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영화를 그렇게 즐겨보는 쪽은 아니다.
그리고 '자칼의 날'은 읽어야지 읽어야지 해 놓고 아직도 안 읽어봤다.
하지만 내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아주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절친한 친구 중에 액션영화를 꽤 즐겨 보는 녀석이 한 명 있는데,
내가 이 녀석 소설에 대해 편집자 노릇(아니, 사실 웬만한 편집자들보다 더 일하고 있다...) 하면서
이것저것 느낀 바가 많아서 하는 소리다.
이 녀석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말 그대로 '영화 보고 소설을 쓴다'는 느낌이 정말 강한 녀석이다.
감각적인 장면 연출, 영화적인 미장센의 텍스트화에 대해서는, 솔직히 엄청난 필력을 가지고 있다.
이 녀석이 비 내리는 풍경이나 총격전, 격투 묘사를 한 걸 한 번 읽어보면,
진짜로 눈 앞에서 영화 필름이 그려지는, 그 정도로 영화적 연출을 소설 텍스트로 연구한 녀석임.
근데 동시에, 이 녀석은 여기에 대해서 너무 집착하는 감이 있다.
멋있는 장면 연출에 너무 힘주다보니, 서사적 재미를 만드는 기술이 살짝 떨어지고,
장면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으려고 너무 신경쓰다 보니 텍스트가 지나치게 늘어짐.
그래서 이 녀석 소설 쓴 거 감평할 때마다, 나는 '길어', '이 묘사 왜 필요해?', '네 의도는 알겠지만 사족이야'
같은 소리를 계속 할 수밖에 없다. 그 짓거리를 몇 년째 해 오고 있는 거고.
문장 하나 하나는 참 좋은데, 그 문장이 '소설'에서는 필요가 없어질 수 있다는 거지.
그런데 내가 왜 RPG 묘사를 하기 위해서는 영화를 추천하는 거냐면...
내 생각에, RPG는 영상적 시각화를 바탕으로 자기 캐릭터를 연기하는 거라는 점에서,
오히려 소설보다는 영화를 참고할 구석이 더 많다고 생각하거든.
소설가는 이야기 전체를 어떻게 조율할지를 그리고, 그걸 위해서 불필요한 묘사를 생략함.
간결체는 소설가의 미덕이고, 소설가에게는 멋있고 그럴싸한 캐릭터 묘사보다 중요한 게 널렸어.
하지만 RPG에서 PL은 그냥 배우임. 서술권은 제한되어 있고, 통제불능의 상황에서는 'RP'만 가능하지.
동시에 ORPG의 경우에서는, 타이프 속도만 허용된다면, 분량을 위해서 묘사를 포기해야 할 일은 드물어.
소설보다 인상적인 묘사나 행동, 연출의 필요성이 더 중요해지고, 철저하게 캐릭터 중심적이야.
동시에 내면을 직접적으로 서술할 수 없으니, 실제 행동이나 묘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연출해야만 하지.
내가 보기에, 이건 소설이라기보다는 영화에 더 근접해 있음.
물론 이런 걸 하기 위해서는, 내 친구처럼 '저걸 텍스트로 풀어서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꽤 연구해야 하지만...
아마 다들 좋은 RPG를 위해서 그 정도는 하고 있을 거 같으니 말이지.
그리고 그 외의 이유도 이것저것 있긴 함.
첫 번째로, 상당수의 RPG 플레이는 비현실적이라는 점.
물론 '비현실적이면서도 리얼리티 있게 쓴' 소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사실 소설 쪽에서는, 비현실적이면서 가벼운 작품과 현실적이면서 진중한 작품의 분화가 꽤 심하다.
요즘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등에 의해서 리얼리티를 추구한 판타지 영화가 꽤나 늘어났잖아?
심지어 현실 기반 스릴러라도, 영화는 소설만큼 '치밀하지 않은' 세계를 그리는 경향이 있고,
이건 RPG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로, 접근성이 영화 쪽이 더 높다는 점.
소설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조금 슬픈 사실이기는 하지만,
고 톰 클랜시 선생님 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보다, 헐리우드 액션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이 훨씬 많다.
이건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다. 일단 소설이라는 매체 자체의 접근성은, RPG인들의 능력을 믿는다고 해도,
영화를 바탕으로 이것저것 묘사를 하려고 들면, 마스터나 다른 PL이 '아 저도 그거 봤는데, 그런 거 원하시는군요?'
하고 협조해 주기가 훨씬 편하다는 거다. 빈도수가 다르지.
그리고 당장에 찾아 읽는 데 드는 수고도, 영화 한 편과 책 한 권에는 꽤 차이가 있는 게 사실이다.
굿다운로더 캠페인 같은 거 많잖아, DVD 대여점은 도서관보다 훨씬 흔하고.
마지막으로, 액션 참고에는 영화가 더 정확하다는 점.
물론 텍스트로도 실감나는, 현실적인 액션 묘사는 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뭘 어떻게 해도 실제 영상보다 '정확할' 수는 없다.
애초에 글로 무술을 정확히 묘사하는 건 불가능하지. 어떻게 해도 생략이 있을 수밖에.
발은 어느 방향인가? 몸을 틀어 말어? 어디를 보고 있어야 해? 실제로 이거 맞으면 어떻게 되는데?
이런 류의 묘사에서, 텍스트는 절대로 영상보다 많은 정보를 담을 수가 없음. 바이트 수의 차이는 절대적이야.
소설가가 액션 묘사를 위해 소설을 쓰지는 않음.
아무리 작가가 심사숙고하고 쓴 동작 묘사라고 해도,
그 동작을 연마하기 위해서 몇 년을 수련하고, 그걸 멋있게 보여주기 위해 몇 년을 공부한
액션 배우, 스턴트맨, 무술 감독, 연출팀보다 더 많은 정성을 들일 수는 없는 노릇임.
그런 의미에서, 전투 중심의 룰을 다룬다고 할 때,
나는 개인적으로 소설보다는, 영화를 보고 거기 액션 합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구도가 어떻게 되는지, 속도감이나 파괴력 같은 걸 묘사하기 위해서 어떤 도구들을 사용하는지,
주변의 어떤 사물을 무기로 사용한다고 할 때, 어떤 식으로 묘사해야 할지...
그런 걸 분석해보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설을 포함한, 관련 텍스트 자료 역시 중요한 거지만,
시간 효율의 측면에서는 이 쪽이 월등하다 봄.
질문 있으면 해 줘. 답변은 늦어질 거 같지만...
좋은 고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