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20대 초반이었던 8년 전의 일이다.


당시에 나는 지금보다 어렸고, 어리석었다. 그래서 WoD를 하고 싶다는 개병신같은 생각을 했다.


룰북이야 불법 다운로드를 받았지만 주사위를 구하는것이 문제였다.


6면체라면 문구점에서 구할수도 있었을테지만, WoD라 10면체를 대량으로 사야 했는데 지금은 망해버린 당시의 온라인 RPG용품 판매점에서는 D&D용 주사위 세트만 팔고 있었다.


아마존에서 10면체 세트를 구매하면 가능이야 하겠지만 그 배송기간과 배송비를 치뤄가면서 까지 게임을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오랜 구글링 끝에 용산의 주한미군기지에서 주사위를 저가에 판매한다는 썰을 들었다. 아니... 미군 기지에서... 주사위를?


어쨌거나 판매자의 이메일로 메일을 보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영어 실력도 모자랐기 때문에 엉성한 영어로 구매의사를 밝혔던 것 같다.


아마도 2주정도의 긴 시간이 지나서 답장이 왔고 주말에 만나기로 했다. 미군 기지 입구 앞에서 그에게 전화를 하면 판매자가 나와서 나를 데리고 기지 내부로 들어가고 거기서 거래가 이뤄지는 시스템이었다. 일단 가장 당황했던건 미군 소속인 판매자가 호머 심슨같은 체구를 하고 나왔다는 점이다. 미군이... 이런 몸을...???


30대 중반으로 보였던 미군 아재는 뒤뚱거리면서 나를 안내했고 펼쳐진 광경은 굉장히 놀라웠다.


아마도 주말마다 미군내 하비 클럽 행사를 하는 듯 했다. 마치 일일 플레이 행사장처럼 테이블이 잔뜩 펼쳐져 있었고 미군 덕후들끼리 모여 다양한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한쪽 테이블에서는 워해머 40k 플레이가 진행되고 있었다. 워해머를 직접 플레이 해본적은 없지만 설정은 조금 읽어 봤었고 유닛들이 굉장히 커다랬던것으로 봐서 돈을 꽤나 쏟아부은 전투가 진행되는 것 같았다.


또 한쪽에서는 카드겜 매직 플레이가 진행되고 있었다. 멸치처럼 빼빼마른 미군 플레이어가 고블린을 소환하며 '마이 비셔스 고블린~' 이라고 낄낄대던 목소리는 아직도 기억난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는 테이블을 늘어놓고 다양한 취미용품을 팔고 있었다. 내가 연락이 닿은 그 미군은 이 하비클럽을 위해서 다양한 물품을 들여와 판매하는것으로 부수입을 얻는 듯 했다. 아마 워크래프트를 기반으로 한 콜렉터블 카드 게임도 판매했던 것 같고 RPG 출판사에서 내놓은 잡지들도 본 기억이 난다. 덕중지덕은 양덕이라더니.


안 되는 영어로 서둘러서 구매를 마치고 집으로 왔다. 나중에 생각했을때야 내가 돈 낸 것보다 주사위를 더 가져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끔 버스를 타고 그 근처를 지날때마다 아마도 '엘런'이라는 이름이었던 것 같은 그 아재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