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은 구판 룰북 시절 다양하게 삽질을 하면서 코빗 못지 않게 고통을 받아 온 하비 월터스(Harvey Walters)의 아컴 호러 버전. CoC에서는 기자인 반면 아컴 호러에서는 나이든 교수로 나온다. 과연 이번에도 고통을 받을지는 내가 7판은 아직 못 봐서 모르겠음. 일단 이번에는 CoC 키퍼가 시나리오를 준비 / 전개할 때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끄적여 봄.
크툴루 신화의 설정은 적당히
막 크툴루 신화하면 이것저것 설정부터 알아 놓고 시작해야 할 거 같은데, 반대로 이건 시나리오를 굴리는 데는 사실상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을 인지해야 함. 전에 이야기했지만 "에일리언" 1편은 크툴루의 Cth도 안 나오는 SF 작품이지만 서사 구조 등을 따져봤을 때 러브크래프트적인(Lovecraftian) 작품으로 인정받고, 러브크래프트 본인조차 그런 것들 전혀 안 나오는 호러물들도 썼음. 그렇기 떄문에 키퍼는 극단적인 경우 플레이어들이 상대할 신화생물이 어떻게 생겼고 뭘 할 수 있는 지만 대략 알아도 되고, 플레이어들은 그보다 더 적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도 되니까 크툴루 신화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괴상하게 생긴 괴물이 괴상한 방식으로 공격해 온다 정도로만 이해해도 솔직히 별 지장은 없음. 플레이어 입장에서 자기한테 날아드는 놈이 바이야키인지 미-고인지 뭔지 알 게 뭐임? 일단 도망가던가 총부터 갈기는 게 우선이지. 그런 개념을 충실히 반영한 게 구판 룰북에서 나온 주문 사용 예제인데, 여기서 주문을 사용하는 캐릭터는 자기가 주문을 배울 때 사용한 자료에 소환하는 생물의 이름이 제대로 안 나왔기 때문에 자기가 소환한 생물을 그냥 대충 "날개 달린 똘마니" 정도로만 암. 아니면 퀵스타트 같은 경우도 사실 상대를 좀비라든지, 리치라든지 뭐 그런 존재로 치환해도 별 지장 없을 거임. 그냥 리치라기엔 좀 그런가?
배경 지식의 공지 / 시공간의 전환
시나리오를 전개하는데 있어서는 크툴루 신화의 설정보다 이게 훨씬 중요한 부분임. 왜냐하면 몇몇 시나리오는 "시대상"적인 요소를 충분히 활용하는 방식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에 키퍼는 시나리오 내에서 혹은 그 시대를 다루는 다른 작품에서 중요하게 사용된다 싶은 기본 설정에 대해서는 시작 전부터 대충이나마 공지를 해야 속이 편함. 예를 들자면 1920년대 미국이 배경이면 금주법이 시행되던 시기라는 점이라든가, 그 외에도 시나리오 내용상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공지를 해야 함. 예를 들어서 전에 소개한 Dead Man Stomp는 흑인과 백인이 섞여 나오는 데다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1920년대를 반영하기 때문에 "인종차별"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 시나리오임. 근데 내가 그런 걸 잘 모르겠으면 어떻게 해야하냐... 솔직히 "이 시나리오는 기본적으로 1920년대 아캄을 배경으로 해야합니다" 같은 구성이 아닌 시나리오는 내가 그 시나리오 배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면 그냥 시공간을 전환하면 됨. 간단히 말해서 보스턴에 살던 월터 코빗이 충청도에 살던 원고빈 씨가 된다거나 뭐 그럴 수 있단 이야기고, 내가 한국전쟁은 잘 모르는데 굳이 그 시절을 다루고 싶다면 아예 '웰컴 투 동막골'이나 '손님'에 나오는 것처럼 전쟁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산골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플레이어들만 전쟁통이라 무장하고 나타나게 해도 됨. 그런 면에서 가장 좋은 건 역시 현실의 한국화인데... 이러면 이러면 너도 나도 현실의 배경 지식은 갖고 있으니까 딱히 설명 같은 거 안 해도 됨. 누군가 그런 걸 잘 모르는 사람이 나와도 다른 사람들은 많이 알테니까 자체적으로 설명이 될 테고. 또한 이런 식으로 시공간을 변경하는 걸 통해서 원하면 추가적인 제약을 걸 수도 있음. 예를 들어서 기껏 충청도에 나타나게 한 원고빈 씨가 산탄총에 훅 가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캐릭터를 짜는 플레이어들에게 처음부터 "한국은 총기 규제가 심한 나라니까 총은 들고오면 안 됩니다"같은 식으로 제약을 걸 수 있다는 거지.
플롯 아머 내지는 "상식적인" 전개
뭔가 노답 신화생물이 튀어나오는 판타지물에는 안 어울리는 거 같지만, 일단 CoC는 기본적으로 딴 동네가 아니라 일단 지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기본적"으로는 우리 관점에서 "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게 맞음. 그러니까 누군가 남들이 있는 곳에서 문제를 일으키려 들면 경찰이 신고를 받고 나타나게 할 수도 있고, 반대로 플레이어들이 자기들끼리 해결해야만 하는 피치 못할 이유가 없다면 상황에 따라서 이쪽에서 경찰에 신고해도 됨. 따라서 그런 식으로 플롯이 꼬이는 걸 참을 수 없다면 미리 플롯을 적당히 통제할 필요가 있음. 예를 들어서 조사를 의뢰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부르지 않고 일을 조용히 정리하라고 조건을 붙인다거나, 아예 다른 사람이 오기 전에 기괴한 현상이 갑자기 끝나서 정리되는 것임. 이걸 가장 잘 보여준 작품 중 하나는 러브크래프트 선생의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자(The Whisperer in Darkness, http://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trpg&no=13058 참조)"로, 여기서 주인공과 편지를 주고 받는 사람은 나름대로 기괴한 현상을 경험하는데, 증거를 기껏 모아놔도 사라지고 인근 주민들 중 일부도 상대 편인데다 믿을만한 사람은 다들 멀리 있기 때문에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됨. 그러니까 같은 식으로 키퍼도 어느 정도 플롯이 꼬일 것 같다면 변수를 차단해 가면서 전개를 끌고 갈 필요가 있다... 이거임. 참고로 저거 영화판과 원작 엔딩은 다름.
떡밥의 제공과 적당한 설명
또한 적어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플레이어들이 작내에서, 적어도 사건이 정리된 이후에라도 어느 정도 내막을 알게 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할 필요가 있음. '광기의 산맥에서'를 쓰면서 따옴표를 써서 나타낸 대화글은 한 줄도 제대로 안 쓰고 서술만 죽어라 하던 러브크래프트처럼 서술충 짓거리까지는 할 필요가 없겠다만.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흘러간다는 게 다 좋은 건 아니어서, 최악의 경우는 결국 뭐가 뭔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시나리오가 끝나버릴 수도 있기 때문임. 덤으로 그렇게 시나리오의 내막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플레이어들에게 크툴루 신화 스킬도 좀 제공하고 이성도 좀 깎을 수 있고..... 그러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사건에 연계된 인물 / 공간 / 사물을 던져주고, 그걸 조사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떡밥을 풀어나가는 것임. 예를 들자면 이상한 소문이 도는 저택을 조사했더니 어떤 노트가 나왔는데 누가 그걸 읽어보다 "이기어검술"이라든지 "불사지체"라든지 아니면 "공사 완료" 같은 단어를 발견한다거나, 혹은 특정한 NPC가 "버섯은 친구"같은 괴상한 발언을 자주 하는 식으로 도중에 떡밥을 던지고, 나중에 그런 떡밥이 가리키던 게 뭔지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식으로 시나리오를 전개하면 대략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비교적 쉽게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임. 그리고 단기 시나리오로 끝낼 게 아니라면 시나리오 내에서 풀리지 않았던 떡밥을 설명하는 과정을 통해서 다른 시나리오로 진행을 이어갈 수도 있을 테고. 이 부분에 대해서 참고하면 좋은 작품 중 하나는 이미 고전이 된 거 같은 The X-Files 시리즈. 여러 에피소드에서 주인공들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조사한 뒤 단서를 모아서 자기 나름대로 설명하고 해결하려 노력하고, 다른 스토리로 이어질 수 있는 떡밥도 나오고 간간히 헛다리도 짚고 뭐 그렇다. 사실 이건 CoC 원판보다는 델타 그린이 본받아야 할 작품이지만 큰 틀은 뭐 1920년대나 1890년대나 현대나 거기서 거기니까 괜찮을 듯.
개추 후 정독. 하비월터스는 7판에서도 갈립니다. 이미 간편입문가이드에서 팔병신 됐음.
과연 영원히 고통받는 하비!
근데 여기 누가 주작기 돌리나 조회수에 비해서 추천이 뻥튀기가 쩌네
난 개추 누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글임.
근데 주작기 돌아가긴 하는 덧
개추 박고 덧글 달았는데 왜 덧글은 날아갔지;;; 암튼 잘 봤음
7판에서도 계속 고통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