훠훠훠 재미있는 글이 많군요 그러니까 재미있는 글이 있으면 재미없는 글도 있어야겠지요?

그래서 갤에 요 며칠 올라온 주제나 내가 그냥 떠올린 것 중에 내 마음에 드는 거 위주로 사족을 붙여 봄.


강령과 원칙

원래 AWE 계열의 강령과 원칙은 거의 같은 본질을 두고 책마다 말을 바꿔서 빈센트 베이커가 초기에 했던 말 대부분을 또 하는 거에 속함. 그러니까 지금 하고 있는 룰 / 혹은 가장 하고 싶은 / 아니면 가장 재미있게 했던 룰 2중 하나 잡고 강령과 원칙을 잘 읽은 다음에 자기의 플레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해해 보려고 해서 뭔가 좀 알아먹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할 거임. 중요한 부분은 이거는 그냥 읽는 것보다 "자기의 RPG 플레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쪽이 정말 많이 도움이 될 거라는 거야.


플롯을 작성하지 마라...?

솔직하게 말하자. 누군가가 진짜로 딱 이렇게만 말한다면 사실 그런 건 들을 가치가 없는 소리임. 사실 그렇게 말하는 새퀴들도 결국 캠페인 같은 거 하다 보면 어느 정도의 '이야기의 큰 흐름'을 정해 놓고 진행하며, 우리의 주인공들은 그 큰 흐름 안에서 뭘 어찌어찌해서 마스터가 적당히 정해놓은 목표를 달성하거나, 최소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여정을 진행해 나가게 됨. 아주 간단한 예로 FitD 계열의 룰인 '잿불 속의 군단'의 경우를 보자. 이 룰은 우리의 주인공들이 속한 부대는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전투에서 대판 깨졌고, 악의 군세를 피해서 안전한 요새까지 빤쓰런을 한다는 뭐 그런 '이야기의 큰 흐름'을 이미 정해 놓은 상태로 진행된다. 그렇지? 그럼 이렇게 "플롯을 작성하지 말라"고 주장 하는 놈들은 다 우리를 놀리려고 이러는 거냐... 그런 건 아닐 거임. 다만 이런 놈들이 정하지 말라고 하는 대상이 되는 '플롯'은 실질적으로는 위의 문장으로 치면 우리의 주인공들이 '뭘 어찌어찌해서'의 뭘 어찌어찌 하는 부분이고, 그런 부분의 내용을 굳이 디테일하게 정해 놓지 말라는 의미거든.


그렇게 하면 네가 미리 정해 놓지 않은 그런 부분들은 결국 플레이어들과의 플레이 도중에 결정 / 완성되는데(그런 부분이 나오면 안 정하고 패스하는 식으로 넘어갈 수는 없을 테니까), 플롯을 작성하지 말라는 놈들은 대개 이런 상황을 가지고는 "플레이를 해서 알아낸다" 뭐 이딴 식으로 빙빙 돌려서 설명한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그 전까지 해 온 플레이 결과 / 캐릭터 시트의 내용 / 플레이어들 또는 너의 생각 등이 반영된 결과물에 지나지 않지만 위의 "플롯을 작성하지 마라"처럼 그렇게 말하면 뭔가 좀 더 있어 보이잖아? 물론 난 그래서 수많은 AWE 계열 룰들의 강령과 원칙 대부분을 싫어함. 위에서 말한 대로 다들 근-본인 아포칼립스 월드에서 빈센트 베이커가 말하던 거하고 비슷한 소리 적었을 거 뻔히 다 아는데 모르는 척 빙빙 말돌리기 경쟁하는 거 같거든.


어쨌거나.... 또한 이건 내용을 굳이 '디테일하게' 정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했지? 바꿔 말해서 '기초적인' 건 그냥 미리 정해놓는 게 편하다는 거임. 예를 들어서 이번 세션에서 PC들이 사람들이 엘크로 변한다거나 땅에서 좀비가 튀어나오는 등의 끔찍한 사건들을 수습했다면 다음 세션에서 PC들이 조져야 할 이번 일의 원흉이 누구인가를 미리 정하고 걔들에게 알려 준다거나 그런 정도는 결정을 해 놓는 게 여러 모로 편하고 어쩌면 당연한 것임. 물론 디테일하게... 그러니까 PC들이 다음 세션에서 진짜로 이 새퀴를 갈기갈기 찢게 할 지, "알고 보니 마로는 그리 나쁜 녀석이 아니었고 더 나쁜 녀석이 들어오는 것을...." 할지, 혹은 더 상위의 나쁜 놈이 이놈을 "매출을 2배로 올리는 것 하나 제대로 못 하냐"면서 팀킬하는 걸 몰래 목격하고 돌아올 지 뭐 그런 건 굳이 이번 세션에서 미리 정할 필요가 없는 영역에 속할 가능성이 높은 거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러면 대체 이런 방식의 장점이 뭐냐...고 할 수도 있을텐데, 짧게 말해서 '역동적인 상호 작용'이 되겠다. 이미 결정되어 있지 않은 부분들을 플레이 도중에 결정 / 완성하면 그 결과가 이후의 플레이에 반영되잖아? 그러면서 플레이어들은 그런 부분들에 대한 자신들의 결정이 플레이 내의 세계와 자신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를 확인할 수 있음. 미리 기본적인 결과는 다 정해놓고 대충 선택지에 따른 변화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제레미는 기억할 것입니다" 같이 살짝 변화랍시고 덧붙이는 방식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플레이어들의 선택 결과가 역동적으로 반영되는 것도 분명하고. 그래서 이런 말은 대개 "이야기" 그 자체를 중요시하는 룰에서 많이 언급되는데, 또 이게 웃겨지는 부분은 그렇다고 해서 딱히 이런 부분을 강조하지 않는 룰들은 이런 방식을 아예 안 쓰는 게 아니란 거임. 예를 들어서....


이번 뻘글을 쓰게 된 동기 중 하나인 번역글의 덧글에는 "그럼 CoS / Curse of Strahd는 뭐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CoS도 사실은 내가 언급한 대로 '큰 흐름'과 이놈들이 짜지 말라는 그 '플롯'을 구분해서 보면 딱 이런 이야기를 다루는 D&D 캠페인으로 볼 수 있음. 오늘도 평화로운 바로비아 영지에 사는 주민들 중 스트라드 영주님 포함 소수의 '아주 중요한' NPC들은 '큰 흐름' 안에 속하는 NPC들이고, 기타 자잘한 NPC들이나 그들과 만났을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영지의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니며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은 미리 정해지지 않은 '플롯'에 속하니까 결국 PC들이 결정하게 될 영역이다 이거지. 번역한 갤럼이 귀찮아서 삭제한 예시에서도 끝자락에서는 스타 워즈 프리퀄의 주요 악당이 각 편마다 다스 몰 -> 두쿠 백작 -> 그리버스 장군으로 교체되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사실 이 스타 워즈 프리퀄도 '큰 흐름'은 시작부터 결국 끝에 가서는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사지절단 통구이 다스 베이더가 되고 팰퍼틴이 은하제국의 황제가 되는 이야기로 끝난다는 것이 이미 수십 년 전에 확정되어 있는 상태였지만, '플롯' 부분은 미리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그때 주인공들과 직접 대적할 악당으로 두쿠나 그리버스 같은 캐릭터들을 추가해 가며 영화 세 편을 찍은 거임. 이것도 무슨 말인지 알겠지?


AWE VS OSR

양놈들 보면 이게 PC충 VS 대안 우파로 사실상 정치적 갈등에 가까운 병림픽이 된지 좀 됐는데.... 실질적으로 게임으로서의 차이를 두고 말하자면, '판정'과 '결정권의 위치'에 대한 해석 차이 부분이 가장 크다고 생각함. OSR에서 판정은 그냥 무턱대고 하고 보면 결과를 보고는 "어?" 하기 쉬운 그런 쪽이라 씽크빅한 아이디어로 최대한 성공률을 높이던가 아니면 아예 패스할 궁리를 해야하는 요소임. 반대로 AWE는 판정의 전체 난이도가 그런 심각한 수준은 아닌 대신에 '아무 문제 없이' 성공할 수 있는 수준의 판정 난이도만 보면 대개 OSR 쪽에 못지 않게 거지같이 잡아놓고 '이러면 뭔가 문제가 생기겠지?'라는 발상을 기반으로 해서 판정을 실질적으로 '뭔가를 덧붙이는 수단'으로 씀. 그러다보니까 대개 판정에 성공을 해도 뭔가 덧붙는 '대가'가 따르고, 실패해도 마찬가지로 패널티가 주어져서 뭔가가 덧붙음. 이런 식으로 대부분의 판정 결과는 뭔가가 덧붙는 식인데, 그런 것을 통해서 플레이 내의 이야기를 변화시켜 나가는 거임. 심지어 FitD 계열 룰 같은 경우는 이렇게 뭔가를 덧붙일 만한 수단으로 다른 룰이라면 무슨 미친 소리냐고 할 지도 모를 '그래서 사실 미리 ~를 준비했었다' 식의 회상(Flashback) 같은 비선형적 시간 요소를 룰 메카닉으로 쓰고 있고 말이지.


다른 요소인 '결정권의 위치'의 경우는.... OSR은 대개 잘해야 랜덤 테이블 정도 주고, "니가 해라" 하고 치우는 쪽에 속하는 룰임. 나보다 좀 더 극단적인 애들의 의견을 빌려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원래 OSR은 룰이고 뭐고 조까고 마스터가 플레이어들의 씽크빅한 아이디어들과 자신이 제시한 상황을 보고서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대로 결과를 제시해도 충분히 문제가 없는 장르다. 그래서 이런 장르의 룰은 기초적인 거만 다루는 식으로 간소할수록 좋은 것이다"라는 입장의 룰이다, 이 말임.


반면에 AWE는 그나마 룰북에 길게 마스터 세션도 써 주면서 뭐 좀 더 있는 척 한다...는 좀 너무한 표현이고, 대충 어떤 식으로 마스터가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는가'에 대해 알아먹기 귀찮게 쓰이긴 했지만 아무튼 가이드라인인 '강령과 원칙'을 제시한다거나 플레이 도중에 플레이어의 의견이 좀 더 많이 반영될 여지가 있다거나 해서 '마스터 개인의 결정권에만' 의존하는 비중이 훨씬 낮은 편임. 대충 5판 같은 룰과 비교하자면 스닉 어택이 지금 되냐 아니냐 같은 상황을 따질 때 OSR는 일단 마스터가 결정할 수 있고(물론 너무 말도 안 되면 당연히 플레이어들이 불만을 표할 거긴 함), 5판(대충 쩜오 이후의 D&D는 다 여기에 해당됨)은 일단 룰북에는 뭐라고 써 있나를 확인하고 보는 거고, AWE는 마스터의 입김이 일반 플레이어들에 비해 세긴 세지만, OSR보다는 확실히 약해서 일단은 플레이어들과 적당한 암묵적 합의(플레이를 통해 알아내고 뭐 그러는)를 통해 확정하는 식으로 결과가 도출된다고 보면 될 듯. 그래서 마스터 자신의 역량을 키우고 싶다면 OSR 같은 걸로 씽크빅함을 늘려보는 것도 AWE를 하는 마스터 입장에서 도움이 될 수 있기는 있을 거라 생각함.


3줄 요약

강령과 원칙은 굳이 끝까지 다 안 읽어도 됨.

플롯을 짜지 말라는 말은 그냥 믿으면 안 됨.

AWE나 OSR이나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