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전이란 것이 단순히 온갖 상황에서의 사법 방식을 잡다하게 적어놓은 것이 아니라, 그 조항들의 총합을 통해 그 사회가 목표로 하는 사회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룰북도 줄줄줄 써놓은 글 자체가 중요한게 아니라, 문자를 매개로 해서 실체 없는 알피지 시스템을 독자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룰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알피지 시스템(=룰)에 대한 구상이 룰북 작성보다 먼저 끝난다. 전체 시스템이 구상도 안 됐는데 룰북부터 끄적끄적 쓰고 있는 경우(보통 특이한 주사위 판정법부터 쓰고 자빠졌음)도 자작룰 업계에선 흔하지만, 그런 케이스들은 애초부터 가망 없이 잘못된 거니까 제외하고 이야기하자.

빈센트 베이커나 존 하퍼 같은 훌륭하고 경험 많은 룰 제작자들도 아직 가독성 좋은 룰북으로 완성되지 않은, 그러나 구상은 이미 거의 끝난 알피지 시스템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베타 테스트 내지는 플레이테스트는 보통 이 단계에서 이뤄지는데, 그래서 플레이테스트를 위해 배포되는 임시 룰북을 보면 제작자 입장에선 이미 완성된 시스템이지만 그 문서를 처음 보는 문외한 입장에선 앞뒤로 몇 번을 읽어도 알피지로 돌리기에 정보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다. 비어있는 부분들은 제작자 입장에선 당연하다고, 상식이라고 여겨서 굳이 적지 않은 것들인 것 같은데, 읽는 사람에 따라선 당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자작룰은 이 단계 언저리에서 공개되고, 개인적으로 많은 경우는 이 단계까지 오지도 않은 채로 (제작자의 맘속에서조차 완성되지 않은 채로) 공개하는 것 같다. 이런 문서를 보고 시스템을 이해해 게임을 돌려보라는 것은 아직 글로 쓰지 않은 제작자의 마음을 읽거나, 아직 제작자조차 미처 떠올리지 않은 미지의 영역을 예지해 채워넣으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한줄요약) 자작룰은 대부분 플레이 불가능한 상태로 배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