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여명과 아곤


믿습니다 김사장님


나에게 초여명은 항상 믿고 살 수 있는 곳이다.
그렇다고 은검 뭐시기처럼 내 취향 아닌 걸 사진 않지만
그래도 초여명에서 펀딩한다고 하거나 새 책이 나오면
일단 지르고 본다. (11시대 마스터 스크린은 아직)

그래서 처음에 아곤을 굉장히 기다렸었다.
그리스로마신화는 워낙 한국인에게 익숙한 주제이고
어칼, 잿불, 프로키온과는 다르게
아곤은 상대적으로 볼륨이 적었기에
실제 플레이를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2. 책 읽기 모임

일리아드와 오뒷세이아

아곤의 발송이 시작될 무렵이었나.
턀갤에서 아곤 플을 모으는 사람
같이 책을 읽고 시작하자고 했었다.
나는 세 가지 이유로 그 모임에 참석하려고 했다.

첫째, 심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라그나 썰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
마스터와 다른 플레이어들이 공유하는 심상이 있는데
라그나는 꼭 자기가 원하는 심상을 거기에 그린다는 것이다.
팀원 모두가 원하는 심상을 그릴 수 있도록
같은 작품을 읽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플레이에서 대부분의 대사와 선언은
서사시의 낭송처럼 이루어졌다.

둘째, 맞지 않는 인원을 거를 수 있겠다는 것이다.
어느 누가 게임하기 전에 두꺼운 책을 읽고 싶겠는가
이것만으로도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의 진정성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셋째, 독서 경험은 남는다는 것이다.
내가 꾸준히 시간 내기가 어려웠기에
이미 모임장에게 '독서 모임은 해도 플 참석은 희박합니다.'
하고 괜찮냐고 물어봤고 모임장은 허락해주었다.
그래서 혹시나 중간에 플이 터져서도
서양 고전 읽은 경험은 어디 가지 않을 거리는 것이
내 마음을 동하게 했다.

실제로 약 두 달 가까이 다섯 명의 인원은
일리아드와 오뒷세이아를 서로 읽고 느낀 점을 나누었다.
개인적으로는 쉽게 읽을 수 없는 서사시를
다른 사람과 함께 독서모임으로 읽을 수 있어서
굉장히 값진 경험이 되었다.


3. 첫 세션

재미있는 보이스플

어쩌다보니 전체 보이스플로 진행하게 되었다.
예전에 내가 마스터를 볼 때, 나 혼자만 보이스고
나머지는 모두 텍스트로 진행한 적이 있는데
실제 목소리 까고 진행한다니 긴장이 되었다.

근데 뭐 다들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서
즐겁게 진행하게 되었고
나는 너무 긴장을 풀어버린 나머지
플레이 중에 군가를 부르게 되었다.

세이렌의 노래에 조종받는 황소와의 대결이었는데
이쪽에서도 노래를 불러서 세이렌의 노래에 대적하자-
라는 것이 작전이었다.

앞 사람이 굴림을 실패했고
나는 여기서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
마스터에게 딜을 넣었다.
당시 내 캐릭터가 아레스를 섬기는 전사였기에
'님 제가 실제로 군가 부르면 보너스 주사위 주심?'
마스터는 ok했고 나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전선을 간다'를 불렀다.

다들 빵 터지며 즐거워했고
어마어마한 보너스를 받고 굴림에 성공했다.

참고로 나는 공익이다.


4. 나의 진행 세션

내가 좋아하는 것 - Call of Duty : Odyssey
우리 팀의 분위기 - Grand Theft Auto : Odyssey

우리 팀은 고난 플레이어를 돌아가면서 맡기로 했고
두 번째 세션은 내 차례였다.
나는 아곤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고자
룰 북에 나온 그대로의 진행방식을 따라가려고 했고
그래서 그런지 나 혼자만 2연속 세션을 하게 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스토리 좋은 레일로드를 좋아해서
콜오브듀티 시리즈나 결말이 매우 적은 rpg를 선호하고
엔딩 수십개 있는 멀티 엔딩 게임을 정말 싫어한다.

그래서 아곤의 섬 설명에서 굵직한 부분들 중
몇 가지만 골라내어 루트를 만들었다.
물론 팀원들에게 다른 선택지도 있다는 뉘앙스로 말했지만
내가 준비하는 히든루트 정도만...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섬에 내리자마 팀원들이
'제 3의 선택지를 정해도 되죠?'라고 하면서
제 4, 제 9, 제 23의 선택지를 내기 시작하는데
와, 개초보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님들 안돼요 ㅠㅠ' 라고 했었어야 했나 싶은데
그때는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끌어보고자 노력했다.

다들 이렇게 마스터링 실력을 키우는가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우리 팀의 다른 분들은
굉장히 임기응변에 능하신거 보면
플레이어들의 다양한 반응에 대응 능력을 키우는 것도
마스터의 자질들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아, 그리고 나는 여러 캐릭터들이 고난을 만났을 때
어떤 영웅적인 희생? 이런 것들을 바랬는데
우리 팀은 뭐 말이 영웅이지
무력을 제공하고 보상을 두둑히 받아가는
어떤 용병(보다는 사실 강도같은 ㅋㅋ) 느낌이었다.

사실 일리아드에 비추어 보면
그 당시 영웅이나 전사들은 전리품에 환장했기 때문에
(전리품의 크기와 값어치를 자기의 명예와 연결)
어떻게 보면 적절한 고증이긴 하다.
책 읽기 모임을 통한 공통된 심상 만들기가
이래서 더 좋은 것 같다.


5. 그 후 이야기

팀과 함께 즐거워하기

그래서 나도 그 분위기에 편승하기로 했다.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걸 주장하면
그게 라그나밖에 더 되겠나 싶어서
여차하면 칼부터 뽑는 닥돌전사 컨셉으로 갔다.

초보자에게 닥돌전사가 RP하기 좋다고 생각하는데
전투 중심으로 캐릭터를 짜서 전투 뽕맛 가질 수도 있고
사회적 장면에서는 다른 사람들 하는거 잘 보면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예 손 놓고 있으면 안되겠지만.

여튼 재밌게 했다.
쌉고수들은 다른 팀원들이 활약할 기회를 적당히 주다가
막히는 부분에서 팍팍 뚫어주기도 하고
다른 팀원들은 신묘한 계책을 내거나
빵 터지는 대사와 상황을 만들어
모두들 깔깔거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직도 기억 나는게
마지막 세션에서, 영웅들의 선택으로 인해
괴물들에게 죽임 당한 섬 주민들을 저승에서 만나
영웅들이 린치를 당할 뻔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아마 예술과 언변으로 대결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이 선 넘어오면 전부 대가리 깨진다.'라고 했었다.
근데 다른 팀원들은

1) 어짜피 사는 게 고통의 연속인데 죽었으니 잘 된거 아님? 사후세계를 즐겨!
2) 니들 여기서 우리 죽였다가 나중에 우리 저승오면 그때 우릭 감당할 수 있음?

이렇게 대답했었다.
나는 진짜 사무실이 떠나가도록 웃었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6. 느낀 점


좋은 팀을 만나는 것이 최우선

나는 정말 좋은 팀을 만났다고 단언할 수 있다.
책 읽기 모임을 그렇게 꾸준히 참석해주고
플레이도 서로 분위기 맞춰가면서 잘 했다고 생각한다.
또라이 보존의 법칙에서
멤버중에 또라이가 안 보이면 니가 또라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래서 내가 또라이었나 싶지만
나는 너무 좋은 팀을 만났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 즐겁게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사람들과 하는 게임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가 정말정말 중요한 취미인데
나는 이번에 정말 사람 복을 많이 받은 것 같다.

함께 해 주신 팀원분들께 정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시간 내기가 너무 어려운 취미

사실 이번에 좀 무리하면서 플레이를 했다.
일요일 저녁 8시~10시까지였는데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으니까
그 짧은 시간 내기도 너무 어려웠다.

플레이 하기 위해 집안일은 미리 싹 해 놓고
비대면 독서모임 간다고(틀린 말은 아니다)
사무실에 홀로 앉아서 플레이 하는데
어우...

본사에서도 얼마 전에 근무 관련 감사 나와서
악숑씨는 뭘 하길래 일요일에 저렇게 나오냐고
관리자들이 갑질하거나 부당한 업무강요 하는거 아니냐고
윗사람들에게 뭐라고 했다던데
어우...

일주일에 고정적으로 4시간을 낸다는 것
다 큰 어른이 가상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

일반적으로 보면 정말로 특이하고 어렵긴 하다.
내가 그래서 실친팟도 모아보고
와이프도 끼워보고 했는데 잘 안되었다.

그래도 서로 다른 사람들의 상상과 감정이 모여서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 만큼
재미있는 놀이는 없을 것이다.

언젠가 또 재미있게 RPG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