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링을 뭐라고 빗대어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마스터링의 과정이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먹어야 할 요리를 혼자서 준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마스터링과 세션 준비도 마찬가지다.


20면체 주사위를 필두로 하는, 소위 데이터 룰들의 마스터링은 코스 요리와 같다.

신선한 이야깃거리를 확보해두고, 세션에 사용할 지도와 소품을 전부 체크한다.

NPC와 괴물의 데이터 세팅 등 세부적인 과정이 끝나면 플레이팅으로 마무리.


이런 작업들을 제대로 하고자 한다면 적게 잡아도 2시간 이상의 준비 시간이 걸린다.

소위 밀키트라고 부를 수 있는 캠페인북도 결국엔 직접 읽어가며 요리를 해야한다.


하지만 손님들이 내가 공들여 준비한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고

마스터로 하여금 보람이 느껴질만한 모습들을 보여준다면

이런 준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제 2차 TRPG 갤러리 정모 기념 단체 사진



불행하게도 현 갤러리의 상태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세상에는 같은 식탁에 앉고 싶지 않은 인간들이 무척이나 많다.

이런 인간들에게 많은 시간을 들여서 세션을 대접한다는 것은 분명 비합리적이다.


물론 인터넷 커뮤니티는 소수의 무례한 인간들이 남들보다 배는 눈에 띄기 마련이므로

이것이 성급한 일반화 중 하나라고 지적할 TRPG 갤러리의 회원들도 분명 있겠지만


아는 사람은 전부 알고 있듯이 TRPG 구인판의 현실은 위 보다는 아래와 더 흡사할 것이다.



세션을 원하는 팀리스(Teamless)들



이런 사람들에게 수고를 들인 세션을 대접하는 것은 서로에게 괴로운 일이 될 수 있다.


기존의 룰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당장의 허기만 떼우고 싶은 이들에게,

"30년 동안 숙성된 포가튼 렐름에 건조시킨 발더스 게이트를 곁들여 드셔보십시오." 라며

각종 캠페인 설정들과 복잡한 룰을 가르치려 든다면 감동스러워할 인간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고향의 맛, 혹은 공짜의 맛



그렇기에 우리는 던전월드를 플레이할 수 있다.


복잡한 과정과 많은 준비도 필요 없다.

쉬어버린 클리셰 덩어리와 육면체 주사위 두 개를 때려박고 푹 끓이면 준비 끝.


이야기의 짜임새나 개연성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어차피 조리 과정은 전부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다.

솥단지를 빙자한 짬통으로 하는 요리에 무엇을 기대하는가?


마스터의 입장에서는 국그릇에 손가락이나 머리카락이 들어갔다고

불만을 표하는 손님이 적다는 것은 던전월드의 큰 장점으로 다가올 것이다.

또한 무례한 손님들이 억지를 부리면 무쇠 국자로 대가리를 깨는 순발력을 키울 수도 있다.


여러 타입의 손님 입장에서도 던전월드는 좋은 선택이 된다.


당장의 세션이 고픈 이들에게는 복잡한 준비 과정 없이 뜨끈한 국물로 배를 채울 수 있다.


스스로를 미식가라 칭하는 이들도 던전월드를 별미로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기대하고 있는 파인 다이닝에서 형편 없는 맛이 느껴질 때의 그 실망감과 마찬가지로

누구도 기대하고 있지 않았던 짬통에서 훌륭한 맛이 느껴진다면 그 신선함과 충격은 배가 될 것이다.


혹시 만약 그런 기회가 없더라도 문제는 전혀 없다.

이는 자신이 플레이하고 있는 다른 룰과 그것을 요리하는 마스터의 소중함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


이토록 던전월드는 사람들에게 보다 넓은 선택지를 줌으로써

RPG 내수 경제를 활발하게 형성하는데 보탬이 되고 있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이야기이다.




날씨가 서늘해지고 있다.

추운 계절이 다가오면 더더욱 그리워지는게 즉석세션 한 그릇이다.


늦은 회식을 마치고, 지친 심신을 달랠 무언가가 필요하다면

그런 당신에게 던전월드 한 그릇을 권하고 싶다.


정성스럽게 담겨진 뜨끈한 던전월드 한 그릇은 분명 당신을 실망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