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변과 소통하는 캐릭터

여태까지 갤에서 지탄받던 씹덕빌런들은 대부분 2000년대 후반부터 양산되기 시작한 캐릭터들의 이미지를 끌어오곤 했어. 소아온의 키리토를 필두로 하는 쿨하고, 고독하고, 자기 혼자 고뇌하는 타입의 캐릭터 말이지.

이런 캐릭터의 이미지를 차용한 pl들이 턀판에서 빌런취급받았던 이유는 바로 이런 이미지가 trpg 특유의 정서랑은 극단적으로 안 맞았기 때문이야.

trpg는 기본적으로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것을 재미로 삼는 컨텐츠인데, 혼자서 완결된 서사를 갖고 있는 독고다이형 캐릭터와는 이런 재미를 느끼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거든.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인 로시는 달랐어. 자기만의 이야기에 파묻혀서 허우적거리는 대신 옆에 있는 다른 캐릭터와 소통하는 길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어. trpg 본연의 재미를 찾아낸거지.

만약 로시가 대뜸 마부를 찔러죽이고 혼자 길을 떠났다면 세션이 재미있었을까? 만약 로시가 블랑카를 죽이거나, 곰과 싸울 때 블랑카를 내버려두고 도망쳤다면 세션이 재미있었을까? 만약 로시 pl이 gm 말을 듣는둥 마는둥 하면서 자기 의견만 밀어붙였다면 세션이 재미있었을까? 아니지.

그런고로 의도했든 안 했든간에, 남과 소통하려는 자세를 유지했다는 점이야말로 로시가 다른 빌런들과 차별화되는 가장 큰 요소야.


2. 추억 자극

앞에서 예로 든 2000년대 후반 이후의 캐릭터들은 기본적으로 90년대~00년대 캐릭터들의 캐릭터성이 진부한 클리셰로 취급받기 시작하던 때에 대두되었어.

이 90년대 캐릭터들이 갖는 특징을 요약하자면 남캐는 열혈, 여캐는 말괄량이 정도로 볼 수 있지.

로시는 말괄량이라는 단어로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캐릭터야. 주둥아리는 걸걸하고, 예절은 밥말아쳐먹은데다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중무장한 캐릭터지만, 한편으로는 넘쳐나는 긍정 파워로 보스를 설득해서 아군으로 만드는 모습도 보여주지.

이런 캐릭터는 요즘에는 정말 보기 드문데, 소위 말하는 쿨시크 계열 캐릭터들에게 완전히 질려 있던 턀붕이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느낌이었을 거야. 거기다가 90년대 추억보정까지 받아먹었으니, 그시절 감성을 기억하고 있는 턀붕이들한테는 아이돌 취급 받을 만 하지.


3.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로시의 PL은 이번 세션이 있기 전까지는 굉장히 빌런스러운 행동패턴을 보이고 있었어. 턀붕이들이랑 서로 말꼬리 잡으면서 싸우질 않나, trpg랑은 전혀 안 맞는 역극 코드를 내밀질 않나, 갤에서 주구장창 어그로 끌고 패드립치다가 차단만 두번인가 쳐먹었지.

그런데 이런 분위기가 반전된건 지금 갤에서 갓마스터호 회자되는 생불GM과 만나면서부터야. 이 GM 이전에 만난 다른 턀붕이와의 대화에서는 키배 한번에 애미도 애비도 팔아먹을 원숭이 새끼 같았다면, 생불GM과의 대화로그에서는 삼장법사 만난 손오공만큼이나 유한 모습을 보여줬거든.

그러니까 이제 턀붕이들이 의구심이 드는거야. 이 빌런놈이 생불GM 앞에서는 말 듣는 시늉을 하네? 과연 세션 들어가고 나서는 어떨까? 하고 궁금해져. 물론 턀붕이들의 대다수가 로시 PL이 플을 터트릴 거라고 믿었지. 그 쉽디쉬운 던월 캐릭터시트 만드는 데에만 1시간을 잡아먹었고, 그마저도 마스터가 일방적으로 떠먹여주는 걸 겨우 삼킨 것에 불과했어.

하지만 결국 세션은 성공적으로 종료됐어. 바닥까지 떨어져 있던 PC와 PL의 이미지는 위의 1번, 2번 항목에서 서술한 요소들로 인해 떡상했지. 금방이라도 실패할 것 같았던 상황에서 이런 기적을 이루어낸 걸 보고 감동먹은 턀붕이들이 꽤 있을 거야.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미 기대치가 떨어질대로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기대치를 훨씬 초과하는 성과를 낸 거라고 할 수 있겠네.


4. 마치며

이제 남은 불안요소라면 다른 GM, 다른 PL들과 함께 플레이하면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느냐 라는 거겠지. 성향이 잘 맞는 사람끼리만 만난다면 나쁘지 않은 플레이를 보여줄 수 있겠지만, 이 턀판에서 성향 맞는 사람들끼리만 만난다는게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

이미 로시는 턀갤 내에서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져버린 만큼, 분명 앞으로는 로시 PL을 공격함으로써 어그로를 끌려는 분탕도 늘어날 거야. 당장 이번 세션에서도 중간에 다이스빌런이 난입하는 바람에 세션이 한번 중단될 뻔 했지.

앞으로 로시 PL은 이런 어그로에 대한 내성을 많이 키워야 할 거야. 여태까지 갤에서 불탄 것 때문에 이미 타기 쉬운 성격이라는 건 다 까발려졌거든.

이번 로시 세션은 정말 천운의 조화 때문에 일어날 수 있던 기적이었어. 다음 세션부터는 기대치를 낮춘 다음 목표를 초과달성하는 수법을 사용할 수 없을 테고, 90년대 말괄량이 컨셉도 계속해서 쓰다 보면 질리게 될 거야. 그런 상황에서 다시 갤에 불이라도 지르는 날에는 다시 빌런으로 돌아가리라는 건 명확하지.

하지만 지금 개인적으로 로시 PL에게 기대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어. 바로 소통하려는 의지야. 그 성장과정에 생불GM이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기실 이 모든 성장은 PL이 도중에 아몰랑 치고 빤쓰런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싶어. 소통을 통해 성장하는 모습을 이미 보여줬으니, 앞으로 꾸준히 성장한다면 분명 좋은 PL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로시 PL아. 이거 보고 있다면 힘내라. 어그로에 불타지 말고, 턀붕이들이 선의로 내미는 조언은 새겨듣고. 지금 새벽감성에 쓸데없이 길게 쓰긴 했는데 아무튼 틀린 말은 안 했다잉.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