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PG는 콩고기다'


누구였는진 모르겠지만, 예전에 갤에서 이런 말 했다가 욕 푸짐하게 쳐먹은 갤럼이 하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걸 처음 봤을 때, 논지 자체는 옳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TRPG 대체재로 ORPG를 찾는 사람들은 있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없으니까. 실제로 나도 그렇게 TRPG에서 ORPG로 넘어온 턀붕이였고.


분명, 처음엔 TRPG 멤버들이 서로 시간을 못 내게 되면서 플 공백기에 들어간 것 때문이었다. 빡세게 달릴때엔 사흘씩 연속으로 모이기도 했었고, 뜸할 때에도 일주일에 한번씩은 세션이 돌아가곤 하던 것이 딱 끊겼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나는 이미 세션중독 상태였고, 일주일에 한번도 세션이 없다는 사실에 공포감 비슷한 무언가를 느낄 때였다. 그래서 흘러흘러 세션을 찾아 들어왔고, 그 최종 도착지는 턀갤이었다.


처음 ORPG에 대한 인상은 좋지 못한 편이었다. 턀갤에 막 들어왔을 때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들이 라그나 총집편, 냉혹한 덥크맨 시리즈, 제우스, 몬테주마, 로구도 같은 것들이었으니까. 그런 걸 본 뉴비의 머릿속에 ORPG란 어디까지나 TRPG 팀원들이 흩어져서 못 모이는 동안에만 즐기는 한 순간의 여흥. 그것도 실패할 가능성이 더럽게 높은 여흥이라는 편견이 박히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첫인상이 좆같긴 했어도, 커뮤니티에 도착했으니까 뉴비는 세션을 찾아야 했다. 가장 먼저 세션을 찾는 뉴비를 반겨주는 이들은 당시 한참 발호하여 던월 만능론을 외치고 있던 던월충들이었다. 유감스럽게도, COC로 TRPG에 입문했던 뉴비에게 댄디나 패파, 던월 같이 중세판타지를 주무대로 하는 룰은 썩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었다. 가능하면 배경은 근대나 현대로, 이능이나 괴물들이 튀어나오는 세션을 원했다. 마침 뉴비는 그런 룰을 몇개 알고 있었다. 인세인, 시노비가미, 더블크로스 등등. 대부분이 씹덕룰이라고 턀갤에서 놀림받는 물건들이었지만, 다행히도 이 뉴비는 씹덕이었기 때문에 그런 방면으로는 이미 면역이었다. 까짓거 좆아온 키리토 같은 캐릭터만 피하면 되지, 라는 마인드였다고나 할까.


암튼 그래서 처음으로 들어간 세션이 더블크로스 세션이었다. 패기롭게도 턀갤 공개구인으로 3달짜리 중편세션을 돌렸던 우리의 GM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어차피 공개구인인거, 끝까지 갈 기대는 접은 상태에서 시작했다. 중간에 수틀리면 언제든지 터트릴 생각이었다.' 라고. 그 고백에 대한 나의 대답은 '역시나' 였다. 예나 지금이나 공개구인은 위험성이 높은 도박이고, 애초에 PL로 구인된 나도 어느정도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PL들이나 GM이나 이미 기대치는 바닥을 찍고 시작한 셈이었다. 돌이켜보면, 꽤나 위험위험한 파티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TRPG에서 갓 ORPG로 넘어온 뉴비의 첫 세션은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우선, TRPG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화려한 배경이 뉴비를 반겨줬다. PC들은 저마다 개성적인 면모를 갖고 있었고, 숙련된 PL들은 어떻게 rp를 해야 자기 캐릭터들의 개성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PL들끼리 메타개그로 시시덕거리다가 개드립 분위기로 빠지기 쉬운 TRPG와는 달리, ORPG에서는 진지해야 할 때 진지해지고,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고, 눈물흘려야 할 때 눈물흘릴 수 있었다. 그 날, 랜선과 모니터라고 하는 가림막이 오히려 몰입과 롤플레잉을 도울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이것들은 가림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가면무도회의 가면과도 같았다. 씀으로써 배우가 배역에 보다 몰입할 수 있게 돕는 장치 말이다.


맨 앞에서 말했던 ORPG=콩고기 설에 대한 인식도 이 때를 기점으로 서서히 변해 갔다. ORPG에는 ORPG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어조와 목소리의 높낮이, 표정 등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 대신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에 보다 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채팅을 치는 데 걸리는 시간 때문에 즉각적인 소통이 어려웠지만, 그 대신 다른 PC나 NPC들과 보다 세심하게 감정선을 탈 수 있었다. 특히 연애묘사 같은 경우, 암만 PC와 PL을 분리하여 생각한다고 해도 눈 앞에 있는 팀원의 얼굴이 신경쓰일 수밖에 없는 TRPG와는 달리, ORPG는 상대적으로 그런 쪽의 묘사가 더 용이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깨닫는 동안, 나는 어느새 ORPG 팀 쪽에 보다 마음이 쏠리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순탄치 않을 때도 있었다. 지나간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해서 얼탈 때도 있었고, 설정상 다른 pc의 원수에 해당하는 보스의 막타를 스틸해먹은 적도 있었으며, 점점 성장해 나가는 캐릭터를 pl의 대가리가 따라가지 못해 rp미스를 터트릴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도량이 넓은 팀원들은 죽창과 질책 대신 자비와 격려로 나를 일으켜 세웠고, 나 또한 그런 깊은 아량에 어떻게든 보답하려는 마인드로 세션에 임했다.


그렇게 3달이 지났고, pc들은 저마다의 구원을 찾았다. 누구는 헤어졌던 친구와 재회했고, 누구는 연인과 함께 일상을 되찾았으며, 누구는 자신을 억압하고 있던 굴레로부터 벗어났다.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이야기는 끝이 났고, 그 날 하루를 위해 한달 전부터 아껴놓고 있던 비장의 커미션이 엔딩 축전으로 롤20 화면에 출력되었다. 그 날, PL이나 GM이나 언제든지 그만둘 생각 만만으로 시작했던 번개구인 팀은 어엿한 정규팀이 되었다.


그때로부터 1년이 흘렀다. 하와와 뉴비쟝은 어느새 롤20 플레이타임 네자릿수를 찍었고, 돌아오는 주에는 여태까지 함께해온 팀원들을 위해 단편 세션 하나를 마스터링할 계획도 잡고 있다. 그 사이에 다른 팀원 하나는 이미 어엿한 마스터가 되어 팀 내에서 단편과 중편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마스터링했고, 마스터는 팀 결성 1주년을 기념해서 최초로 플레이했던 그 중편캠의 시퀄을 만들고 있다.


이 모든 게 턀갤구인이 맺어준 인연이라는 점을 떠올릴 때마다, 새삼 가슴이 웅장해지곤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 날 이후로 나의 1년은 세션으로 충만한 1년이었고, 내 팀원들은 현실 친구 못지 않게 훌륭한 인터넷 친구들이 되었다. 훈련소 간 팀원한테 인편까지 써줄 정도가 되었으니, 어떤 면에서는 몇몇 현실친구들보다도 훌륭한 친구들이 된 걸지도 모른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턀갤의 씹덕구인 인재풀이 훌륭했던 까닭일까? 아니면 내가 기적적인 천운의 소유자였던 것일까? 모를 일이다. 아마 앞으로도 모를 것 같다.


이쯤이면 대충 알겠지만, 이건 자랑글이다. 나는 내가 플레이한 세션에 만족하고 있고, 지금의 내 팀원들에게도 매우 만족하고 있으며, 앞으로 돌아갈 수많은 세션들에 엄청나게 큰 기대를 갖고 있다 라는 것이 논지인 자랑글. 좆도 아닌 걸로 호들갑떤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동시에, 이건 감사의 글이기도 하다. 내 보잘것없는 rp를 좋아해 준 팀원들에게, pl들에게 최고의 뽕맛을 안겨 주는 마스터에게, 그리고 나를 이런 갓GM. 갓PL들과 만나게 해준 턀갤에게.





3줄요약


티알하던 늒네 첫 오알팀이 정규팀 됨

1년만에 플탐 1천시간 뚫고 오알에 적응 완료

앞으로도 행복세션 할 예정임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