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일단 룰은 던전월드. 그런데 나노펑크/사이버펑크 세계관에 맞게 이름 등을 살짝 손질해 뒀다.

세계관은 행성 전체를 덮는 나노머신 네트워크, '누스피어'에 존재하는 전자지성, '신'이나 '정령' 또는

마법사의 지성을 통해서 마법을 구사할 수 있다... 는 식상한 설정.

플레이어들은 이 세계에서 돈을 받고 의뢰나 던전 탐사를 해 주는 해결사 일을 하고 있다는 컨셉이다.

이 사무소 이름이 'V씨와 오폐수들' 이며, 덤으로 플레이어 전원은 실제 친구들.
내 인생 처음 TRPG 파티이며, 동시에 첫 마스터링인 셈이다.



일단 거의 한 달 전에 오프라인으로 했었던 첫 세션은, 나름 만족스럽게 끝나긴 했었다.

하지만 나도 인생 처음 TRPG, 게다가 심지어 마스터였으니, 사실 던전월드 국면 신경 안 쓰고 준비 너무 많이 해 갔었지.

뭐, 변명거리야 있어. 수사극이니까 최소한 단서가 어떤 게 가능한지, 그걸로 어디까지 추리가 가능한지는 정해 둬야 했으니.

하지만 이번에도 룰을 정면으로 거스를 순 없으니, 이번에는 여백을 마련해두고 좀 '마이클 베이'스럽게 가기로 했다.


여기에, 갑작스럽게 친구 한 명이 끼워달라고 연락이 온 판. 일단 받아주기는 했다.

때문에 일단 뼈대는 '무언가 정보를 얻고 나서 쫓기는 해커(신입 플레이어)를 추격자로부터 지키는' 걸 메인으로 하고,

첫 번째 세션에서 가장 주목을 못 받았지만, 현재 캠페인 국면에 가장 얽혀 있는 성기사 A씨의 떡밥을 엮는 걸로 했다.


그런데 사람이 한 명 추가되니까, 도저히 오프라인으로는 시간을 맞출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ORPG로 갈아타기로 했는데... 오프에서 만날 시간이 없으면 온라인에서도 매한가지였음.

때문에 나는 최후의 수단, "자정부터 밤샘팟 간다!"를 선언하고, 벼락치기로 세션 날짜가 잡혔다.

Roll20 기능 익히느라 힘들었다... 토큰... 토큰...



1.

아무튼, 시작부터 레즈비언 변태 암살자 M양(플레이어는 남자입니다)가 사장이 부르는데 사무실에서 자고 있었다, 는

설정을 던져서 사장 플레이어가 뺨따구 때리고 물 붓고 뒷목 잡고, 다짜고짜 콩트를 시작하더라. 꿀잼이었음.

(덤으로 오글거린다 할 거 없음. TRPG 하기 전부터 우리는 이러고 놀았거든... 이게 더 막장이네.)


아무튼, A군네 교단의 사제 카밀로 씨가 해커 E씨가 경호를 요구한다는 걸 알려오고, 차 끌고 교회로 가는 길에,

커스텀 액션에서 경험치 1점을 받은 A군 덕분에, 다짜고짜 대전차로켓이 날아오고

홀로그램으로 불타는 거인의 형상을 만들어낸 정령이 자동차들을 뒤엎기 시작하고...

순조롭게 마이클 베이식 블록버스터가 시작되었다.

그 이후에도, 여성 성기사 한 명이 나와서 도와주고, 교회에 가서 협박전화를 듣고... 뭐 거기까지는 순조롭게 잘 됐음.

그런데 교회에서, 사장이자 레인저인 V가 드론을 활용해서(원작 사냥꾼의 동물 동료 대체) 추적을 하면

오히려 기습해온 놈들과의 협상 전에 먼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아서,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말하자면 '던전월드 식으로' 흘러가기 시작함.



2.

일단 역추적 자체는 매우 좋은 플레이었으므로, V가 M을 대동해서 수색 가는 건 당연히 잘 진행되었음.

수색은 보정치 다 끌어들이다 보니 대성공이었고, 여기서 '흥미로운 정보'를 뭘 줘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기습한 놈들이 중국집에서 점심 먹고 나오는 걸 발견했다(...) 는 무리수를 던짐.

하지만 다짜고짜 덤비지는 못하게, 적들 머릿수가 여섯이며 다들 무장이 괜찮다고 설명했지.

그러나, 나는 V 캐릭터 포트레잇은 대놓고 영화 존 윅 포스터에서 키아누 리브스 얼굴을 잘라 사용하고 있으며,

V의 플레이어는 영화 레이드를 성전처럼 여기며, 칼리 아르니스 수련 중이고, 액션 라이트노벨을 집필하고 있는,

17대 1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물 흐르듯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놈이라는 것을 까먹고 있었다.

V는 기습을 걸었고, 기습을 거는 전술이 매우 그럴듯해서 말릴 수도 없었음.

그리고, 난 왜 턀갤러들이 던전월드 시스템이 전투에 부적합하다고 했는지 그때서야 이해했다.

가장 큰 문제는 잡졸들. 던월 시스템 상, 잡졸들은 전투를 늘어지게 할 뿐 거의 전투력으로서 가치가 없음.

때문에 전투는 지지부진. 심지어 나머지 플레이어 둘은 교회에서 기다리고 있는 판이라, 무전기로 응원밖에 못 함.

게다가 '피해를 주지 말고, 불리한 상황을 만든다' 고 해도, '밀가루 포대를 집어던진 다음 쏴서 연막을 치겠다' 같은

플레이면 '바람 때문에 밀가루가 아군의 시야마저도 가린다' 식으로 호응해 줄 수 있지,

길거리에서 권총 쏴대고 단검 휘두르며 드잡이질 하는데, 공격을 빗겨나갔다고 해서 불리할 상황이란 게 한정되어 있잖아.


게다가 여기서 내가 '떡밥을 조금이라도 안 풀면 반전이 무리수라는 말 듣는다'는 조급함이 있어서,

잡졸들 대다수를 교회로 보내면서도, 약간 무리수를 써서(룰적으로는 가능해 보였지만...)

암살자들 보스가 뱀파이어 피를 주사해서 불완전한 뱀파이어가 되었다고 전개해 버림. 덕분에 배틀은 조금 더 늘어지고...


아무튼, 어떻게 전투가 승리로 끝났지만, 이젠 짜증나는 잡졸들이나 교회로 몰려가고 있는 상황.

사실 적의 구심점이라는 게 사라졌으니, 이제 나에게 남은 건 준비해 놓은 그거밖에 없었지.

'우리들을 도와주던 여성 성기사'가 사실 뱀파이어라는 반전을 터트렸다.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너무 티 안 나게 한다고 복선을 아주 살금살금 깔았는데,

V가 말하자면, 단축 루트를 열어버려서, 복선을 충분히 깔 시간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음.


어쨌거나 정체를 드러내고 해커를 인질로 잡은 뱀파이어를, 성기사의 노력으로(협조 액션 동원하고, 풀 다이스가 뜨고...)

뱀파이어의 눈길을 끌어 인질을 구출하고 그녀를 처단한다는 과정 자체는 꽤 멋들어지게 나왔지만

역시 반전이 뜬금없었다는 소리가 나오더라.

에필로그에서 NPC의 대사로 '~~가 의심스러웠다'고 말해 주긴 했지만, 그거 가지고 어떻게 추리가 가능하냐는 게 다수의견.


3.

그래서 결심한 점 몇 가지.


1. 만약 국면과 연계되어 있는 복선이라면, 그냥 처음부터 팍팍 깔자.

뻔한 게 뜬금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겠더라. 아니, 생각해보면 사실 뻔하지 않게 깔 기회도 충분히 있었고.

내가 통수를 플롯의 주요 소재로 선호하는 이상, 흉조로서의 복선 활용에 대해서 고심할 필요가 있을 거 같다.



2. 전투를 하지 말고, 추격과 도주와 인질극을 벌여라.

내가 소설 평론에서 했던 말인, '액션은 동작의 연속이 아닌 상황의 연속이다' 라는 말을, 정작 TRPG에서 못 쓴 참사.

처음에 있었던 로드 레이스는 조수석에서 핸들을 급하게 꺾어 아슬아슬하게 로켓을 피한다던가,

정령을 소환한 술자의 손을 정조준 사격해서 추격을 멈추게 한다던가 하는, 다채로운 상황과 액션이 있었다.

최종전에서의 인질극 역시, 인질이 된 해커와 창을 든 성기사가 박자를 맞춰 도망친다던가 하는 게 가능했지.


하지만 중반의 골목길 총격전은, 물론 내가 마스터링을 못 한 것도, 새벽이라 피곤한 것도 있겠지만, 실제 노잼이었다.

앞으로 그런 전투는 최대한 피하게 하려고. 교전이 일어나면 미끼를 남겨두고 도망치고, 무언가 장치를 쓰게 하고...



3. 역시 사이버펑크가 최고다...

기껏 SF적인 설정을 끼워놨는데, 마법과 신이 주요 테마가 되니까 그냥 오리지널 던월과 분위기에서 별 차이가 없어...

내가 원한 건 그죄용춤 같은 과격한 느낌의 배틀이었는데, 시간이 없으니까 그런 묘사는 그냥 스킵.

해커도 파티에 영입됐겠다, 다음 세션은 플레이어들 취향 반영하되 베이스는 내 취향의 사이버펑크 첩보전으로...

반 농담조로 적었지만, 아무래도 신입은 룰을 '읽어만' 본 상태였으니, 역시 인질이 된 거랑 RP 약간 말고는 한 게 없으니,

다음 세션은 확실히 해커가 활약할 만한 걸로 짜야 할 듯하다.



암튼,  초보 마스터라 불안불안한 플레이었지만, 친구들은 그럭저럭 재미있게 해준 거 같아서 다행이다.

다음 세션은 이것보다 조금 더 나아질 수 있기를 기대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