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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중인 마법소녀 세션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내게 있어 이번 게임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손에 꼽을 만한 이유 중 하나로 플레이 내내 생각할 여지가 많았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마스터와 플레이어들이 딜레마를 잘 캐치하고 제시해준 덕이다.


우선 나는 캐릭터메이킹 단계에서 설정을 자세하게 잡아두지 않았다. 내 분신 '유선아'에겐 단순히 '폭발을 좋아하는 폭탄마' 정도의 컨셉과 방향성만 잡아놓고 나머지 배경 설정이라든지는 플레이 도중 즉홍적으로 살을 붙여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말괄량이 사차원 사고뭉치가 되었어야 할 캐릭터가 너무나 상식적이고 이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채 완성되어버리고 만다. 악당 간부에게 세뇌당해 타락한다던지 하는 식으로 악역이 되어보고자 했던 세션 초반의 은근한 욕심은 선아가 아닌 다른 캐릭터가 차지하게 된다. 바로 쿠앤크-오레오 오즈였다.


법망을 피해 심판받지 않은 흉악범죄자들을 공개적으로 살해하며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던 그녀와 나는 필연적으로 맞부딫힐 수밖에 없었다. 앞서 말했듯 내 캐릭터는 폭발광이었으므로 오즈가 가져올 사회적 혼란과 앞으로 벌일 행위들에 충분히 동조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표면적인 선아의 모습은 영락없는 베테랑이자 모범적인 마법소녀의 귀감이였고 선아의 동료들 역시 오즈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첫 번째 타락의 기회는 공식적인 인터뷰 자리에서 오즈의 독단을 막겠노라 선언함과 동시에 날아가고 만다.


이 시점에서 나는 선아가 어릴 적 겪은 트럭 추돌 사고는 사실 계획범죄였고, 아버지가 형사였기 때문이었다는 설정을 추가한다. 나중에라도 선아가 흉악범에게 가족을 잃었다는 걸 깨닫고 나면 오즈에게 동조하거나- 혹은 삶의 목표를 잃고 또다른 악의 축으로 거듭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마스터도 내심 그런 쪽을 바랐던지 흔쾌히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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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째 탈선의 기회는 갑작스레 찾아왔다. 이중적인 면모를 가진 것은 오즈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녀는 대기업 회장의 영애로서 평소에는 모범적인 선도부장이자 마법소녀의 열렬한 지지자를 연기하는 한편 그녀 역시도 한 명의 마법소녀로서 정체를 숨기고 괴인 퇴치 활동으로 내면의 억눌린 충동을 해소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학교에서 어릴 적 소꿉친구를 닮은 학생이 같은 반 학생에게 성폭력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오즈는 가해자를 경찰에 구속시키는 대신 학교 운동장으로 끌고 나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죄목을 밝히고 그 자리에서 증발시켜버린다. 과거 범죄에 휘말려 친구를 잃은 경험과 소년범은 충분한 형량을 치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그녀의 뒤틀린 정의감을 증폭시킨 것이다. 그게 첫 '심판'이었다.


그러나 명분이 어쨌건 오즈가 벌이는 심판이라는 것도 결국은 어린 나이에 벌이는 살인일 뿐이었으며 당연히 스스로에게도 엄청난 부담을 가져오는 행위였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모범생, 사회에서는 대기업의 후계자, 마법소녀에겐 정신적 지주이자 후원자. 거기에 살인 마법소녀까지- 이중삼중으로 다른 삶을 사는 그녀가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건 시간문제였고, 마법소녀들의 신상을 뒷조사하다가 선아가 과거 겪은 교통사고에 자기네 기업이 연루되어 있다는 진상을 마주하게 되자 오즈는 한계에 다다르고 만다.


다음날 나는 정말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이른 아침에 갑작스레 집으로 찾아온 학교 선배로부터 '자신이 사실은 오즈였으며 여태껏 몇 명의 범죄자를 죽였고 네 과거도 내가 망친 것이나 다름없으니 나를 죽여서 모든 걸 끝내달라'는 고백을 들은 선아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선아는 어떻게 행동하지? 부모의 원수라며 당장 목을 조를까? 어떻게 우릴 속일 수 있느냐고 울부짖다가 광소하며 폭주할까? 어쩌면 사실 나도 선배 편이었다며 그녀를 다독여주지 않을까?



결국, 선아는 오즈를 용서했다. 서로가 쫓고 쫓기는 동안 아치에너미 구도를 형성하며 '죄는 반드시 심판해야만 한다'는 오즈의 이념을 논파하고자 선아는 '죄를 용서하는 방법도 있다'를 내세웠었기 때문이다. 선아가 무릎꿇고 흐느끼는 오즈를 끌어안고 '당신에게 옳은 길로 나아갈 의지가 있다면 그걸로 괜찮아요. 심판만이 유일한 해답은 아니니까요.' 라고 말해주면서 두 번째 타락의 기회도 그렇게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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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가 공식적으로 패배를 선언하고 갱생한 뒤, 네 명의 주인공들이 다시 하나되자 나는 이제 타락하길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선아는 이제 더 이상 쾌락만을 추구하는 폭탄마가 아닌, 고결한 목표를 가진 완전무결한 선역이 되었으며... 심지어 오즈와도 절친한 사이가 되어 둘이 꼭 붙어다닐 지경이 된 것이다. 그러나 마스터는 포기를 모르는 사내였다.


오즈가 학교에서 모범생이자 선도부장이었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그녀의 정체가 언론을 타고 전국에 밝혀지자 당연히 학교도 난리통이 됐고 그 소식을 떠드는 무리들 중에는 선도부장의 비공식 팬클럽도 있었는데, 최근 선도부장이 선아라는 못된 계집애와 어울리면서 오즈로 타락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난데없이 선아네 반으로 찾아가 그녀를 따로 불러낸 다음 폭행했다, 선도부장 님께 붙어먹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오해를 풀 겨를도 방법도 없이 선아는 손쓰지도 못하고 당해야만 했다.


그 날 저녁, 어디에 알리지도 못하고 맥없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던 선아는 호출을 받는다. 괴수였다.



선아가 어김없이 무너진 건물 잔해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던 중이었다. 마지막 남은 노래방에 들어서자… 누가 있었겠는가, 바로 악질 팬클럽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하러 온 마법소녀가 바로 자기네들이 짓밟던 아이인 줄도 모르고 고맙다며 환호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바깥에서부터 마스터가 달콤한 유혹을 속삭였다.


"얘네 죽여도 돼요, 아무도 모를 거거든요."


솔직히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그간 하도 마음고생을 겪어온 캐릭터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오레오 오즈조차 감화시켰던 완전한 희망에 절망을 덧칠할 기회가 다시금 찾아온 것이다. 가장 밝게 빛나는 빛이야말로 가장 찬란하게 꺼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러나... 이미 굳게 형성된 도덕성 무너뜨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치 내게 있어 한 줌 한 줌 정성쓰레 쌓아올리던 모래성 같았다고 할까. 이제 와서 탈선을 해버리면 그간 형성되어왔던 캐릭터가 전부 망가져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선아는 이미 내 분신 이상의 존재였다.


아이들을 그냥 보내주고 난 다음 나는 폭죽을 한가득 꺼내들었다. 그리고 건물 옥상으로 올라간다. 폭죽들을 일제히 점화한 뒤 하늘로 가득 쏘아올린다.

형형색색으로 어지럽게 퍼져나가는 섬광이 얼룩진 속내를 덮어주길 바라면서. 어두운 충동의 속삭임이 공기를 찢는 폭음에 묻히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