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무래도 개씹덕후가 됐다 보니까 뭐든 보면 "아 이거 WoD랑 비슷한 구석이 있네" 싶은 게 있을 때가 있어요. 특히 만화, 소설, 영화 등을 볼 때 그런 느낌을 자주 받지요. 뭐 그렇다고 저는 "이 열등한 놈들이 신성한 WoD를 베껴?" 같은 감수성은 아니고요. 어떻게든 제가 플롯이나 연출 방식을 차용해서(라고 쓰고 베껴서라고 읽음) 써먹기 위해 해당 작품을 WoD 설정에 맞춰서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자주 봅니다. 씹덕후라고 해도 할 말 없네요...


 그런데 얼마 전에 보니 "WoD 분위기와 비슷한 참고 작품으로 뭐가 있겠느냐"는 글이 올라왔어서 몇 가지 추천을 해볼까 합니다. 저도 WoD 재밌게 해보겠답시고 이런저런 작품들을 많이 뒤지고 다닌 때가 있었고, 그 시절에 이런저런 방면으로 작품 소개해준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거든요. 뭐 제가 부족한 깜냥으로 이런 글 쓴다고 도움 받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 싶긴 하지만... 그래도 WoD를 하겠다는 사람에게 잠재적이나마 도움을 제공할 수 있을까 싶어서 부족하나마 글을 써봤습니다. 어쨌든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네, 페이블즈(Fables)입니다. 저는 군대 있을 때 보기 시작한 만화네요. 버티고에서 02년부터 내기 시작한 꽤 된 만화입니다. 바로 작년에 완결이 났지만 외전들은 꾸역꾸역 계속 나오고 있기도 한 시리즈입니다. 국내에는 디럭스 에디션으로 6권, 그러니까 이슈 51에 해당하는 분량까지 정식으로 번역되서 출판됐습니다. 워낙 유명한 만화라서 이미 아실 분은 다 아실 만한 작품이지만, 혹시 모르시는 분들은 이 게임을 보면 "아 이거구만" 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더 울프 어몽 어스(The Wolf Among Us)라고 스팀에서 꽤나 호평을 받으며 인기를 끌었던 게임이죠. 더 울프 어몽 어스는 페이블즈 시리즈와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이며, 사실 주인공도 동일인물입니다. 저는 더 울프 어몽 어스를 직접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시놉시스를 보아하니 이슈 1 시작 이전을 다루는 프리퀄인 듯하더군요.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페이블즈가 왜 WoD를 하는 데 도움이 되느냐? 그건 페이블즈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하고 들어갈 부분이겠습니다.


 페이블즈의 주인공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허구의 존재들입니다. 크고 나쁜 늑대, 백설공주, 모글리 등 인간들의 동화에 의해 이루어진 어떤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꼭 동화적 존재일 필요만은 없어서, 어떤 이들은 신화나 전설 속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비슷한 모티프로 연결된 "자기 이야기"가 많을 수록 다양한 힘을 얻습니다. 예를 들어서 주인공 빅비(크고 나쁜 늑대; Big Bad Wolf)는 빨간 망토에 나오는 늑대입니다. 그래서 단지 사납고 흉포할 뿐만 아니라 교활하고 똑똑한 면모도 지니고 있지요. 그런 동시에 빅비는 아기 돼지 삼형제에 나오는 늑대의 모티프까지 지니고 있습니다. 그 덕에 그는 강한 바람을 불어서 파괴적인 돌풍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들이 지닌 힘의 정도는 본질적으로는 등장하는 이야기 속에서 얼마나 강대하게 묘사되느냐에 따르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집니다. 그 덕에 백설공주는 저격소총에 전두골이 박살나서 뇌의 절반이 날아가고도 몇 주 후에 재생해서 깨어납니다...


 본래 이들은 모두 실제 세계가 아닌 동화의 세계... 이를 테면 WoD의 움브라 비슷한 곳에 살던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엔가 소위 마왕(The Adversary)이라는 존재가 나타나 동화계를 정복하며 이들의 삶은 파탄으로 치닿게 됐습니다. 마왕은 모든 환상계를 단 하나의 질서로 통합시키기 시작했고, 그의 질서에 반하는 이들은 가차없이 숙청당하게 됩니다. 일부는 마왕의 질서에 굴복하고 순응하여 보다 안정되고 체계잡힌 세상의 부품이 되기로 했지만, 다른 이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본질적으로 관념적 존재였기에, 일부는 마왕의 질서를 존재론적으로 수용할 수 없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트릭스터인 여우 레너드 같은 존재들은 선천적으로 마왕의 질서를 인정할 수 없었지요. 본질 자체가 혼돈과 기만을 통해 진실을 드러내는 존재인데, 어떻게 절대권력에 의한 일원화된 질서를 수용할 수 있었겠어요?



 그 탓에 많은 동화계에 살던 존재들이 마왕에게 사냥당해 소멸해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는 간신히 차원도약(?)에 성공해서 추적자들을 뿌리치고 기적적인 엑소더스에 성공했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이 바로 실제 세계였고, 이들은 간신히 실제 세계의 이면에 숨어서 일종의 자치구를 이루어서 살아가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자치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바로 만화의 주된 내용이지요. 주인공들은 대개 유럽 전승 출신의 존재들로 뉴욕에서 살아가지만, 다른 문화권 전승의 존재들도 각기 다른 지구상 장소에서 숨어 살아가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지구는 이들 동화의 존재들이 살아가기에는 썩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용이나 거인, 말하는 돼지 등이 나타난다면? 당연히 소동이 벌어지고 인간들은 이 낯선 이방인들을 찾아내 제거하거나 연구대상으로 삼았을 겁니다.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이 정체를 숨긴 채 살아야 했고, 그나마도 정체를 숨길 수 없는 자들은 다른 동화적 존재들의 강요에 의해 외딴 벽지에서 수용소 생활이나 다름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나마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동화적 존재들은 인간들 사이에 숨어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도 대부분의 재산과 마도구들을 고향에 두고 온 데다가, 동화적 약점은 모두 다 간직한 채였으므로, 지구에서의 삶이 각박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인공인 빅비는 태생이 야생에 속한 사냥꾼이지만 이제 강제로 인간들 사이에서 온갖 악취와 문명적 제약에 시달리며 살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자신의 옛 사냥감인 동료 망명자들과 함께 말입니다. 많은 동화적 존재들이 빅비가 아직 추악한 식인마의 본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어서 무서워하거나 경멸합니다. 또한 어떤 동화적 존재들은 살인이나 폭력과 관계된 본성을 지니고 있어서 인간들 사이에서 사는 데 곤란함을 겪기도 합니다. 푸른 수염이 바로 그러한 예지요. 그런가 하면 백마 탄 왕자(Prince Charming)는 예쁜 여자가 있으면 꼬시지 않고는 그냥 못넘어갑니다. 이러한 본질적 특성 탓에 동화적 존재들이 서로 불신하고 증오함에도 어떻게든 공동의 질서를 갖고 인간들 사이에 숨어서 함께 살아가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언젠가 마왕이 자신들을 사냥하러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것 말입니다. 뭐,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때를 기다리다보면 반격해서 고향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구를 새 집으로 삼아서 적응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뭔가 WoD와 비슷한 구석이 느껴지지 않나요?


 페이블즈가 WoD를 베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꽤나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이고, 실제로도 WoD에서 영감을 얻은 이야기들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작중에서는 잠깐 놋기(The Book of Nod)라는 서점이 등장합니다. 게다가 아예 한 이슈에서는 수 세기 동안이나 늙지 않고 살아가는 동화적 존재들의 정체를 알아낸 한 기자가 기사를 쓰기 시작하고, 이를 막기 위해 동화적 존재들이 그의 집으로 침입서해 입막음을 시키는 이야기를 다루기도 합니다. 이 때 기자는 주인공들을 뱀파이어로 오인하고 자기도 뱀파이어로 만들어달라고 애걸하지요. 굳이 이 이슈가 아니어도 페이블즈에는 WoD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소재들이 풍부하게 산재했습니다. 마왕이 동화계를 정복해 단일 제국을 세우는 모습은 (후일 테크노크라틱 유니온이 되는)오더 오브 리즌이 근세에 자신들의 획일화 정책에 반하는 신비한 존재들을 말살하는 과정과 흡사합니다. 정체를 숨기고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동화적 존재들의 모습은 뱀파이어, 마법사, 심지어는 요정과도 비슷한 면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향을 되찾기 위해 절대적인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동화들(대개 신화적이거나 동물적인 존재들입니다)은 늑대인간과 유사한 구석이 있지요.


 하지만 단지 WoD와 비슷한 소재들이 등장한다는 이유 때문에 페이블즈를 추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다 흥미롭게 볼 점은 주인공들 사이의 관계에서 나오는 드라마에 있습니다. 이처럼 신비한 기원과 힘, 약점을 지닌 존재들이 어쩔 수 없이 생존과 대의를 위해 서로를 미워함에도 같이 살아가야 한다면... 그리고 21세기 인간 사회의 이면에서 정체를 감추고 살아가야 한다면... 이들 사이에는 과연 어떤 지지고 볶는 이야기들이 벌어질까요? 페이블즈는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단순한 우화부터 시작해서 음모, 배신, 고뇌, 후회에 이르는 비극에 이르기까지 흥미롭고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즉 페이블즈는 WoD의 괴물들과 유사한 존재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어떻게 느끼고, 서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떤 드라마를 만들어갈지에 대한 좋은 예시이자 참고가 됩니다. 자세한 줄거리는 이 만화를 직접 보실 분들을 위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상당히 재밌습니다. 그리고 WoD에서 다루는 이야기와도 궤가 비슷합니다. WoD도 결국은 괴물들의 드라마니까요.


 여담이지만 페이블즈는 영화화가 될 계획이 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기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