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담배 피우고, 곰은 마늘 먹고, 영웅왕은 천사들을 지휘해서 하늘에 별을 배치하던 그 시절보다 더 태고적인... 나 학교 다니던 시절 이야기다. 그때 동아리 후배 중에 DnD 파던 놈이 하나 있었거든. 물론 나는 언제나 DnD는 열등한 룰이라고 여겨왔기에, 자주 '겁스해 겁스' 라고 이놈을 괴롭혔지만, 여하간 이놈은 나름대로 재미있게 턀생을 즐기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동아리가 MT를 가기로 했을 때, 이 놈이 가서 댄디 한 판 돌려보자고 하더라. 뭐 좋다고 했지.(난 귀찮아서 내가 마스터링 할 때 댄디 같은건 절대 안 하거든) 간만에 제대로 댄디 해 보겠다 싶어서 기대도 했어. 동아리 자체가 꽤 덕기 강한 동아리라서, 대부분 RPG에 대해 어느 정도 이상 알고 있기도 했고. 이놈도 참가 확실한 밤샘 5인플 돌리게 되니까 기대가 됐는지 준비 되게 열심히 한 눈치였고.


그런데 엠티날 저녁, 플레이가 시작되자 마자 나하고 같은학번 한 마리가 '상점 주인 공격'을 시전하더라. 왜 그러냐고 해도, 그러지 말라고 해도, 마스터 말고 다른 사람들까지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뜯어 말려도, 꿋꿋하게 상점 주인을 공격하겠다고 우기는 거야. 결국 마스터 보던 놈이 할 수 없이 상점 주인을 죽이게 해 줬지. 그러고 나니까 물건을 훔쳐요! 가게에 불질러요! 지나가던 행인을 공격해요! 를 한 없이 반복하더라고. 다들 빡쳐서 너 지금 왜 그러냐고 하니까 TRPG니까 무한한 자유도 아니냐고 지 혼자 낄낄거리더라고.



이 짓으로 거의 2시간 반을 날려먹고 나니까, 결국 마스터 보던 후배새끼가 빡쳐서 주사위 던지고 나갔어. 그래서 나도 걔 따라 나가서 둘이 같이 술 먹었지. 근데 술먹는데 애 표정이 거의 울 것 같더라. 하긴, 2주 가까이 틈틈히 시간 날 때 마다 플레이 준비하던데 그게 한방에 날아가 버렸으니 울고 싶을 만 하긴 하지.


근데 이 사건에서 제일 슬펐던 건, 플 깨먹은 트롤이 아예 이런 놀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생초짜도 아니었던 거거든. 그새끼 턀은 안해도 보드게임은 하거든. 그새끼가 보드게임판에서 무개념하고 무례한 놈들이 어쩌구저쩌구 하는 이야기를 한 두번 한 게 아냐. 근데 보드게임은 소중하지만 턀은 안 소중해서 판 깨먹고도 재미있다고 낄낄거린다 이거지.


그때 깨달았다. 역시 덕후의 적은 덕후라는 걸. 차라리 이 쪽 놀이를 거의 안해본 애들은 잘하건 잘 못하건 재미없다고 나가건 저런 식으로 의도적으로 트롤링을 하진 않거든. 정확히 말하면 마스터 제대로 엿먹이는 트롤링을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는지 모르는 게 아닌가 싶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