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플레이하고 DM했던 공식 캠페인에 대한 이야기다. 스포일러 약간 있고 내가 잘못 봤거나 좀 왜곡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와 팀원들이 느낀걸 최대한 있는대로 전달하려고 한다. 아베르누스 라이징이라는 시나리오에 대한 이야기다.
D&D 5판에 발더스게이트 캠페인북하고 같은 시기에 아베르누스 라이징이라는 캠페인이 있다. 20개의 연속적인 단편 모음집이고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일마터의 초즌을 데리고 나인헬 1층 아베르누스에 가서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는 신 일마터가 구해오라는 사람들을 구해와야한다.
아베르누스는 나인헬 1층답게 악마들이 득시글거리고 안전하게 머무를 곳이라고는 악마 상인이 운영하는 캐러밴뿐이다. 거기서 PC들은 악마 상인의 갑질에 굽신거리고, 비위를 맞춰가며 초즌이 시키는 일들을 해야한다.
나는 운좋게도 저게 한창 나왔을때 오프라인 상시플에서 꽤 많이 플레이 할 수 있었고 중간에 현생 문제로 그만두긴 했지만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시나리오를 직접 구입해서 보게 되었고, 나중에는 이걸 팀에서 내가 DM으로 돌리게 되었다.
이 캠페인의 특징은 도망칠 곳이 없다. 지옥은 보통 사람이 대비 없이 살 수 있는 차원이 아니고 강한 악마들이 사방에서 돌아다닌다. 악마 상인의 캐러밴에서 밉보여 쫓겨나면 맘놓고 쉴 수 있는 곳도 없지만 여기가 싫다고 걸어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도 없다. 캐스터라면 레벨이 좀 높아지고나서 자력으로 탈출이 가능하긴 하겠다.암튼 도망칠데가 없다.
그러면 맡은 일을 빨리 끝내고 나가자는 생각이 들겠지만 초즌이 시키는 일은 대부분 빡센 일이다. 지옥의 비밀기지를 폭파시키고, 몸에 닿으면 지능 0이 되는 지옥의 강 밑으로 잠수를 해야하고, 끝도 없이 몰려오는 악마 무리를 상대해야하고, 아크데블의 보물을 눈 앞에서 훔쳐와야한다.
그러면 일마터의 초즌이 듣기만 해도 소름돋는 난관들을 헤쳐나가기 위해 뭔가를 준비해주는가? 시나리오 상에서는 전혀 없다. 초즌은 그저 지켜줘야하고 명령을 내리는 직장상사다. 물론 초즌은 PC들에게 무례하게 굴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예의바른 호감형으로 연기하라고 되어있지만 그렇다고 실제로 도움을 주는게 전혀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비밀기지 폭파, 잠수, 보물 훔치기와 같은 과업을 성공으로 이끌려면 PC들은 자기들 돈을 지불하던가, 소울 코인이라는 지옥의 대체통용화폐를 모아서 쓰던가, 아니면 자기 영혼을 걸고 악마와 계약을 해서 정보와 수단을 얻어내야한다. 줄만한게 없어서 정보와 수단을 얻어내지 못했다고? 그럼 밑준비 부족으로 인한 하드코어 난이도, 거기서 이어지는 실패를 맛보면 된다. 아니면 영혼을 저당잡혀가면서 얻어내던가.
나중에 내가 DM을 하면서 배운 점은 PL이 이런 문제에 생각보다 민감하게 반응한단 사실이었다. 캠페인 전부를 같이 플레이한 PL 하나는 임무 브리핑을 들을때마다 죽으러 가라는 소리냐고 불평했고, 다른 PL은 일을 그르칠때를 대비해 과도하리만치 안전장치를 많이 준비했고 일이 조금만 잘못 될 기색이 보이면 바로 임무 포기를 선언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자고 했다. PL 하나는 팀의 설정 백과사전이었는데 데블에게 잡히면 영혼까지 갈려나가니 그전에 죽겠다며 입안에 독약 앰플을 넣고 다니겠다고 선언했다.
이 캠페인은 PC들의 실수로 인한 실패를 항상 기록하도록 했다. 캠페인이 중후반에 들 무렵, 초즌은 드디어 PC들이 목숨 걸고 모아준 아티팩트들을 착용하고 PC들과 함께 나선다. 아티팩트 떡칠했다고 해도 전투력은 전혀 도움이 안되니까 기대하면 안된다. 작가는 악랄하게도 이 초즌을 지키게 하고, 적들은 초즌을 우선적으로 노리게 하고, PC들이 실수해서 초즌이 죽으면 부활은 시켜주되 죽은 횟수만큼 점점 약해지도록 만들었다. 실패가 누적되어 초즌이 완전한 무능력자가 되면 캠페인이 완전한 실패로 끝난다. 도중에 초즌을 도무지 못지키겠다 싶어서 PC들은 휴대용 구멍에 초즌을 넣어다니기 시작했다.
초즌이 이렇게 능력을 얻어도 PL들에게는 뭔가 주어지는게 없다. 초즌의 권능은 전부 스토리에서 구원해야 하는 NPC들을 위한 것이고 PL들에게 떨어지는 것은 큐어 운즈 한두개다. 그럼에도 실패할 때 주어지는 게임상의 처벌은 가혹하다. 문제가 불거지는건 캠페인의 후반부다. PC 하나가 데블에게 끌려가서 살해당하고 PL들이 격앙되어 있을때 초즌과 일마터가 한건 없었다. 오히려 그걸 지켜보고 있던 다른 신이 그 PC를 부활시켜줬다. 감동의 생환에 다들 좋아하긴 했지만 나중에 보면 일마터와 전혀 관계없는 뜬금없는 이벤트였다.
캠페인은 후반부에게 갑자기 PL과 PC에게 책임을 다시 묻기 시작한다. 이전에 실패했던 사건, 지키지 못했던 NPC, 가져오지 못한 물건 등을 정산하고 PC에게 페널티를 준다. 가장 황당한건 악마에게 정보를 얻기 위해 대체통용화폐나 영혼을 저당잡혔을 수록 막강한 페널티를 건다는 점이다. 내 몸과 영혼 바쳐가며 헌신했더니 돌아오는건 페널티뿐이란 의미다.
결말도 어딘가 찜찜한데, 이야기는 전설적인 결말로 끝나고 일마터는 그제서야 PC들에게 영생의 축복을 내려준다. 문제는 그뿐이다. 만약 영혼 저당잡힌게 있다고? 알아서 해결하러 가야한다. 초즌의 일을 대신 해주기 위해 악마와 계약을 해서 힘을 얻었다? 죽으면 그 악마한테 가야된다. 일마터의 일을 하면서 pc는 책임을 대신 져야했지만 일마터는 pc를 책임져주지 않았다.
이 아베르누스 라이징이라는 캠페인은 각 시나리오들이 흥미롭고 재미있기는 했지만 PL과 PC들에게 있어서 무척 불친절하고, 책임을 물으면서도 그 책임을 짊어지고 나아가는 것을 보답해주지는 않는 시나리오였다. 캠페인 피드백을 하면서 PL들은 만약 이 캠페인을 또 해야한다면 오늘만 사는 캐릭터를 데려와야겠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리뷰 겸 책임에 대해 두서없이 써본 뻘글이었다. 원래 하려던 이야기랑 많이 멀어졌지만, 나는 책임을 묻는 것의 정당함과 별개로 PL들은 trpg라는 취미를 통해 스트레스를 받고싶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독성 나쁘고 두서없는 글이지만 정독해줬다면 고맙다.
내용을 좀 보충했음.
재밌게 잘 읽었다
스포있대서 눈물 머금고 스크롤내렸다
거 이정도면 빡친 PC들이 일마터 조지러가는 후속 캠페인 마스터가 만들어줘야한다
열정페이
이건 AL용 시나리오를 고정팀으로 돌려서 발생한 문제임. AL인만큼 책임이라는 주제에 대한 깊이 있는 내용이 아니었음. 알다시피 AL은 특성상 공식 시나리오는 도덕적으로 갈등의 여지가 적은 선한 인물을 플레이해야함. 왜냐하면 즉석만남에서 트롤링하는 플레이어가 하도 많았으니까. 결과적으로 어떤 시나리오를 하건 퀘스트를 주는 "착한" 사장님과 그에 이끌려 모험하는 PC라는 구도 자체를 바꿀 수 없음. 후반부에 가서 과거 시나리오를 어떻게 했느냐를 가져오는건 모두의 경험을 하나로 모아서 하나의 캠페인 플레이를 한 기분을 내도록하는데 목적이 있는거지, 그 이상 깊이있는 접근은 아님. 일마터의 초즌이 너무 쎄면 PC가 일을 NPC에게 떠넘기니까 결코 해서는 안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