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TRPG를 하던 때의 이야기야. 지금은 술을 하도 먹어서 통제 불가능한 파오후지만, 갓 제대했을 때는 파오후가 아니었어.

당시 나는 시간은 많고 RPG에 대한 욕망은 가득했기 때문에 닥치는대로 팀을 구하고 있었어. 마침 내가 사는 동네 근처에서 구인 하는 글을 발견했고 운 좋게 들어갈 수 있었지. 사용하던 룰은 댄디.

팀 구성은 대충 이랬어. 대학생 파오후 마스터, 취준생 팔라딘, 아저씨 위저드, 그리고 그 문제의 파이터 누나. 그 사람은 솔직히 예쁘진 않았지만 인간 자체가 멋진 사람이었어. 키도 크고 센스도 좋았지. 평소엔 대충 후드티를 입고 왔지만 가끔 일이 있어서 꾸미고 올땐 깜짝 놀랄 정도였지.

세계관은 평범하게 포렐이었어. 마스터는 굉장히 솜씨가 좋은 사람이었고 항상 생글거리는 타입이었어. 팔라딘은 언변이 굉장했어. 성격도 자상한 편이었고. 문제는 이 양반이 절대로 말싸움만 시작되면 갑자기 똥고집이 되선 지려고 하질 않는다는거야. 특히 종교 관련으로 성향이나 룰을 해석할 때 그게 심각했어. 왜냐하면 파이터 누나가 질서 선 캐릭터를 하고 있었던데다, 모태신앙이라서, 또 포렐 덕후라서 종교에 관한 부분은 말 할 부분이 많았거든. 그 날 싸운 주제는 '쵸즌'을 어떻게 해석할거냐 하는 거였어. 둘이서 설전을 시작하면 소심한 위저드 아저씨는 입을 다물었고, 그 사람 좋은 마스터가 그때만큼은 신경질적으로 휴식을 선언하곤 했어.

공교롭게도 팀에서 그 누나랑 나만 담배를 피웠어. 솔직히 첫 두어번 플레이때는 나도 껄끄럽고 해서 그 누나를 피해서 담배를 피웠어. 그런데 이번엔 어떻게 알았는지, 나보고 담배피러 나가자고 먼저 말하더라고. 따라나갔지. 그런데 자기가 불러놓곤 아무말도 안하고 담배만 태우더라고. 후덥지근한 여름날, 허름한 건물의 화재계단에 나란히 서서 말야.

반쯤 태운 나는, 순간 실수라는 직감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어 말했어.

"맨날 싸우시네요."

누나를 힐끗 봤지. 표정이 안 좋더라고. 난 그 순간 아차 했어. 그 누나는 한 마디도 답하지 않았고, 나는 후회하며 시선을 내리깔았지. 그렇지만 돌아온 답변은 뜻밖이었어.

"그러게요. 이렇게 싸워서 뭐 얻을게 있다고. 게임일 뿐인데."
"저는 파이터씨나 팔라딘씨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건 아녜요. 싸우는게 무의미한 짓은 아니죠. 그렇지만 마스터가 매번 이렇게 소리질러서 마무리하도록 싸우는 건 문제라고 봐요."

실제 대화는 좀 더 어수선했고 길었지만, 대충 이런 느낌으로 이야기가 오갔어.

"누군 좋아서 싸우나. 상대방이 협조를 안해주니 그러죠." 그 누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어.
"마스터랑 이야기 해봤어요?"
"마스터는 개입을 잘 안하려고 하잖아요. 안 봤어요, 아까?"
"좀 의외긴 했어요. 그래도 이게 문제라는 건 마스터씨도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내가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을 즈음에, 갑자기 파이터 누나의 표정이 안좋아지는게 느껴지더라. 군대를 갓 제대해서 그런가, 눈치를 보는 촉이 한참 살아있었거든. 나는 담배만 마저 피우고, 먼저 들어갔어.

그 날은 이런식으로 꼬였지만, 그 뒤로 누나랑 나는 빠르게 친해졌어. 카톡도 자주 했지. 주로 나누는 이야기는, 돌이켜보면 굉장히 이상하지만, 정치 이야기였어. 더 정확히는 정치 관련 개그짤 있잖아. 레딧에서 모은 짤 같은걸 생각 없이 보냈는데 반응이 좋아서 이야기가 저렇게 발전해나갔어. 그리고 (별로 매너 있는 행동은 아니지만) 플레이에 대한 이야기도 둘이서 나누었지.

그리고 그 쯤 내 캐릭터성도 완성이 됐어. 나는 20대 중후반의, 인간 로그를 했어. 내가 그 불편한 분위기를 풀고 인정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드립을 친 결과 내 캐릭터는 개그 캐릭터가 되어있었지. 술, 낭만, 로맨스를 항상 외치는 그런 바보 있잖아. 하지만 팀원들의 드립력이, 특히 위저드 아저씨의 드립력이 대단해서 게임 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어. 분위기도 많이 밝아졌고 나는 개그를 칠때만 하던 '대사연기'에 맛들려서 점점 대사 연기를 많이 하기 시작했지. 팔라딘이랑 파이터 누나는 계속 싸웠지만 내가 그때마다 개드립을 쳐가며 말렸어. 그리고 파이터 누나랑 담배를 피우며 달랬지. 의외로 성공적으로 싸움이 멎곤 했는데, 어차피 본인들도 허무한 싸움이라는걸 알아서 그랬던 것 같아.

내가 2달쯤 플레이를 할 때, 내가 참여하게 된 시나리오를 클리어했어. 클리어 과정은 정말 피튀겼어. 우리가 전투를 계속 npc 세력에게 떠넘겨버리는 식으로 클리어해서 아이템 수준이 좀 낮았거든. 목격 정보도 부족했고. 거기에다 그날 따라 파이터랑 팔라딘이 세 번이나 싸워서 마스터도 신경이 곤두설대로 곤두서선, '처신 잘 하라'고 차갑게 쏘아붙이기도 했던 날이었어. 그렇지만 주사위가 잘 나왔고, 위저드 아저씨가 그날따라 활발하게 활약해줘서 최고의 해피엔딩을 맞았어. 기분 좋았지.

후담 시간에 마스터가 편의점에 가서 평소랑 달리 맥주를 사왔어. 그 팀은 뒤풀이도 잘 안하고, 후담 시간에 술을 마신 적도 없었거든. 그런데 마스터도 어지간히 지치고 들떴나봐. 연회라는 설정으로 맥주를 홀짝이면서 에필로그와 피드백을 하던 중에, 나는 내가 연기 가능한 수준 내에서 가장 느끼한 대사를 파이터에게 쳤지(PL 말고 PC에게).

대충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 수준의 개드립이었어. 입에는 아이스크림 막대를 장미처럼 물고. 제대로 빵 터진 파이터는 한참을 웃다가, 사악 날 올려다보더라. 그 눈. 그 묘한 눈. 잠시 굳어버린 나의 입가에서 아이스크림 막대를 가져가더니, 테이블에 놓곤 대사연기를 하더라.

"좋아. 이번 한번만이야, 로그."

그리곤 자연스럽게 침대로 가게 되었지. 게임 내에서 말야. 그리곤 그렇게 플레이 내에서 두 캐릭터는 연인이 되었어.

그 뒤로 약간 텍섹과 개드립을 섞어서 하기 시작했지. '내가 그녀를 만났을때' 라는 드라마에서 바니랑 로빈이 치는 느낌의 개그들이었어. 담배를 피울때나 카톡을 할때 주요 대화 주제 중 하나였지. 꽤 재밌었어. 그런데 그 이후로 팔라딘의 신경질이 더 심해졌어. 그리고 내가 팀에 갓 들어왔을 때 언쟁했던 주제인 '쵸즌의 해석 문제'를 또 꺼내들더라고. 그날 따라 팔라딘의 신경질이 너무 심해서, 나는 '해석을 할거면 원전을 기반으로 해야지, 왜 단어사전의 정의를 가져오냐'고 소리를 질렀어. 팔라딘은 날 한참 바라보더니 나가버렸어.

마스터는 팔라딘을 잡으려다가, 무시하고 가버리니 "미친새끼!" 하고 욕을 하더라. 그러곤 마스터가 날 달래더라고. 원래 저런 녀석 아닌거 알잖냐고. 나는 솔직히' 원래 저런 녀석'이라고 생각했지만 고개를 끄덕였어. 그리곤 마스터가 게임 중단을 선언하고 자긴 팔라딘을 달래보러 간다고 하더라.

남은 우린 근처 술집에 갔어. 위저드 아저씨는 하필이면 그날 차를 가져와서 술을 못마신다며 깍두기로 한시간 정도 앉아 있다가 가버렸고, 난 그 누나랑 단 둘이 남았어. 시간은 겨우 여덟시 밖에 되지 않았고. 그날따라 많이 마셨던 나는 그 누나랑 팔라딘이 이해가 안된다는 이야기를 했어. 그러다가 누나가 요새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그 누나의 자취방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겼지.

뻔한 상황, 뻔한 명분. 나오는 말도 뻔하기 짝히 없는 돌려말하기의 연속이었지만 둘 다 자취방으로 가면 어떻게 될줄 잘 알았어. 취기와 열기로 둔해진 머릿속은 어떻게 해야 '남자답게' 보일지 필사적으로 고뇌하고 있었지. 자취방에 들어가자 마자 누나는 샤워를 하러 들어갔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홀로 고뇌하는데 전화가 왔지. 마스터에게서 온 거였어. 마스터는 지금 어디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그 누나와 둘이서 술먹고 있던 중이라고 답했어. 수화기 너머에서 깊은 한숨소리가 들리더라. 그리곤 목소리를 깔고 깊은 피곤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어.

"그거 팔라딘한테 말하지 말아요."
"왜요?"
"파이터 누나랑 팔라딘이랑 둘이 헤어진지 얼마 안됐어요."

난 그 순간 할 말을 잃었어. 왜 그렇게 이해 불가능한 싸움을 하는지 그제서야 깨달은거지. 그리고 지금 내가, 그리고 파이터 누나가 팔라딘에게 정말 몹쓸짓을 하고 있다는걸 깨달았어. 나는 말 없이 담배를 태웠지. 갑자기 술이 확 깼어.

샤워를 마치고 온 누나는 내가 방 안에서 담배를 피운다며 뭐라고 잔소리를 했지. 나는 그 누나를 노려보며 말했어.

"쵸즌 해석 말예요."
"그게 왜?" 누나는 자연스럽게 반말을 했어.

"영어로 하면 쵸즌은 Chosen 이잖아요. 그리고 이건 언어별로 다르게 읽을 수 있어요. 쵸즌, 샤센, 슈슨... 즉 이건."

난 잠시 뜸을 들였어.

"죠센... 다시 말해 조선을 뜻하는 게 아니었을까요? 즉, 이스라엘 민족을 모세가 'Chosen People' 이라 하였을때 그것은."

"조선 인민을 뜻하는구나."

누나가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맞아요. 모세의 연대, B.C. 1280년경에 이미 조선 의 인민들은 존재했다는 뜻이죠. 조선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것 보다 훨씬 길었다는 뜻이 돼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