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댄디, 정확히 말하자면 패파만 하는 진성 패창이기때문에 글도 기본적으론 그와 관련됨. 암튼 이놈의 자유도 떡밥은 무슨 킬성큰 살려조마냥 꾸준히 재등판하는데 한번 진득하게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고본다.
라곤해도 사실 턀갤의 많은 현자들이 이미 "자유도는 전부 허상" 이라고 외쳐온 바 있기 때문에 이제와서 이 부분에 대해 따지는 사람은 없을거임. 다만 난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고 싶은데, 뭐냐면 "데이터룰에서 모든 수제 플레이는 본질적으로 레일로드" 라는 것임.
이게 왜 그렇게 되는지는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trpg&no=123461&exception_mode=recommend&page=1 여기 이 글이 잘 정리해놨음. 한마디로 말해서 준비량과 가성비의 문제임. 너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을 A부터 Z까지 아무리 쭉 많이 준비한다 쳐도, 개중 플레이어들이 볼 수 있는 길은 하나뿐임. 나머지는 드러나지 않으니까 전부 아무 의미도 없는거지.
이러면 상식적으로 A~Z를 전부 고만고만하게 준비하기보다 A 딱 하나만 잡고 그 하나를 오지게 준비하는게 더 옳은 전략임. 이 경우 PL은 훨씬 양질의 스토리를 즐길 수 있어서 좋고, DM은 준비량이 적어져서 좋음. 서로 윈윈인데 당연히 이 길을 가야지.
그런데 여기서 누구 한 명이 "어? 난 B로 가고싶은데?" 라고 했다고 쳐보자. 그럼 이제 여기서 좋은 레일로드와 나쁜 레일로드가 나뉨. 나쁜 레일로드는 "B로는 못갑니다. A로 가셔야해요" 라고 PL한테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경우. 이런 게 흔히 불만 나오는 "마스터가 루트를 강제한다" 라는 케이스임. 대체로 DM이 경험이 없을 때 자주 발생하지.
반면 좋은 레일로드는 위에 나온것처럼 "B로 갔더니 그게 A로 통하게끔" 즉석에서 임기응변으로 그럴듯하게 짜내는 경우. 이때 정 둘러대는 데 부족하면 준비한 적 토큰 종류를 좀 바꾼다든지 맵을 스리슬쩍 다른걸로 바꾼다든지 하기도 함. 어쨌든 A를 준비한 선에서 크게 바뀌진 않음. 크고작은 보너스나 페널티가 있을 순 있어도. (마찬가지로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trpg&no=123196&exception_mode=recommend&page=1 참조)
그리고 더 좋은 레일로드는, 애초에 PL들이 "B로 간다" 라는 발상 자체를 하지 못하게 함.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선 CRPG와 TRPG의 자유도 개념 차이를 먼저 알아야 함. CRPG에서 자유도는 말 그대로 "너가 무슨 짓을 해도 좋다" 라는 자유도임. 이 점은 폴아웃이나 스카이림을 해보면 잘 알수있지. NCR이나 제국군을 도와주며 잘 지내다가도 어느 날 "흠 이새끼들 모가지 따고 싶은데" 라고 생각하면 언제든 칼을 휘둘러 상대를 죽일 수 있잖아.
물론 저렇게 하면 평판이 곤두박질치고 이후 게임 진행에 난관을 겪겠지. 그러니 어지간하면 하지 않을거임. 하지만 중요한 건 "할 수 있다" 라는 거임. 자체 하드플레이가 되니까 안 하는 거지 맘만 먹으면 할 수는 있음. 그리고 그렇게 하더라도 보통 엔딩은 볼 수 있어. 어쨌든 이런 류의 게임들에선 암만 플레이 말아먹어도 메인스토리 엔딩만큼은 보게 해주니까는.
근데 TRPG에선 이렇게 접근하면 안됨. 니가 굴리는 캐릭터는 그냥 "13레벨 인간 파이터" 가 아님. "도시의 법과 질서를 가급적 따르려 하는 질서 중립 성향의 중년 남성" 이자, "아내와 딸을 드래곤에게 잃고 복수를 위해 방랑하는 전사" 이고, "주신을 믿으며 늘 기도를 빠뜨리지 않는 신실한 신도" 임. 데이터에 반영되지 않는 이런 성격/배경/설정이 존재하기 때문에 TRPG는 TRPG인 것.
이 부분을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TRPG는 "캐릭터의 행동이 성격/배경/설정에 얽매이고 제약받기 때문에" CRPG와 차별화된다고 할 수 있음. TRPG를 자유도의 게임이라고 하는 게 지랄인 이유가 이거임. 걍 돌죽 컨하듯 주사위 굴리고 명중보정만 더하면서 겜할거면 TRPG 할 이유가 없지. 가서 그래픽 좋고 타격감 좋은 컴퓨터 겜이나 하지 뭣하러 이런 찐따취미에 붙어있냐.
스카이림/폴아웃 예시를 다시 들고오자면, 컴퓨터 게임에서는 어제까지 사이좋았던 팩션의 수장 모가지를 오늘 갑자기 변심해서 따버릴 수 있지만 TRPG는 그럴 수 없음. 만약 플레이어가 그러겠다고 하면 DM은 "네? 왜 그러는데요?" 하고 묻겠지. 여기서 "그냥 하고 싶어서요" 라는 대답을 한다면? 당연히 중지손가락을 날리며 엿이나 먹으라고 할 테고. 그렇게 지 꼴리는대로만 PC의 행동을 결정할 "자유도" 는 이 취미에 존재하지 않음.
다시 말하지만 TRPG에서 설정은 그냥 텍스트 쪼가리로만 남는 게 아님. 각 플레이어는 자기 캐릭터 설정을 행동에 반영해야 함. 그래야 할 의무가 있음. 그게 RP를 한다는 거고, 이걸 거부하면 걍 병신 플레이어임. 여기까지는 너무 당연한거라 재차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리고 위에서 "아예 다른 길로 간다는 발상을 못하게 하는 것" 이라고 말한 건 바로 이 부분을 이용하는 거임. 예를 들어 너가 DM이고 이번 플에서 파티로 하여금 인신매매를 일삼는 뒷세계 조직과 싸우게 하고 싶다고 해보자. 그리고 파티에는 위에 언급한 방랑 중년 전사를 포함해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혼돈 중립 바드, 손익계산에 충실한 중립 악 로그가 있다고 하고.
평범하게 진행하는 DM이라면 도시에 들어선 파티를 경비대장이나 기타 누군가가 알아보고 "납치 및 인신매매를 일삼는 XX라는 쓰레기 조직을 일소하려는데 도와주시오" 라고 의뢰를 하게 할거임. 이러면 파티에게는 두가지 선택지가 생기겠지. 받아들이거나, 거절하거나.
문제는 여기서 의뢰를 받는 메리트를 충실히 묘사하지 않으면 거절하고 떠날 수도 있다는 거임. 예컨대 중립 악 로그는 "우린 우리의 목적이 있는데 뭣하러 여기서 시간낭비하냐" / "뒷세계 조직의 원한을 사면 후환이 있다" 따위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음. 물론 이에 대해서 DM은 "녀석들은 여러분의 목적과 연관된 정보를 지니고 있습니다" / "조직의 규모가 크진 않아서 뒷일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군요" 따위를 붙여서 내보낼 수 있지만, 이걸 자연스럽게 해내지 못하면 영 궁색해 보이지. 혹은 아예 그런 노력조차 안 하고 "님들 이거 받아야 돼요 빼애애액" 하면 걍 나쁜 DM의 전형적인 사례인거고.
반면 이걸 진짜 제대로 레일로드를 굴리고 싶으면? 이렇게 하면 됨. 위에 언급한 남자가 도시를 걷던 와중 어떤 소녀의 비명소리를 들음. 뭔일인가 해서 돌아보니 골목길에서 성인 장정 여럿이 여자아이를 제압해 끌고 가려고 하고 있는 거임. 그런데 여자아이의 생김새가 어쩐지 묘하게 익숙함. 자세히 보니 사별한 자기 딸을 많이 닮은 것 같음.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 우연히 여자아이와 눈이 딱 마주치고, 걔가 소리지르는 거임. "도와주세요!" 하고.
이 남자가 단순히 "13레벨 인간 파이터" 였다면, 여기서 돕지 않고 무시하고 지나간다는 선택지도 있음.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이 남자는 "법과 규칙을 존중하는 질서 중립 성향" 이자 "아내와 딸을 잃은 트라우마를 지닌 가장" 임. 그런 캐릭터에게 자기 딸을 닮은 소녀가 실시간으로 납치되는 장면을 낸다? 99.99% 떡밥을 물음. 위에서 말했듯이, TRPG에서 캐릭터는 자신의 설정에 따라서 행동하게 되어있기 때문임.
당연히 남자는 나설 테고, 고렙 파이터다운 간지를 발휘해서 납치범들을 때려눕히고 소녀를 구출하겠지. 그럼 이제 이 시점에서 열차는 선로 위에서 굴러가기 시작하는거임. 이미 조직원을 때려눕히는 형태로 해당 조직과 엮였기 때문에, DM은 이제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전개를 주물럭댈 수 있음. 로그가 섣부른 행동을 한 파이터를 질책하며 "빨리 짐 싸라! 이곳에서 째자!" 하면 바로 그 순간 파이터를 추적해온 조직원들이 들이닥친다고 할 수 있고, 그걸 뚫고도 여전히 도망치려 하면 소동을 듣고 온 경비대의 입을 빌려 "이건 XX 놈들의 소행이로군요. 녀석들은 끈질기고 집요해서 끝까지 여러분을 물고 늘어질 겁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음. 요컨대 조직을 부수는 것 외의 선택지를 원천차단하는 거임. 다른 누구의 소행도 아닌 파이터 자신의 행동의 결과물로써.
내가 마스터링이 본질적으로 레일로드라고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레일을 까는 방식이 차이가 날 뿐, 결국 데이터룰에서 모든 마스터는 자신이 준비한 플롯대로 파티의 행동을 수렴시키게 되어 있음. 단지 짬 좀 쌓이면 선로를 노출하지 않고 "그 캐릭터라면 이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라는 포인트를 콕 집어 떡밥을 던져 전개를 유도하기 때문에 티가 안 날 뿐임.
경험이 쌓일수록, 룰에 익숙해질수록, PC/PL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질수록 이러한 "노련함" 은 더욱 늘어난다. 하지만 결국 근원으로 파고들어가면 이것도 레일로드야. 레일로드일 수밖에 없어. 아니면 싯팔 그걸 준비를 언제 다 하고 앉아있음? 모듈이야 여러 사람이 모여 만든 걸 돈 받고 파는 거니까 당연히 모든 가짓수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게 당연하지만, 우린 아니잖아. 모듈만큼 준비할 시간과 예산이 많지 않은 대신 PC/PL 하나하나에 개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게 수제 시나리오의 장점이니까, 그 장점을 살려야 하는 게 맞아. 실제로 그 쪽이 더 재밌고.
이런 거 없이 진짜로 "TRPG는 자유도가 장점이니까, 여러분은 뭐든지 시도해보세요" 같은 백지 컨셉을 던지면 십중팔구 존나 재미없음. 아니 뭐 실력이 있으면 그걸로도 재미를 뽑아낼 수 있겠다만, 그럴 수 있을 실력이면 평범하게 시나리오 짜서 돌리면 더 재밌을걸. 정플이랑 상시플을 세션 퀄리티로 비교하는거나 마찬가지임.
RPG는 정말 아무 선택이나 할 수 있어서 재밌는 취미가 아님. 자기가 만들어낸, 현실의 자신과는 다른 성향/사고/능력/배경을 지닌 캐릭터로 그에 따른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으니까 재밌는거지. 이걸 이해 못하면 걍 컴퓨터 게임을 하러 가야지.
한줄요약 : 좋은 마스터는 레일로드를 안 깔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주는 마스터가 아니라, PC가 물 수밖에 없는 떡밥을 던져 그걸로 선로를 까는 마스터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은 데이터룰에나 해당되는 말이다. 서사룰엔 해당사항 없음.
마스터가 다음번 세션을 준비하는데 영향을 줄 수 있으면 딱히 레일로드는 아니지 않음?
킹건맞지 근데 한 세션 내에서는 무조건 레일로드일수밖에 없다는것. 아니면 선로가 두세개거나.
노력추. 근데 턀갤에서 같은 떡밥으로 비슷한 글 오질나게 본 거 같음 ㅋㅋ 다들 그래서 글 더 안쓰는 걸거야
사실 정말로 새로운 걸 말하고 싶었다기보단 내 평소 지론 정리에 가깝다 ㅎ 이렇게 글써두면 나중에 다시 읽을 때 재밌어서... 암튼 봐줘서 ㄳ
티알의 자유도는 과정의 자유야 - dc App
킬성큰 살려조가 뭔데 틀딱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