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했다시피, 나는 인생 첫 TRPG를 던전월드 마스터로 시작한 생초보다. 실제 친구들이랑 플레이하고 있으며,

며칠 전에 2번째 세션을 끝냈다. 즉, 우리 팀은 전부가 무경험자인 좌충우돌 파티라 이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던전월드의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초보자 입장에서는 이것저것 생각이 많이 든다.

왜냐하면, 내 친구들은 재미있게 하더라고.


그건 우리가 초보자라서 그런 걸까? 뭐, 사실 그게 맞지 싶다. 초보자인 이상 다른 룰과 던월을 비교할 수 없을뿐더러,

애초에 내가 초보자다 보니 던월 강령을 반쯤 무시하고 진행하고 있기도 하거든.

하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우리가 던전월드를 초보자들이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는 실례가 되지 않을까 한다.


RPG를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초보자인 나는 모른다.

하지만 RPG 이전에, 무언가를 '재미있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있겠지.

거꾸로 내가 초보자기에, 턀갤의 프로들은 느끼지 못하는, '초보자들이 느끼는 재미'라는 걸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냥 이렇게, '내가 생각하는 우리 팀이 재미있게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정리해 보려 한다.



0. 애초에 기대를 별로 안 했다.(...)
반 농담조로 한 말이지만, RPG뿐만 아니라 모든 놀이를 즐길 수 있는 제 0원칙이 이거라고 난 생각한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이고, 그 실망이 중첩되면 재미를 객관적으로 느낄 수 없다.


사실, 준비가 모자라고 수고가 적으며 들인 돈이 없으면 세련미 역시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나는 던월 룰로 플레이를 한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어딘가 설렁설렁일 각오'를 하고 시작했으며,

내 친구들 역시 '그냥 개드립 치고 노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했고 말이지.


그렇게 어깨에 힘 풀고 플레이하니까, 실수 좀 해도 그냥 놀려먹을 거리 이상이 안 되더라고.

상황이 지루해져도 '지루하다'는 사실 자체가 웃음거리가 되면, 일단 당장 화가 나지는 않잖아.


물론 이건 실제 친구인 초보자들이 뭉쳐서 플레이하다 보니 일어나는 일이겠지만,

턀갤러들이 초보자들에게 뭔가를 소개해 줄 때, '숙련자의 눈으로 좋은' 것을 추구할 필요성이 없다는 걸

누군가는 말해줘야 될 것 같아서 언급했다. 초보자들은, 생각보다 눈이 낮다.



1. 플레이어 중 글쟁이가 있다.

우리 팀 플레이어 중 한 명은 나랑 같이 글 쓰는 놈으로, 내 취향 같은 걸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재미있는 서사를 성립시키기 위한 각종 수단이나 폼 잡는 법, 떡밥 까는 법,

위기 상황에서 써먹을 만한 각종 해결법 같은 걸 빠르게 생각해 낼 수 있는 역량이 있는 놈이거든.


그리고, 이런 식으로 '재미있는 해결책'을 계속해서 던져줄 수 있는 플레이어는,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와 우리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 거 같아!'라는 생각을 불러일으켜 줄 뿐더러,

마스터인 내 입장에서도 '이 녀석이라면 이걸 어떻게든 수습해 주겠지' 라는 심정으로 막 지를 여지를 준다.


물론 이 경우, 이 '기발한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돌아가버릴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녀석은 기본적으로는 이 플레이를 오래 이어가고 싶어하는지라,

의도적으로 중요 장면에서 빠지거나, 혹은 활약이 부진한 플레이어와 함께 중요작전에 뛰어들거나 해서

제 나름대로는 나 대신 스포트라이트 조절을 해 주더라고.


결국엔 게임이 재밌으려면, 잘 하는 플레이어가 적어도 한 명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마스터가 뭘 원하는지를 파악해 줄 수 있는 플레이어.



2. 여백을 적당히 줄였다.

사실 이건 던월 강령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부분이다.

우리 파티는 플레이 전에, 내가 '이 세계는 나노머신의 재앙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어쩌구저쩌구...'라며,

'나노펑크와 결합된 사이버펑크이면서 나노기술이 마법이나 신 취급을 받고 있으며 배경도시는 로아나프라 급 막장'

이라는 세계관을 짜 놓은 상태였고, 국가 설정 같은 것도 플레이어 시트에 대강 정리해 놓으라고 했거든.


뭐,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내 설덕질 욕망 때문에 룰북을 정통으로 거스른 셈이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이것 덕분에 생판 초보자였던 내 친구들은 오히려 부담을 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다짜고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이야기는 더더욱.

게다가 다른 플레이어나 마스터와 머릿속에 그리는 '세계'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경우는 더더욱 많지.

그냥 '적당히 알아듣겠거니' 하고 자세히 묘사하지 않았던 부분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르게 이해되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경우도 매우 많다.


그런 의미에서, 플레이 시작 전에 내가 원하는 세계상을 대충 설명하고,

플레이어들끼리도 '나 이런 거 엄청 하고 싶은데 가능함?'을 조율하면서, 충돌의 여지를 없앤 건,

지금 생각해보면 한 명이 고의든 아니든 트롤링을 하는 걸 막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던 거 같다.

그러니까, '자유로운 서술권'이라는 개념을, 꼭 '플레이 중에 플레이어가 내뱉는 모든 말을 수용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플레이 중에 뭔가 던져지면 '그거 괜찮을까?' '이런 건 어떠냐?' 식으로 서로간에 한 번 물어보고,

플레이 중이 아니더라도, 이런 식으로 해 보는 건 어떨까 하고 서로간에 물어보고.

플레이어 한 명이 너무 막 나간다 싶으면 마스터가 좀 강하게 나갈 수도 있는 거고,

거꾸로 플레이어가 플레이 전에 말했던 걸 마스터가 대신 말해줄 수도 있는 거고...

그냥, 그렇게 적당히 하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최소한 '내 개드립을 받아주지 않았다'는 걸 가지고 빼애액댈 사람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거든.

진짜로 꼭 설정으로 써먹고 싶은 게 있다면, 마스터와 타협을 보거나, 심지어 플레이 전에 부탁해도 되는 거라 생각.


물론, 이쯤 되니까 애들이 너무 설정을 던져주지를 않아서 난감한 감도 있다...
슬슬 설정 좀 던져달라고 부탁을 하려고. 99% 반영한다고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