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가까이 AL 단편 마스터링만 존나게 하다가 슬슬 장편 캠페인의 재미를 느끼고 자작으로 장편 시나리오 만들어서 돌리는 중인 사람임. AL 공식 시나리오만 할 때는 보통 그 시나리오만 잘 살펴두면 되어서 세계관 설정같은 건 별로 볼 필요가 없었는데, 아무래도 자작으로 시나리오 만들려면 설정을 안 들여다 볼 수가 없잖아? 어차피 세부 설정들이야 마스터가 짜는 거고 캠페인마다 다른 거라지만 나는 그래도 베이스는 오피셜한 쪽이랑 맞춰야 위화감도 적고 세션 중에 말 나올 여지도 적을 거라 생각해서 열심히 찾았거든. 그래서 파다가 보니까 드는 생각이, '대체 여기는 인간이 무슨 수로 존재하고 있는 걸까?'



당장 주 무대라고 할 만한 페이룬 대륙만 봐도, 제대로 된 국가라고 할 만한 동네가 별로 없어. 돌아다니는 페이룬 대륙 전도를 보면 지명 표시만 있을 뿐 국경 표시는 없지. 이 얘기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고대 그리스 국가들처럼 개별 도시국가 체제에 있거나(실제로 AL쪽 주무대인 문씨 일대는 딱 이렇지) 잘 쳐봐야 중세 봉건정 정도라는 뜻인데.. 문제는 이 동네는 현실보다 인간이 살기 훨씬 팍팍한 동네라는 거. 인간보다 여러 면에서 우월한 아인종과 오만가지 끔찍한 괴물들이 판을 치는 세계니까.



이 동네에서 인간이라는 게 얼마나 페널티로 작용하는지 딱 캐릭터 처음 만들 때부터 체험할 수 있잖아. 인게임에서 종족적으로 인간이 다른 종족과 비교해서 확연히 우위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다중멀클할 때 말고는 없어. 칼질 하려면 오크가 낫고, 활질이나 마법사 하려면 엘프 하면 되고, 카리 쪽 직업은 하프엘프 미만 잡이고. 하프엘프도 인간이랑 혼혈 아니냐고 말한다면 유안티를 꺼내와도 좋아. 뭘 할 생각이든 상위호환인 다른 종족이 어쨌든 있음. 남들 다 있는 다크비전 없어서 혼자 개고생하거나 파티에 제약 걸어 본 적은 다들 있겠지?



저 아인종들이 인간에게 다 우호적인 것도 아니고, 보면 적대적인 케이스가 더 많음. 당장 설정상 인간들의 나라 중에서 가장 강했던 네서릴을 멸망시킨 것은 실질적으로 오크들이었지. 드로우들이나 듀에르가 등등 지하에서 사는 종족들도 마냥 평화롭게 지하에서만 지지고 볶는 게 아니라 만만한 인간 놈들 노예로 쓴다고 내킬 때마다 마실 나오고 원정 나오고 함. 쟤네들은 햇빛 취약 있어서 자주 나오는 걸 꺼리기라도 하지, 일리시드까지 가면.. 난 일리시드들이 대체 왜 단체로 지상으로 올라와서 인간 농장 만들고 번성하려 하지 않는 건지 잘 모르겠어. 그냥 평범한 일리시드 하나도 명백한 탈인간급 스펙의 2티어 모험자들이 단체로 다굴빵을 딱딱 맞게 잘 놔야 이길까 말까인데 작정하고 단체로 각 잡고 싸움 걸어오면 인간이 무슨 수로 이김? 괜히 지능 보너스에 자체 마법까지 타고나는 드로우들이랑 지지고 볶을 필요 없이 지상으로 올라오면 아주 허약하고 무력한 먹잇감들만 잔뜩 있는데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왜 안 올라오는 거지.



드래곤들은 주기적으로 폭주해서 걸핏하면 인간들 도시 박살내는 게 아주 연례행사고, 그걸 뭐 인간들이 어떻게 한다는 묘사도 없음. 위키 뒤지면서 인간들 도시들 설명 보면 뭐 드래곤 누가 DR 몇 년에 부쉈다 재건됨 그런 이야기는 자주 나오는데, 반대로 드래곤 누가 인간들 마을이나 도시를 공격하다 저지당했다거나 역공당해 피해를 봤다거나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못 봤고 그나마 딱 하나 본 게 워터딥은 드래곤들의 공격을 받지 않게 아티팩트를 동원해서 마법적 방어막을 치고 있다는 소리임. 수동적이지. 뭐 무슨 피를 타고 내려가는 종족 단위 저주가 걸려서 그렇다는데.. 내가 볼 때는 100년 넘게 저런 상황이 있으면 그 저주를 어떻게든 풀려고 하든지 아니면 인도미투스 성전이라도 선포해서 드래곤 대 인간으로 종족단위 전쟁이라도 하든지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하, 하긴 저러고 맨날 처맞는 게 일인데 어떻게 그게 가능할 정도로 힘이 모이겠냐만.



저렇게 어려우면 다같이 우러르는 무슨 사상같은 게 있어서 단결력이라도 좋아야지 종족의 미래가 있을 텐데 원작자 톨킨 공인 악 저항력 쓰레기 종족답게 온갖 나쁜 짓은 다 하고 돌아다니고 그 나쁜 짓 스케일도 심심하면 종족멸망이니 대륙의 위기니 가관임. 우리가 세션에서 박살내고 다니는 컬트들의 주요 구성원들은 죄다 인간이거나 인간 출신이고 숭배 대상도 안 가리며 목적도 어처구니없는 것들만 가득하지. 컬트 오브 드래곤 놈들은 도대체 드라코리치들을 양산하고 티아맷을 현실에 불러내서 얻는 게 뭘까? 인간들 싹 멸망하고 나면 자기들은 멀쩡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 뭐 그래, 이거는 원작에서도 나즈굴은 인간밖에 없으니 원작고증에도 충실하고, 시발...내가 어제 공군 부사관 자살사건 보고 나니 현실 고증이라는 것도 부정은 못하겠다. 시발.



보통 이쪽 주제 이야기는 엘민스터라던가 우리가 하는 플레이어 모험자들이라던가 하는 강자들이 존재하니까 어찌어찌 하는 거다.. 로 정리가 되더라고. 신들의 도움도 이야기하고. 게임 외적으로는 그렇게 문제가 많은 동네여야 PC들이 영웅으로서 활동하기 좋으니까 이런 식으로 배경을 짜놓는 거겠지. 뭐 좋아. 좋은데.. 난 좀 그래도 너무 심하지 않나 싶어. 뜯어봤을 때 크툴루랑 다를 게 있나? 평범한 인간은 그냥 여러 초월적 존재들 앞에서 종잇장이나 다름없는 허섭스레기인 거 똑같잖아. 아니 어찌보면 이쪽이 더 심하지. 마법은 명백히 선택받은 소수의 전유물이지만 현대 과학은 그런 느낌은 아니니까. 상황이 저 지경인데 커버가 될 것 같지도 않고.



세세하게 모를 때는 그냥 재미있게 했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까 세계관 개연성이나 핍진성도 영 안 좋아 보이고 그러다 보니까 영 몰입이 안 되더라고. 플레이어를 해도 에휴 이게 뭔 의미가 있냐 그 생각 들고, 내 캐릭터보다는 미션 주는 NPC 쪽 생각을 먼저 하게 되고.. 마스터 할 때도 음 뭐 결국 또 똑같이 자체 정리 안 되는 거 해결사들 와서 정리하고 끝인가 이렇게 보게 되고, 자작 시나리오 메이킹도 의욕이 떨어짐. 니 캠페인에서는 그런 것들을 해결하는 전개로 밀고 나가면 되지 않냐 할 텐데, 일단 나는 장기팀의 방향을 1차적으로 정하는 건 마스터가 아니라 플레이어들이라고 보는 편이기도 하고, 오피셜 분위기가 저런 이상 내가 뭘 어쩌든 그 플레이어들이 다른 팀에 가면 도로아미타불 되니까 무진장 애써서 그런 캠페인 공들여 만들 의욕도 안 난단 말이지. 너희들은 이런 생각 한 적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