐. 당연히 다른 NPC들은 파티에게 적의를 표했고, 피를 묻히며 미친 듯이 웃는 나츠메와는 달리 다른 플레이어들은 분위기가 싸해짐.

결국 세션을 중단하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음. 나츠메 쟝을 계속 챙겨주던 A도 제대로 빡이 돌았는지 크게 싸움이 남. 그 와중에 나츠메 쟝은 자기는 자기 RP를 했을 뿐 잘못한건 없다고 말해 싸움은 점점 커짐.

A: 아니 거기서 아무런 동의도 없이 그렇게 행동하시면 어떡해요.

나츠메 쟝: 저는 제가 그렇게까지 크게 잘못한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나츠메 쟝: 나츠메는 순간 흑룡도의 힘에 잠식당해서 그런거에요. 게다가 사람 죽이는데 죄책감 같은건 없다고 백스에도 적어놨잖아요.

상상을 초월하는 맵기에 나는 맨탈이 터졌고 다른 플레이어들도 결국 탈주해버리면서 세션은 그대로 같이 터져버림. 터져버린 단톡방에 허탈한 마음으로 혼자 있으니, 문득 나에게 개인톡이 하나 날아옴. 나츠메 쟝에게서 날아온거였음.

나츠메: 오늘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나츠메: 정말 죄송하긴 한데...
나츠메: 너무 만족스런 RP를 한거 같아서 기분이 좋아버리네요.

나는 그때 비로소 깨달음. 마스터에게 필요한 덕목 1순위는 스토리도 묘사력도 아니라 ㅈ같은걸 미리 쳐내는 능력이라는걸.

지금에 와서 나츠메 쟝이 뭘 하고 지내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이 글을 보고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너 그때 진짜 개 좆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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