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군단은 어칼 엔진을 쓴 룰이다
어칼 제작자와 잿군단 제작자는 서로 다른 인물이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똑같은 커뮤니티(https://community.bladesinthedark.com)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 커뮤니티에선 어칼 및 어칼엔진에 대해 활발한 토론 & 세션이 이루어지고 있다
즉 잿군단은 어디 외따로 떨어진 제작자가 만들어낸 게임룰이 아니라
어칼 엔진을 많이 좋아하고 많이 플레이하는 커뮤니티에서 활달한 토론 및 테스트를 거쳐 탄생한 룰이 되겠다
어칼 커뮤니티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RPG상'이 잿군단 룰북엔 어느 정도 담긴 것이다
물론 잿군단이 어칼 커뮤를 대표하진 않고, 대표할 생각도 없겠지만
이들이 대체 어떤 RPG를 '바람직한 RPG'라고 생각하는지는 한번 쟤네들 얘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음
그걸 들어주지 않으면 이 룰북은 그냥... 그냥 엄청 피곤한 룰북이거든...ㅎㅎ...
1. 픽션과 액션
RPG가 재밌으려면 pc의 행동, 액션이 '진짜로' '사실처럼' 느껴져야 한다
이게 어칼류 룰북의 대전제이자 가장 큰 목표라고 할 수 있다
RPG에서 pc의 액션이 사실처럼 느껴지려면 우선 묘사가 실감나야 한다
'언데드가 공격해왔습니다. 위협도 2짜리 언데드니까, 피해 1이랑 부패1을 입어주십시오'라는 묘사보다
'독주둥아리가 침을 뱉었습니다. 녹색침이 당신의 몸을 덮칩니다. 살갗이 썩는 고통은 물론이고, 영혼까지 찢길 듯해요. 시트에는 피해1과 부패1을 기록해주십시오'
라는 묘사를 어칼류 룰북에선 매우매우매우 강권하고 있다
어칼류 룰북 曰:
묘사는 단순히 마스터나 플레이어가 자기 묘사력을 뽐내기 위한 실력자랑 대회가 아니다
묘사가 있어야만 pc가 '자기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상상할 수 있고
pc가 어떤 포지션에 있는지 상상이 되어야만, '이다음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도 자연스럽게 상상이 된다
한마디로 pc를 게임 속 세계에 이입시켜주는 통로, 밧줄이 곧 묘사이고 서술이다
만약 상상이 잘 이루어졌다면, 이제 pc는 게임 속 환경에 구체적으로 놓여져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언덕 위에서 집채만한 살점덩어리가 바위처럼 굴러 떨어지고 있다'는 상황 속에 pc는 서 있다
이걸 픽션이라고 부르자
픽션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면, 흐름이 어색하지 않다면, 이제 pc는 자연스럽게 액션을 취할 것이다
예를 들어 '살점덩어리가 바위처럼 굴러 떨어지고 있으니까 당연히 옆으로 피할게요! 순발력이 필요할 테니까 기동 판정을 하겠습니다!'하고 반응한다
이걸 액션이라고 부르자
어칼류 룰북에선 모든 초점을 '어떻게 픽션과 액션을 계속해서 연관시킬까' '어떻게 해야 하나의 흐름을 만들까'에 집중한다
액션이 성공하고 말고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 액션이 다음 픽션에 어떤 흐름을 일으키는지'가 더 중요하다
P1→A1→P2→A2→P3
이렇게 액션과 픽션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 게 '한 번의 세션'이다
그러면 이제 '한 번의 세션'이 다시 세계관 전체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pc들의 세션으로 인해 세계는 영향을 받았고, 그리하여 세계는 다시 pc들에게 특정한 퀘스트를 내려준다
뭐 그런 식임
여기까진 그냥 전반적인 AWE가 지향하는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칼 엔진, 특히 잿군단이 AWE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부분은 무엇일까?
2. 픽션-액션들이 이어지는 흐름이 게임에서 되도록 '빨리' 시작되어야 한다
픽션-액션의 흐름은 빨리 시작할수록 좋다
이 흐름은 템포 있게, 리듬감 있게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랑말 주점에서 모여 난 누구고 넌 누구일 테며 우린 황금광산을 털기 위해 ~~~한 계획들을 세울 거다,
같은 프롤로그를 잿군단에선 의도적으로 삭제한다
만약 잿군단에서 pc들이 적군의 진지에 잠입하여 인질을 구출해야 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pc들은 일단 주사위를 굴리고 봐야 한다
주사위가 나쁘게 나오면, '포지션이 불리한 픽션'으로 세션이 시작한다.
예를 들어 '당신들은 무사히 적군의 진지에 잠입했습니다. 하지만 어디선가 언데드 개새끼가 짖기 시작합니다. 당신들의 냄새를 맡은 모양이에요!'라고 P1(불리한 포지션)이 제시된다
이 상황에서 pc들은 액션을 취해야만 하며, 그리하여 P1→A1→P2... 의 흐름이 강제적으로 시작된다
주사위가 좋게 나오면, '포지션이 유리한 픽션'으로 세션이 시작한다.
예를 들어 '당신들은 무사히 적군의 진지에 잠입했습니다. 인질이 붙잡혀 있다고 첩자들이 얘기하준 건물을 바라보면, 문앞에 경비병이 한 명 서 있습니다. 멍청하게도 하품을 하고 있군요. 당신들이 있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요'라고 P1(유리한 포지션)이 제시된다
이 상황에서 또 P1→A1→P2... 의 흐름이 시작될 거다
이처럼 잿군단에선 세션을 시작할 때
'pc들이 곧바로 액션을 취할 수 있는 픽션부터 시작할 것'을 주문한다
이 첫 번째 픽션, P1을 주사위 한방으로 결정짓는 것이다
재미없고 지루한 프롤로그를 건너뛰자는 건데, 일견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물론 부작용이 있다
2-1. 플레이어들이 사전에 충분히 논의할 시간이 없다
플레이어들이 퀘스트 들어가기 전에 막 상의하고 회의하는 모습을 턀붕이들은 자주 봤을 거다
'만약 적이 함정을 파놓았으면 어쩌지?' '첩자가 거짓 정보를 가져온 거라면 어쩌지?'
'배낭에 들고 갈 수 있는 아이템은 한정되어 있는데 이번 퀘스트에서 횃불이 유용할까?'
'기껏 횃불을 들고 갔는데 정작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면 어쩌지?'
잿군단에선 바로 이런 논의를 재미없다고 지적하며, 그냥 일단 픽션-액션의 흐름을 시작하라고 권한다
근데 플레이어들이 바보라서 퀘스트 들어가기 전마다 10분, 심하면 30분 넘도록 의논하는 게 아니잖아
플레이어들은 퀘스트에 실패하기 싫어서, 마스터한테 바보 취급 당하기 싫어서, 이 퀘스트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최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려는 거다
무턱대고 던전에 뛰어들었다가 아무런 준비도 못한 채 쳐발리면 어쩌려고?
여기서 어칼류 엔진은 꽤 신박한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2-2. 회상 시스템
바로 '사실은 이럴까 걱정되어서 이런이런 준비를 해두었지롱!'라고 pc들이 선언할 수 있게, 룰적으로 도와준다
pc는 언제든지 '회상'을 선언할 수 있다
가령 첫 주사위 판정이 나쁘게 나와, P1(불리한 포지션)에서 세션이 시작한다고 해보자
파티는 적진에 무사히 잠입했지만 언데드 개새끼가 당신들의 기척을 감지했는지 왈왈 짖고 있다
갑작스럽게 이런 상황에 떨어졌으니 pc들은 당황스러울 거다.
하지만 '회상'을 쓰면...
'언데드 개새끼는 사람의 숨소리를 듣고 맡는다면서요? 제 pc는 적진에 잠입해야 한다는 명령을 들었을 때, 당연히 적진에 돌아다니는 파수견의 존재를 염려했어요. 그래서 보급관한테 '숨을 참는 약(심해약)'을 배급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온 심해약을 쓸게요. 판정이 필요한가요? 보급관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나요?'
이렇게 그때그때, 마치 pc가 이런 사태를 준비했었던 것처럼 서술할 수 있다
회상씬이 그럴싸하면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좀 억지스럽다 싶으면 적당히 대가를 지불한다
어칼류 룰 曰 '회상 시스템을 쓰면 쓸데없는 준비를 할 필요가 없고, 그때 상황에 필요한 준비만 딱딱 제시할 수 있다!'
얼핏 듣기엔 또 그럴싸하다
'지루한 프롤로그를 건너뛰면서도 만전의 준비를 갖출 수 있다니(갖춘 척을 할 수 있다니) 개쩌는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음
하지만 물론 부작용이 있다
2-3. 시간을 왔다갔다 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다
누군가가 어칼 커뮤니티에 자기가 잿군단을 마스터링한 경험을 올렸다
(https://community.bladesinthedark.com/t/zora-first-mission-aar/768)
이 글을 룰제작자가 직접 보고, 게임은 재밌게 잘 즐겼냐고, 만약 뉴비들한테 해줄 말이 있다면 뭐냐고 물었음
그러자 잿군단 마스터링한 사람이 이렇게 답변하더라고
'많은 플레이어들은 게임 속의 시간을 현재형으로 진행하는 데 익숙하다.'
'타임라인을 되돌려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회상) 자체가 플레이어들에겐 익숙하지 않다.'
그리고 나도 이 지적에 완전히 동감함
우리가 평소 즐기는 RPG에서 게임 속 시간은 거의 무조건 현재형이야
회상씬을 할 때도 많지만, 회상씬은 무언가 특별한 과거를 풀어젖힐 때라든지
아무튼 굉장히 이례적으로만 허락되는 장면이지
우리는 전부 현재형으로 게임 속 세계를 상상하는 데 익숙해져 있어
'사실 저는 여기 오기 전에 ~~~를 했답니다'라는 건 뭔가, 질 나쁜 치트처럼 여겨져
그리고 RPG에서 오는 긴장감은 바로 이거,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원칙에 굉장히 많이 기대고 있다고 생각함.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회상을 써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게임의 긴장감이 떨어지는 느낌임.
게임 속 시간은 감히 플레이어들이 엿가락처럼 주물럭거릴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
플레이어는 물론이고 마스터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게임 속 세계의 법칙이야
pl이 어떻게 해서도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긴장감이 생기는 거지
정리하면 어칼류 시스템이 제시하는 '회상 시스템'엔 각각 장단점이 있어
장점은
1. 프롤로그에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소요하지 않아도 된다. 주점에서 3시간 동안 떠들고 싶은가?
2. 픽션-액션의 흐름을 반강제적으로 시작하게 해주어서, 게임 속 이야기와 pc의 액션이 따로 놀지 않게 도와준다
3. 꼭 필요한 준비만 할 수 있게 된다. 그걸 준비하는 게 어렵다면 대가를 크게 받고, 쉽다면 대가를 작게 받는다. 그걸로 끝이다
단점은
1. 플레이 도중에 타임라인을 왔다갔다 하는 건 우리한테 전혀 익숙하지 않다
2. 시간은, 따로 합의하지 않더라도, 마스터와 플레이어들이 서로 '건드릴 수 없는 세계법칙'이라고 공유하는 부분이다. 매우 강력한 공통심상이다. 시간은 함부로 되돌릴 수 없지...ㅇㅇ...라는 공통된 합의, 세계에 대한 공통된 의견이 있는 덕분에, pc들은 '세계'를 느끼고 '장애물'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유용한 심상을 도구로 써먹으면 자칫 긴장감이 옅어질 수 있다
3. 사전에 준비하고 모의하는 과정이 항상 지루한 것만은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 완벽한 준비를 갖추었는데 정작 퀘스트에서 뒤통수를 맞는 재미도 있고, 준비가 결코 완벽하지 않다고 느끼지만 신속하게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어쩔 수 없지, 가자!'라고 비장하게 결단을 내리는 재미도 있다
이 정도로 정리하고 싶음
물론 잿군단도 이런 문제를 간과하는 것 같진 않다
잿군단은 자기 나름대로 '세계를 진짜처럼 느낄 수 있게', '플레이어들이 긴장감을 느낄 수 있게' 여러 장치를 고안하고 있거든
2-4. 시간은 잠깐 되돌려서 회상을 할 순 있어도, 이미 나온 주사위 '판정'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다
리롤 안 되는 건 당연하고
어떤 스킬과 능력을 동원해도 '판정의 효과를 더 좋게 만들 순 없다'.
가령 판정으로 '성공'을 띄웠는데, 거기에 스킬을 써서 '대성공'으로 만들 순 없음.
이에 대해 어칼 커뮤니티에서 잿군단 제작자가 직접 답변한 걸 캡처해봤다
(https://community.bladesinthedark.com/t/adjusting-effect-after-the-roll/1578/7)
질문자: '내 플레이어 중 한 명이 다이스를 굴린 다음에 스킬을 써서 판정의 효과를 높이겠다고 말하더라. 이거 안 될 거 같은데. 가능함?'
답변자1(룰 제작자는 아님): '잿군단 말고 어칼에서도 그런 건 불가능해. 게임룰에 엄격히 따르면. 하지만 GM의 재량에 달린 부분이긴 함.'
답변자2(잿군단 룰제작자): '윗놈 말이 맞아'
답변자2(잿군단 룰제작자):
'한 가지 첨언하자면, 다이스를 굴린 뒤에 성공의 효과를 높이는 건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해.'
'잿군단에선 픽션이 중요해. 내 pc는 지금 굉장히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나? 그렇다고 치자. 바로 그런 순간에 pc는 자연스럽게 액션을 해.'
'만일 이 순간에 pc가 스킬(원문에선 push)을 쓴다면, 픽션의 내용은 완전히 달라질 거야. pc는 어마어마한 괴력을 발휘해서, 비록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어떻게든 임무를 성공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행동하는 거지.'
'스킬을 썼느냐 쓰지 않았느냐에 따라 게임 속 픽션은 그림이 완전히 달라져!'
'만일 다이스를 굴린 뒤에 성공의 정도를 바꾸는 게 허락된다면, 우리가 서로 공유하고 있는 픽션은 흐름이 끊겨버리고, 서로 어긋나게 되어버릴걸.'
그러니까 잿군단에서 세계의 절대적인 법칙은 '시간'이 아니야.
현재형으로 흐르는 시간 같은 건 잿군단에서 어느 정도 무시되어야 해
잿군단에서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세계는 '픽션-액션'으로 이어지는 흐름이야
P1→A1→P2→A2→P3
이렇게 이어지는 흐름만이 결코 마스터와 플레이어들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세계이고 법칙임
비록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회상 시스템 때문에 플레이의 긴장감이 떨어질 순 있겠지만,
만일 우리가 '시간'이 아니라 '픽션-액션의 흐름'만 절대적인 걸로 받아들인다면, 여전히 긴장감은 유지돼
저 흐름을 되돌리는 일은 잿군단에서 절대 용납하지 않으니까.
내 생각이 아니라 룰제작자 생각이 그렇다는 거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잿군단 제작자가 어칼 커뮤를 전부 대변하는 건 아니다.
가령 어칼 룰제작자는 잿군단 제작자보다 훨씬 더 부드럽게 답변하더라고
답변자3(어칼 제작자):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진 마!'
'중요한 건 팀에서 대화를 나누는 거고, 팀에서 말이 되느냐 안 되느냐야.'
'우리의 판정이 룰북과 충돌하느냐 마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이게 문제가 되는 건, 실제로 우리의 플레이에서 트러블을 일으켰을 때뿐이지.'
'별다른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면 팀에서 합의하고 공감한 대로 세션을 진행하자!'
'물론 룰북에 따르면 다이스 굴린 다음 효과를 조정하는 건 안 되긴 함'
몬가 잿군단 제작자랑 어칼 제작자의 성향이 다른 거 같아서 재밌드라고
아무튼.
어칼이든 잿군단이든 '현재형으로 진행되는 시간'엔 별로 신경쓰지 않아.
'픽션-액션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중요할 뿐이고.
그리고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해.
3. 서로 상상하고 있는 '픽션'이 다를 수 있다
자, 다인플을 하면 플레이어1이랑 플레이어2, 마스터가 각각 상상하고 있는 '픽션'이 미묘하게 다를 수도 있지?
첫 주사위 판정을 했는데 나쁜 결과가 나왔어. P1(불리한 상황)이 뜬 거야
마스터는 '여러분은 적진에 잠입하는데 성공했지만, 인질이 붙잡혀 있는 건물은 절벽 위에 있습니다! 으슬으슬하게 바람이 몰아닥치는 절벽 아래에서, 당신들은 위를 올려다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해.
이때 플레이어1은 '아, 절벽이라니, 이건 마스터가 적당히 우회로를 찾으라고 암시하는 거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어
그리고 플레이어2는 '절벽이군. 마침 나에겐 기동 스킬이 있지. 마스터는 여기서 우리한테 위험을 감수하고 판정을 시도해보라는 거구나'라고 생각한다
'절벽'이라는 픽션 속의 장애물이 가지는 위험도에 대해 플레이어들이 각각 다른 상상을 하는 거야.
이건 단순한 예에 불과하지만, 서로 픽션이 어긋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지
상황이 좀 더 악화되면, 플레이어1은 플레이어2를
'아니 왜 마스터가 안 된다고 내놓은 장해물을 굳이 돌파하려 들지??'
이렇게 취급할 거고.
플레이어2는 플레이어1을
'아니 왜 바로 돌파할 수도 있는데 괜히 시간만 질질 끌게 우회로 없느냐며 징징거리지??'
라고 마음속으로 욕할지도 모름
어느 룰에서든 생길 수 있는 문제지만 어칼류 게임에선 이 문제를 더 진지하게 받아들일 거야
왜냐면 자기들이 재미를 찾고자 하는 부분이 바로 '픽션-액션의 흐름'인데
여기서 픽션부터 어긋나면 자칫 흐름이 어긋날 수 있고, 흐름이 어긋나면 이 사람들이 찾는 재미도 실종될 테니까
그런 사태를 걱정했는지 어칼류 엔진에선 '마스터와 플레이어들 전원이 현재의 픽션을 공유할 수 있도록' 장치를 몇 개 만들어뒀다
3-1. 주사위로 액션을 판정할 때, 그냥 판정하지 말고, [처지]와 [효과]를 정해둔 다음 판정한다
모든 pc들은 주사위를 굴리기 전,
내가 하려는 액션이 '얼마나 유리한 상황에서 시도되는 건지' 혹은 '얼마나 불리한 상황에서 시도되는 건지' 먼저 상상해둬야 해
예시들은 아래 캡처로 대신하겠음
아까 절벽을 오른다는 상황을 예시로 들었지
과연 마스터가 절벽을 '결코 오를 수 없는 장애물'이라 생각하고 묘사한 걸까?
아니면 그냥 마스터는 절벽이 있으면 재밌겠다고 생각해서 묘사했을 뿐이고, 운만 좋으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장애물인가?
플레이어2는 '저 기동을 써서 절벽에 올라볼게요'라고 말했다고 해보자
이때 마스터가
'좋습니다, 절벽은 매우 높아요. 위에 경비병이 있어서 그 녀석 눈에 들키지 않고 올라가는 것도 일이군요. 하지만 pc는 군단에서 짬밥을 오래 먹은 척후병이지요. 절벽을 오르는 일 따윈 이번이 처음도 아닐 겁니다. 당신은 '리스키한 상황'에 놓여 있지만, 기동 판정에 성공할 경우엔 '극적인 성공'을 맛볼 거예요. 시도하시겠습니까?'
라고 말한다고 해봐
그럼 이제 팀원들 전원이 알게 되는 거야. 픽션 속에 제시된 '절벽'이 정확히 어느 정도 위험한 장애물인지.
비록 모두가 100% 똑같은 픽션을 공유하진 않겠지만
주사위를 굴리기 전에 액션 판정의 처지/효과를 설정하는 것만으로도
70%, 80% 정도는 팀원들이 픽션을 정확하게 공유하겠지
적어도 룰제작자의 의도는 그럼.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이 너무너무 불리하면, 설령 크리티컬을 띄운다고 해도
단숨에 인질 코앞까지 올라간다든지 경비병 목을 자유롭게 따버린다든지, 그런 건 불가능해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마스터뿐만 아니라 팀원들도 '미리' 상상할 수 있어.
처지/효과를 설정해두면 말이야
이것도 좋은 제안처럼 보이는데 또또 단점이 있음
3-2. 주사위 굴리는 맛이 떨어진다
씨발 크리티컬은 크리티컬이고 펌블은 펌블이지
내 처지가 아무리 열악하든 말든 알 게 뭐야, 지금 20을 연속으로 띄웠는데
픽션-액션의 흐름상, 내 저렙 전사가 해골우두머리 대갈통을 도끼로 까부수는 건 '서사적으로' '픽션상' 별로 말이 안 된다고?
나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주사위가 그 말도 안 되는 걸 허락했다
그러니까 그걸 이제부터 말이 되게 서술할 거다
~~이런 재미도 RPG에는 있다고 생각하거든?
서사로서의 재미뿐만 아니라 '도박'의 재미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어칼류에서 제시하는 '처지/효과' 판정법은, 이 도박의 재미를 좀 떨어트림
아예 도박의 재미를 없앤다는 게 아니라 좀 떨어트림
그래서 나는 다른 룰로 게임할 때보다 어칼류로 게임할 때 주사위 굴리는 재미가 적게 느껴지더라
이것도 각각 장단점이 있는 룰이구나 생각하면 될 듯
존나 길게도 글 싸질렀네
원래는 캠페인 파트, 플레이어들이 자유롭게 pc를 바꿔서 플레이하는 룰,
'서사룰이라면 어쩔 수 없이 pc의 죽음을 예방해야 하는데(막바지 클라이맥스일 때 빼고), 잿군단에선 pc 개개인이 아니라 군단 전체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마스터가 비교적 편안하게 pc들한테 잔인해질 수 있다'라거나,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지쳐서 더 못 쓰겠음ㅎ
ㅅㄱ
세 줄 요약
1. 재밌을 수도 있는 룰이다
2. 게임 룰북이기도 하지만 마스터링 조언책이기도 하다
3. 이런저런 룰을 제시하는데, 각각 장단점이 명확하게 있다. 장점이 취향에 맞으면 하고, 단점이 내 불호를 건드린다면 하지 말자
이건 잿불 속의 군단에 대한 게 아니라 어칼에 대한 리뷰 같은걸. 잿불 속의 군단은 아직 안 읽어서 모르겠고, 어칼에 대해서 한정해서 말하자면 말하는 문제점은 공감하는데 어칼의 장르적 특성 생각해 보면 플래시백은 장단점 다 고려해도 총합적으로 매우 유용하고 좋은 시스템임. 섀도우런 같은 거 해 보면 실제로 작전 짜느라 2~3시간씩 얘기하다 지치거든
솔직히 지쳐서 못 썼다는 부분이 훨씬 핵심일 것 같은데. 세션마다 신병 두세명씩 갈려들어가고 시트 계속 짜다보면 존나 현타옴...
오... 어칼류 어떻게 해야할지 딱 이해됨ㄱㅅㄱㅅ 글 잘쓴다. 설명하는 순서도 완벽한듯
근데 확실히 이건 잿불보단 어칼엔진 특징 설명해준거 같음ㅋㅋ
ㅇㅇ 좋은 글이야 근데 2랑 2-1은 좀 다시 생각해볼게 있음 잿불에선 작전에 돌입하기 전에 접근 판정을 하거든. 그 때 첩보 점수를 써서 마스터에게 질문을 할 수 있음 그러면 구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준비할 수 있음. 바로 상황을 시작한다는 아닌것 같아
좋은 리뷰글 감사!
3번은 플을 재밌게 만들 수도 있는 변수라 생각하는데... 변수를 어느정도 통제하면서 다 같이 완성도 높은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룰인 것 같네(리뷰글만 보고 난 느낌) 완성도나 개연성 추구하는 팀에서 좋아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