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간단한 coc 단편을 해봤다. 그날 이후 coc에 관심이 생겨서 새벽 탈갤에 coc 하고 싶다고 징징거렸다. 타이만이나 풋풋한 모험 이야기는 싫다. 오직 공포를 위한 세션을 하고 싶다! 라고 글을 썼다. 갑자기 어느 분이 와서 coc 시나리오 링크를 주셨다. 이거 흥미 있냐고. COC 문외한이었던 나는 시나리오를 끝까지 다 읽고 최고라고 외쳤다. 키퍼 열람용 자료까지 읽은 것이다. 그분은 나의 어리석음에 안타까워하시다가 원하는 시날을 골라라고 했다. 누가 울새를 죽였나. 가장 무서울 만한 것으로 선택했다.
이 키퍼의 장점은 캐메때부터 빛을 발했다. 키퍼는 캐릭터의 특성을 스탯에 접목해야 하는걸 지적했다. 그 도움으로 성능충 캐릭터가 아닌 매력적인 PC 로버트가 나올 수 있었다. 마이너 고고학 월간잡지에 자부심 있는 기자. 가난하지만 러시아 골동품 마니아 청년 로버트. 그는 우연히 새장에 든 울새를 얻게 되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라서 피하지만.
이 키퍼의 특징은 오픈월드 식이다. 그 상황이 합리적이라면 내가 무얼 해도 인정해준다. 로버트는 그 세상속에서 마음껏 활개쳤다. 동료의 이름을 마음대로 정하고, 아예 없던 사람을 창조해서 NPC로 만들어 미행하고. 사장님과 전화를 하는것. 모두 시나리오에는 없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즉석에서 이름을 정했을 NPC들은 아주 생동감이 있었다. 너무나 살아있는 캐릭터들에서 마치 던전월드같은 느낌을 받았다. 또 좋은 것은 이 키퍼는 자유를 주는 대신 그에 따른 결과도 똑부러지게 준 점이다. 로버트가 같은 길을 여러번 가서 길을 해매더라도 그건 로버트의 잘못이니까.
처음에는 유쾌했던 이야기가 가면 갈수록 치덕치덕한 덩어리가 달라붙었다. 점차 그 덩어리들은 녹아내려서 이야기를 잠식해나갔다. 키퍼의 생생한 표현과 상황제시는 그 색깔을 더욱 강렬히 표현했다. 끔찍할 정도로 훌륭한 BGM이 그 묘사를 완성했다. 말재주 뛰어나고 농담을 좋아하는 청년은 시간이 지나면서 시니컬해져갔다.
유독 토해내는 RP를 많이 했다. 처음에는 헛구역질에서 나중에 구토를 하기까지. 마지막에는 뱃속에 든 게 없어서 위액만이 입 바깥으로 나왔다.
아마 그건 현실의 나가 역겨움을 느껴서 그런것이다. 세션하면서 속이 메슥거렸고 점차 그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뱃속에 거북한 무언가가 몸을 좀먹는 느낌이었다.
RP에 이토록 감정이입을 한 건 처음이었다.
1:1세션을 한 걸 후회했다. 추리를 할 때 같이 고민할 사람이 없어서 아쉬웠다. 타자가 쉬는 걸 용납하지 못해서 키퍼가 타이핑을 마치자마자 바로 쓸려고 노렸했다. 그러니 바로 생각해야 해서 암호를 풀때 고생했다. 특히 두려운 장소로 갈 때 의지할 사람 하나 없다는 게 이토록 뼈아픈 줄 몰랐다. 어쩌면 그로 인해 더 몰입할 수 있었는지도
다이스가 잘 따라주지 못했다. 당혹스러워 하는 키퍼가 눈에 그려졌다. 나는 다이스 실패로 절대 짜증내지 않는다. 오히려 펌블나올때마다 낄낄 웃는 편이다. 서사룰은 실패도 스토리의 흐름이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감정이입이 세게 들어간 까닭일까. 다이스의 숫자가 끔찍할 때 로버트에게 어떤게 닥쳐올지 두려웠다.
사실 세션 전에는 배드엔딩을 바랬었다. 얼마나 무서운지 보자!라는 치기였다. 마침내 결말.
초반 중요선택지부터 어긋난 로버트는 엔딩을 맞이했다. 세션을 관통하는 진실도 알지 못하고 죽는 엔딩. 로버트는 세션 내내 열심히 발버둥 쳤지만 무기력하게 끔찍한 결말을 맞이했다. 난 얼어붙은체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 엔딩 크레딧이 5초마다 한줄씩 내려왔다. 크레딧이 한 줄씩 내려올 때 마치 쿵 하고 무거운 물체가 떨어지는 게 들렸다. 쿵 쿵 소리가 귀에 계속 울렸고 어서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키퍼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정을 간단히 말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속이 뒤집어지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충분히 지난 후에 찬물로 세수를 하고 베란다에 나가서 바람을 맞았다.
텍플만 하는 이유는 로그가 있어서이다. 명세션을 하고 나면 늘 로그를 여러번 복습했다. 세션 당일날과 다음날에는 두세번씩. 나중에도 심심할때마다 꺼내봤다. 하지만 이번 로그는 읽기가 두렵다. 그때의 공포가 떠오를것 같아서이다.
그럼에도 다시 읽을 것이다. 그게 명세션을 준 키퍼에게 답하는 길이라 생각해서이다.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주신 키퍼님께 감사합니다.
동명의 야겜이 먼저 떠올랐네
진짜 몰입해서 재밌게 했나보네, 부럽다 흑흑
맙소사 정말로 속이 뒤집히시는 거였다니 그럴 줄은 몰랐어요... 정말로 몰입해서 플레이해주신 덕분에 멋진 세션이 완성되었어요! 누울죽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