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예상되는 온갖 트롤링을 방지하기 위한 지침을 짜 봤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냐 더 필요할 거 같냐?


전에 겁스 헌밤 캠페인을 참관한 적이 있었는데, PC 탐정이 사무실 바깥에서 수상한 사람이 얼씬대는 걸 보고 대뜸 잡아다 고문하겠다고 선언했음. 마스터는 말할 것도 없고 구경하던 나조차도 당황해서 "XX는 그런 성격 아니지 않아요?" 했는데 플레이어가 하는 말 "고문하고 싶어..." 나중에야 자기가 잘못 플레이했다고 인정하더라고.


그 땐 어이가 없었는데 생각해 보자면... 초보 입장에서는 딱히 악의를 갖고 트롤링할 생각이 없어도 플레이 내에서 자기 캐릭터가 뭘 할 수 있고 뭘 해선 안 되는지 감이 없으면... 컴퓨터 게임하면서 그저 NPC들의 반응이 궁금해서 세이브해 놓고 엄한 경비병을 죽인다거나 도둑질을 한다거나 그런 마인드로 저런 선언을 할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아예 PC들의 권한과 제약 사항을 성문화해두는 게 낫겠다 싶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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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초짜가 아니야, 전문가다!

PC들은, 프리랜서 ‘모험가’가 아니라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상부의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입장입니다.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이질적인 존재와 비밀리에 싸운다는 임무의 특수성에 더해 유연한 판단력이 중시되는 현장 요원인 만큼 서식과 절차적 문제에 그렇게까지 목맬 필요까지는 없지만, 여전히 PC들은 엄격한 배경 심사와 심리 검사, 수차례에 걸친 시험을 거쳐서 뽑힌 국가 공무원입니다. 굳이 동기로 ‘충성’을 고르지 않았더라도(물론 골랐다면 특히 두드러지겠지요) 조국과 인류의 안전을 위해 영겁 저편에서 도래한 공포와 맞서 싸운다는 자부심과, 그러한 자부심을 가진 개개인들을 엮어 훈련시키고 임무와 장비를 제공하며 비전을 제공하는 기관에 대한 기본적인 수준의 충성심은 어지간해서는 누구나 갖고 있을 것입니다. 이하는 그러한 전제 하에, PC들의 권한과 그 한계에 대한 지침입니다. 추가로 각 역할 구분에 따라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가질 만한 상식과 그에 어울리는 묘사를 위한 조언도 함께 둡니다(이것은 캠페인이 지향하는 플레이 방향성에 맞춰진 것이므로, 현실의 그것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권리:

*기관은 공식적으로는 미국의 국가 안보를 위해 설립된 공공기관이고, 진짜 목적은 따로 있을망정 여전히 해당 관련 업무도 자주 수행합니다. PC들은 그러한 기관에 속한 조직원으로서 최고 수준의 훈련과 장비를 제공받으며, 임무에 관련이 있다고 인정될 경우 대외비로 분류된 정보에도 접근할 수 있습니다(물론 적의 포로가 될 경우를 대비하여 현장요원인 PC들에게는 ‘정말로 중요한’ 내부 정보는 제공되지 않으며, 현장요원들 역시 웬만해서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캐릭터 입장에서 자체적으로 추론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하고 그것이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지만 일단은 그렇습니다). 

*법적인 권한에 있어서는, 원론적으로는 임무 수행에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거의 어디든지 들어가서, 누구에게든 질문하고, 무엇이든 뒤질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미국 국토 내 모든 곳이 관할구역에 해당하며, 임무 도중이라면 공공장소에서 무기를 소지할 수 있고, 비교적 자유로이 살인할 수 있고, 영장 없는 긴급 수색과 요인에 대한 ‘일시적 보호조치’가 가능합니다. 실질적으로는 그렇게까지 하기 어렵지만, 일단 원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캐릭터들의 역할에 따라, 개인적인 역량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기관에 지원 요청이 가능합니다. 전투원 캐릭터는 타격팀을 호출할 수 있고, 조사관 캐릭터는 특정인에 대한 개인정보를 얻을 수 있고, 기술자나 학자의 경우 설비와 연구진을 요청할 수 있는 등입니다.      

의무 및 제약:

*상부의 명령과 지침에 복종해야 합니다. 때로는 캐릭터의 개인적인 신념이나 가치관, 특히 동기에 위배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캐릭터는 내심 불만스럽지만 마지못해 따를 수도 있고, 어떻게든 자기합리화를 할 수도 있고, 혹은 어느 정도 핑계거리를 마련해 놓고는 곡해해서 수행할 수도 있습니다.

*법적인 권한이 큰 만큼 그에 수반되는 책임도 큽니다. PC들이 하는 일의 특성 상 개인적인 위험은 말할 나위도 없고, 사회적 제약도 만만치 않습니다. PC들은 법적으로 보장된 최대한의 지원을 받지만 초법적인 면책권을 가진 것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법에서 정한 절차에 따라 세금으로 편성된 예산 범위 내에서 활동하는 공무원이고, 기관은 위계구조와 책임 소재로 대표되는 관료제에 입각해 움직이는 조직이라는 걸 항상 염두에 둬야 합니다. 물론 참가자들이 그 쪽이 재미있을 것 같다면 무리한 수단을 동원해도 됩니다. 그 목적의 불가피성을 설득해낼 수 있다면 상관의 묵인도 받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심증만으로 주지사 정도나 되는 작자에게 손댈 수는 없어. 공식적으로는 이 작전 승인할 수 없네. 무슨 말인지 알겠지?”). 하지만 그 경우에는 몰래 PC들끼리만 해야 하고 기관의 지원도 받지 못하거나 한정될 것입니다. 도중에 실패한다면 기관은 PC 개개인의 돌출행동으로 치부하거나 아예 관련성을 부정하겠지요.

*비공식적인 한계 역시 존재합니다. 큰 권한을 가진 국가기관이라는 특성 상 정치적 편향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불가능합니다. PC들을 적대하는 국회의원은 기관의 권한이 지나치게 강하니 견제와 감시가 필요하다면서 활동을 제약하는 법안을 만들어 통과시킬 수 있습니다. 기관에 대해 라이벌 의식을 가진 다른 정보기관이 로비를 하여 예산을 축소시킬 수도 있습니다. PC들에 대해 잘 아는 전직 기관 요원이 지금은 수상한 대기업 회장의 고문 변호사를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캠페인의 핵심 가닥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강력하지만 결국은 인간인 PC들이 냉전의 음울함 가운데서 인지를 초월한 우주적 공포에 필사적으로 항거하는 것’이지 저러한 인간 사회 특유의 제약에 손발이 묶여 고생하는 것이 아니므로, 저러한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건 추천하지 않습니다. 다만 캠페인에 현실감을 더하고 플레이 방향을 명확히 하기 위한 이야기적 제약이 필요할 때 쓰는 게 적당합니다.   

정리:

PC들은 개인적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엘리트 요원들이며, 대외적인 권한도 큽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공무원입니다. 상관을 비롯한 기관의 상위 계급자, 입법권을 가진 거물 정치가, 대형 언론사 고위 임원, 그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재계 거물, 기관에 필적하는 권한을 가진 다른 정보기관을 상대해야 할 때는 그에 걸 맞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물론 일반 경찰이나 지방 보안관, 평범한 기자 상대로는 마음껏 갑질해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