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trpg&no=14092 에서 썰 푼 거 보충 정리.

개인적으로 크툴루 신화물과 CoC에 대해서 가진 생각 설명. CoC 6판 사서 현실 지인들과 깔짝거려 본 경험담이 어느 정도 들어가 있음.


크툴루 신화의 기본적인 틀

크툴루 신화물의 기본적인 개념은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한계"를 인간 눈 앞에 던져놓고, 인간이 나름대로 거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처하지만 결국 대부분 "쉽게는 안 되더라"....는 거임. 쉽게 말해서 답이 없거나, 내놓는 답은 미봉책에 그침. 그나마 뒤에 뭔가 우주적 존재가 없다면 인간 선에서 정리가 가능할 때도 있음. 따라서 주인공이 악의 세력을 저지했다고 해도 그것은 장기적으로, 우주적으로 본다면 단지 잠깐의 시간을 버는 것에 지나지 않음. 사실상 작가 오너캐인 랜돌프 카터도 그 전까지는 거의 다 어찌어찌 해결했지만 결국 리얼 갑인 니알랏토텝과 대면하고는 아자토스행 편도 티켓 끊겨서 관광당할 뻔한 걸 비슷한 신적 존재의 개입으로 구조받은 수준인데 그보다 더 약한 양민들이야 뻔하지. 거기다가 주인공들은 대개 일시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도 그런 상태를 유지할만한 힘같은 걸 갖고 있지도 않아서 결국 미쳐서 자살하거나 그러는 거임. 그러다보니 분위기 자체가 비교적 어두침침하게 돌아감. 거기다가 깊게 파고들다 보면 우주적 관점에서 봤을 때 인류는 가로수 밑을 기어가는 개미와 같은 존재고 바꿔 말해서 어떤 우주적인 놈이 애들이 개미를 돋보기로 불태워 죽이거나 밟아죽이는 식으로 인류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까지 깨닫게 됨. 근데 RPG라고 해서, 그냥 모험같은 걸 생각하고 굴러들어온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우중충한데다 뭔가 크게 한 건 해 보기도 애매하기 짝이 없는 이 분위기에 제대로 적응을 못한다 이거지. 적어도 세계의 멸망에 맞서는 oWoD의 댕댕이들은 대판 싸워라도 보지만 여기는 전투는 커녕 "싸움"도 제대로 성립 안 되는 수준으로 이미 격차가 벌어진 적들이 허다하거든.  


전투

CoC는"전투를 피해라"라고 하는데, 그렇게 나오는 이유는 플레이어들이 적에게 대응하는 기본 수단은 대개 "전투"인데 크툴루 신화 세계관에서 인류는 한계를 쉽사리 넘지 못하고 이것저것 문제에 처하는 약캐릭터의 위치(예 : 처음 주문을 시전해서 소환한 신화생물을 보고 이성이 까임)이기 때문에 대개 전투 결과가 별로 좋은 의미는 아니기 때문임. 물론 반대로 키퍼가 너무 노답스럽게 밀고 가면 다들 반응이 시원찮으니까 좀 만만해보이는 떡밥도 던져줘야 함. 그런 대표적인 예가 퀵스타터 시나리오로, 코빗이 쓸 수 있는 주문 중에는 "차원을 휘청거리는 자(Dimensional Shambler) 소환 / 예속"이 있음. 아마 정상적으로 퀵스타터를 진행했다면 저게 나오는 걸 못 봤을 주문일 거임. 왜냐면 대놓고 "여기(퀵스타터)서는 쓰지 마라"라고 하고 룰 자체를 풀버전에만 실었거든. 그러면 저게 대체 뭘 소환하길래 "퀵스타터에서는 꺼내지 말라"는 경고가 붙냐... 저놈 스탯은 아마 총 몇 대 쏘면 어찌어찌 잡을 수 있을 잡몹이고, 어느 정도 짬되는 사교도 / 마법사라면 불러내서 일시적으로 예속할 수도 있음. 문제는 이놈이 설정상 이차원의 생물로, 혼자 차원을 드나드는 걸로 모자라서 이쪽의 물건이나 사람을 이차원으로 끌고들어갈 수 있다는 것임. 당연히 끌려가면 행방불명(사실상 사망).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저놈에게 근접전 허용 -> 잡기 -> 이차원에 끌려감 -> 그냥 끝임. 그러니까 코빗이 풀버전 룰북의 힘을 빌려서 저거 한 마리 정도 풀어놓고 제물용으로 일행에 추가해 놓은 NPC를 제거한다거나 용감하게 방에 먼저 진입한 조사자를 잡고 사라지는 전개를 내면 처음 하는 사람들 입장 - 특히 제대로 된 총이 별로 없는 파티 - 에서는 상황이 개판이 되므로 퀵스타터에서는 저놈이 나올 일이 없게 만들어버림. 그렇게 코빗은 희생된거다... 신참을 끌어들이기 위한 그 희생...


또한 반대로 생각하자면 저 동네에서는 즉사판정 잡기를 갖고 돌아다니는 놈도 잡몹이기 때문에 애시당초 총기류 같은 거 없이는 웬만한 신화생물 상대로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 없고, 그런 게 기본적인 크툴루 신화물 - 러브크래프트의 작품들의 분위기임. 한계에 직면하는 경우, 그에 맞서 뛰어넘는 게 아니라 발악하다가 무너지거나, 어찌어찌 버티면서 수습하거나, 혹은 의외로 약점을 찔렀더니 이겼더라 같은 상황이 나오고, 그런 상황에서의 주도권은 인간이 아니라 대개 적들이 쥔다 이거지. 대표적으로 던위치 호러에서도 이븐 가지의 분말에 대해 알아내기 전까지는 요그 소토스의 자식놈을 쓰러뜨릴 방도가 딱히 없었음. 그런 면에서 본다면 "라이더 킥"같은 걸로 통하던 마샬 아츠가 까이던 것도 그게 "지나치게" 강력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조건부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단"이 됐기 때문에 더 까였다고 생각함. 사실 CoC는 구판 룰북 예제 시나리오부터 "물리 피해 면역" 판정 단 몹이 나오던 동네라서 키퍼가 마음먹고 그런 거 뒹굴거리게 하면 라이더 킥이고 뭐고 답이 없는 전개가 가능함.... 따라서 전투 부분은 키퍼가 얼마나 수요를 잘 맞춰주냐 / 무시하냐에 달려있음. 예를 들어서 다른 예제 시나리오 같은 경우 그냥 신화적 요소는 "시체를 일으키는 수단"으로만 한정되고 사실상 전투 자체는 좀비나 사람하고만 싸우다 끝나기 때문에 원하면 총같은 거 쏘면서 어느 정도 "무쌍"까진 아니어도 갱단이나 좀비들에 맞서는 모험활극 전개로 만들 수도 있었음. 그런 식으로 가급적 전투 밸런스는 인간 < 신화생물의 구도이기 때문에 웬만해선 피하는 게 좋지만, 적당히 해 볼만한 상대를 대상으로는 인간이 화기빨로 찍어눌러도 된다 이거지. 인간이 좀비를 쏴서 벌집으로 만드는 걸 보고 "나의 좀비는 그렇지 않다능!"라고 불평할 사람 있나?  세계대전 Z 작가 빼고.


기타 제약

또한 크툴루 신화물이 가지는 또 다른 특징은 거의 대부분 "존재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잡고 그에 대한 세부적인 구현 - 적어도 그 시대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 을 모토로 삼는다는 것임. 개인적으로는 이 문제를 "전투"보다 더 크게 겪은 편이었음. 애시당초 주요 시간대부터가 1920년대 배경이잖아? 그러니까 그 시대를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느냐...도 TRPG의 진행에 영향을 준다고 봄. 예를 들어서 "랜돌프 카터의 진술"에서 랜돌프 카터는 고분 속에 깊이 들어간 친구하고 바깥에서 대화를 하지만, 그것도 사실 핸드폰 같은 게 있던 시대가 아니니까 친구가 고분 속에 유선 통신기와 전선을 메고 들어간 거임. 그런 식으로 배경 시대에 맞는 전개와 상황을 만들어내고, 큰 틀에서 그것을 따라갈 것을 요구함. 다른 세계관에서는 대개 그런 게 싫은 사람들을 위해서 다빈치라든가 테슬라라든가 뭐 그런 당대 천재들을 갈아넣어서 시대를 앞선 발명품을 쓸 수 있게 해 주지만 크툴루 신화물은 대체로 그리 관대하지 않음. 기본적으로 뭣도 모르는 일반인이 안드로메다행 관광열차를 타는 전개를 지향하는 동네니까.


물른 당연히 이런 시공간적인 제약도 다른 RPG나 서브컬쳐물을 생각하던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 불만이 될 수 있음. 예를 들어서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고 치면, 유색 인종은 차별당하고 1920년에 금주령이 나왔으니 웬만해선 술도 못 마심... 그런 식으로 지금의 플레이어가 원하는 전개가 이루어지지 않거나 아예 불가능할 수 있기 때문임. 반대로 어느 정도 시대상의 제약이 걸리는 플레이를 하는데 별로 부담이 없는 사람이라면 딱히 상관없겠지만, 그것도 다 그런 건 아니니까 어느 정도 그 부분에 대해서 이해를 시키지 못하면 문제를 겪음. 그러니까 그런 게 귀찮으면 그냥 모두 서로 납득이 어느 정도 되는 상황이 나오는 현대 시점으로 진행을 하면 됩니다 ^^ 그럼 대응책으로, 마법은 어떠냐고 할 텐데, 딱히 키퍼가 날로 먹으라고 "전에 누가 연구하던 노트"같은 거 속성으로 던져주는 게 아니면 쉽게 마법 배우는 건 사실상 무리고... 기본적으로 배우는 데 몇 주씩 걸렸다고 보면 됨. 당연히 이러니 그런 걸 감수할 생각이 없는 사람하고는 하기 껄끄러운 전개가 될 수 밖에 없음. 거기다 추가적으로 구판에서는 크툴루 신화 스킬은 닥치고 0부터 시작이니까 플레이어가 크툴루 신화의 배경지식이 얼마든 간에 조사원 / 탐사자... 하여간 캐릭터는 "몰라 뭐야 저거 무서워"할 수 밖에 없는 - 바꿔 말해서 직접적으로 그걸 써먹기가 불편한 구조라는 거임. 결국 이것저것 노력해봐야 현실의 벽에 가로막힌다 이거지.


그러니까 결국 어느 정도 밑바탕 작업인 "조사"를 해야하는데 이것저것 스킬 중에서도 여기 쓸만한 스킬은 한정되어 있고, 거기다 이 RPG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전혀 모르던 사람이라면 대개 전투나 은신 등 좀더 RPG스러운 쪽에 영향을 주는 스킬을 찍지 굳이 도서관 이용이나 라틴어 지식 같은 걸 찍진 않는 편이더라고... 알아도 배경이 되는 곳에 도서관 같이 서적형 자료를 수집할 곳이 없다거나 고서가 다 한문으로 된 거더라 하면 말짱 도루묵이 될 수 있고. 그러니 이것도 나름대로 문제가 발생함.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라이더킥 날리려고 만든 캐릭터가 상황이 돌아가다보니 딱히 좋은 스킬이 없어서 반쯤 짐짝... 아니 짐꾼이 되는 거잖아? 그런 면에서 키퍼가 장단을 맞춰주지 않는 이상 불만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구조임.


괴리감

그리고 "씹덕은 거른다"로 이런 것들이 귀결되는 이유는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주인공에게 한계를 넘을 수 있는 밑천을 주고 시작하거나 도중에 "기연"으로 줘버리는 다수의 서브컬쳐물과는 맞지 않는다는 거임. 이 동네엔 그런 거 없고 적이 비교적 약해서 당대 무기로 제압가능한 수준이 아니면 조낸 털리다가 약점같은 거 나와서 어찌어찌 이기던가, 아니면 어느 정도 상황에서 진행을 멈추고 묻어버리던가 뭐 그렇게 "찝찝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함. 쉽게 말해서 다수의 서브컬쳐물에서는 주인공이 어느 정도 갑 쪽에 설 기회가 있다면 크툴루 신화 세계관에서는 주인공이 거의 무조건 을이라는 거임. 그러니 당연히 다수의 서브컬쳐물의 영향을 받고 "직접적으로는" 크툴루 신화 세계관을 처음 접하는 입장에서는 불만일 수 밖에 없지.


특히 사실상 RPG 리플레이의 탈을 쓴 소설인 윳툴루 같은 건 그런 편견을 뻥튀기시키는 요소라고 봄. 사실상 온갖 수단으로 상황을 극대화해놓은 그런 거 보고 현실을 접하면 "윳툴루에서는 이렇지 않았는데"가 된다 이거임. 마치 가짜사나이나 태양의 후예를 보고 "대한민국 군대는 다 이렇구나"라고 믿다가 정작 내가 입대해보니 현실은 그게 아닌 것 처럼 말이지. 이거는 키퍼가 어느 정도 조절해 줘야 할 문제긴 한데, 플레이어 측에서도 나름대로 타협을 해야한다고 봄. 아예 그렇다고 타협을 안 할 수 없는 건 아니야. 다만 이게 어느 정도 진행이 된 시점에서 타협하기엔 대체로 많이 늦더라고... 그게 귀찮으면 아예 합의를 처음에 보고, 실패하면 그냥 안 받는 것도 나름의 방책이 될 수 있겠고. 개인적으로는 현재 시점으로 플레이하는 게 그나마 이것저것 부담이 적은 편이긴 했음. 일단 사회상이나 그런 건 모두 다 아는 거니까 어느 정도 공감을 얻을 수 있었고, 반대로 온갖 오덕스러운 요소는 "지금 실제로 님이 그럴 수 있겠음? ^^" 라고 현실적으로 가능하냐 아니냐는 제약으로 비교적 쉽게 커트할 수 있었으니까.


3줄 요약

크툴루 신화물의 분위기는 대체로 플레이어가 당하는 쪽에 가깝고 "실재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다보니 시대상의 제약도 여러모로 귀찮다.

요새 서브컬쳐물은 대개 그런 건 귀찮으니 국끓여먹고 대체역사라든가 가상의 세계관 등을 쓰는데다 주인공 측에 보너스를 잘 준다.

따라서 서브컬쳐를 보고 온 뒤 둘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적응하지 못한 사람은 대개 "폭탄이 적잖아! 나 크툴루 그만둘래!"같이 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