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새드 스트롱 이즈 낫씽....
아래에 강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길래 생각나서 전에 다른 데 싼 글 갖고 와 봄ㅇㅇ
우선, 다들 알 만한 이야기 약간. 처음 TRPG라는 유희가 생겨났을 때... 그러니까 D&D 초판본이 나왔을 시기의 내러티브는 심플하기 그지 없었다. '중세 유럽 비슷하지만 마법과 괴물들이 있는 세상에서 떠돌이 무장집단이 덫과 보물, 괴물들로 가득찬 동굴이나 폐허에 들어가 괴물들을 때려 잡고 덫을 피해서 보물을 챙겨서는 마을로 돌아와 그걸 팔아 더 강한 무기와 장비를 마련하고, 더 강한 괴물과 위험한 덫과 많은 보물이 있는 동굴이나 폐허로 가고, 더욱 강한 무기와 장비를 마련하고를 반복해서는 그를 기반으로 점차 사회적 기반을 다져서는 출세하는 이야기'.
세월이 흐르면서 던전의 종류도 단순한 폐허나 동굴이 아니라 울창한 숲(행동경로가 제한되어 있고 '괴물' '함정' '보물'의 연쇄라는 면에서 본질적으로 방과 복도로 구성된 던전이랑 별 차이 없는)이나 해저 도시 등으로 다양화되었고, 한 발 더 나아가 내러티브도 정치적 암투나 도시에서의 범죄 수사, 이웃 영지 또는 국가와의 전쟁, 심지어 다른 차원으로의 여행까지 커버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D&D의 본질은 같아. 마법 아이템과 레벨이라는 명료한 측정 기준을 통한 캐릭터의 전투력 강화, 그리고 대개 전투로 해결되는 갈등 구조.
그렇게 전투 비중이 높고 뭔가 갈등이 생기면 그 중 70%는 전투로 풀 수 있다 보니(아니어도 결국 클라이막스는 전투로 해결이 되다 보니) 자연히 룰 상으로 규정되어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캐릭터를 강하게 만드는 방법에 대한 고찰이 성행했어. 이런 추세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전투 비중이 크고 룰도 전투 관련이 가장 세세하다 보니(전투는 무기마다 기본 피해량, 명중 보너스, 크리티컬 확률 등 수치가 다르고 베는 무기냐 찌르는 무기냐도 중요한 팩터가 되는데 교섭이나 조사 같은 건 걍 주사위 굴림 한 번으로 간략화해 버리는 경향도 강했고) 어느 정도는 필연적인 결과였어. 만일 마스터는 물론 플레이어도 '전투보다는 탐험과 조사에 집중하고 싶다'라는 전제에 동의했다 해도 그 쪽으로는 룰 자체가 빈약했거든.
이렇게 된 데에는 어느 정도 RPG를 하는 방식 자체에서 기인한 구조적인 문제도 있었어. 기본적으로 '세계관과 이벤트를 짜는 건 마스터의 일이고, 그 세계 내에서 캐릭터를 만들어서 이벤트를 겪어 나가는 건 플레이어의 일이다'라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당연시되고 있었거든. 이러한 전제는 현재까지도 보편적으로 여러 팀들 내에서 받아들여지고 있고.
약간 벗어나는 이야기 하나. TRPG에는 아웃 오브 캐릭터(Out of character)라는 개념이 있어. 21세기 기준으로는 약간 낡은 개념인데, 설명하자면 말 그대로 캐릭터를 움직이는 플레이어가 캐릭터 입장에서 사고하고 의사결정을 내리지 않고, 플레이어의 메타적인 지식을 활용하는 거야. 예를 들어서 마스터가 시간이 없어서 직접 시나리오를 짜지 않고 파는 상용 시나리오를 써서 플레이하고 있는데, 플레이어도 그걸 사 읽어본 적 있어서 던전의 구조와 함정의 위치, 괴물들 데이터 같은 걸 전부 꿰고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 이야기 내에서 캐릭터가 알 리가 없는 지식을 플레이어가 활용하는 걸 아웃 오브 캐릭터라고 부르면서 많은 팀에서 금기시하고 있음.
취지 자체는 나쁘지 않았어. 그런데 문제는.... 어디까지가 아웃 오브 캐릭터냐에 대한 기준이 명확하지 않았다는 거야. 위에서 든 예처럼 플레이어가 던전 구조 같은 걸 죄다 알고 있는 경우. 이 경우는 확실한 아웃 오브 캐릭터가 맞지. 그런데 '레벨'이 어쩌고 '능력치'가 저쩌고 이 마법검에 붙은 보너스 수치가 얼마고.... 이러한 룰적인 지식도 따지고 보면 아웃 오브 캐릭터란 말이야. 그 세상 내의 사람들이 '나는 10레벨이다' '헐 난 6렙 밖에 안 되는데'라고 말하고 다닐 리는 없으니까.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왔을 거 같아?
정답:플레이어들은 던전의 구조나 몬스터 데이터 같은 것에 대해선 입을 다무는 대신, 자신들에게 주어진 룰북을 샅샅이 읽어서 어떤 상황에서도 우수한 전투력을 낼 수 있는, 최적화된 강한 캐릭터를 만드는데 집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플레이어들끼리도 은근히 "너 능력치 분배가 왜 이렇게 효율이 나쁘냐" "이번 던전은 빡셀 거라고 마스터가 계속 밑밥 깔았는데 이렇게 만들어서 남들 발목 잡으면 안 되지" "내 캐릭터랑 니 캐릭터가 맞장뜨면 내 캐릭터가 이김" "뭐 병시나 전면 승부를 할 경우엔 그렇겠지만 내 캐릭터가 미쳤다고 정면으로 싸우냐? 숨어서 독 바른 단도로 기습하고 도망치지" "우매한 것들 내 마법사 캐릭터 앞에 무릎을 꿇어라" 하기 시작했고
이런 상황이 된 데에는 근본적으로 '세계와 이벤트를 준비하고 캐릭터들에게 퀘스트를 주는 건 마스터 일, 캐릭터를 움직여 그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건 플레이어의 일'이라는... 앞에서 말한 전제가 암묵적으로 당연시되고 있었기 때문이야. 이러한 추세는 여러가지 폐해를 낳았어.
폐해 1)캐릭터의 강화를 스토리 내에서 정당화하기 위해서(너무 노골적이면 마스터가 싫어하므로),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있기가 힘든 기연이나 괴이한 인생역정을 캐릭터의 백스토리에 엮어넣기 시작했습니다. 고위 귀족 출신이라 가문의 권력이 빠방해서 좀 불법적인 짓을 해도 잘 잡히지가 않고(그렇게 잘난 고위 귀족이 왜 목숨걸고 모험가 짓을 하는데) 자기 레어에 쳐들어온 패기에 감동한 뒷산 드래곤한테 마법검을 공짜로 선물 받았고(뭐 임마?) 유력 교단에서 섬기는 신에게 축복을 받아서 그 신을 섬기는 모든 사제와 신도들이 자기 캐릭터가 한 마디만 하면 "아멘!" 하고(뭐 임마?2).... 등등. 자연스레 캐릭터의 성격이나 개성 같은 요소는 그저 스펙을 정당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핑계 정도 수준으로 전락하고 캐릭터는 그냥 모든 능력치가 맥스를 찍은 데이터 뭉치가 되 버리는 길이 열림.
폐해 2)그렇게까지 빡빡하게 룰북을 파서 최적화를 하기엔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하거나, 전투에 별로 관심이 없는 플레이어가 소외되기 시작했어.
폐해 3)위에서도 한 이야기. 던전 구조나 몬스터 데이터 같은 지식만이 아니라 이러한 최적화 역시도 일종의 아웃 오브 캐릭터 아닌가?
폐해 4)이렇게 캐릭터의 강화에 집착하는 건 퀘스트를 더 잘 깨는 것과 직결되는데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캐릭터 입장에서 보기엔 퀘스트 자체가 불합리하거나 별로 내키지 않을 수도 있었어. 하지만 퀘스트를 뛰지 않으면 이야기가 막혀 버리고, 거기서 게임오버. 어쩌라고 씨풋!!!!!!!!!!!!!!!!!!(이를 막기 위해 어떻게든 마스터는 우회 루트를 통해 캐릭터들이 퀘스트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예비 계획을 여러 개 세워두기 시작했어. 이 과정을 그럴싸하고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하는 게 마스터의 중요한 역량 중 하나로 취급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마스터의 노동량이 폭증했음. 플레이어들과 마스터의 불화를 유발하기도 했는데 이건 다른 이야기)
폐해 5)개인적으로는 가장 큰 폐해라고 생각하는 거. 아무리 플레이어들이 가능한 모든 자원을 100% 끌어내고 룰들의 시너지 효과와 유권해석(...)을 동원해 캐릭터의 전투력을 120%까지 끌어 올려도 어차피 시나리오를 짜고 난이도를 결정하는 건 마스터란 말이야. 마스터는 하려고만 하면, 1레벨 파티 앞에 '이야기 내적으로는 아무런 모순도 없이' 그레이트 웜 레드 드래곤을 꺼낼 수 있어. 결과적으로 플레이 전체가 플레이어들은 최대한 이야기 내적으로 그럴싸한 핑계를 대 가면서 캐릭터를 극한까지 강화하고, 마스터 역시 최대한 이야기 내적으로 그럴싸한 핑계를 대 가면서 그런 캐릭터들을 압도하는 초강력 npc와 고난이도 이벤트를 꺼내 대응하기 시작했어. 이런 식으로 플레이어들과 마스터 간의 룰을 이용한 군비경쟁(궁극적으로는 마스터가 이길 수밖에 없지만, 최종적으로는 양 쪽 다 감정만 상하게 되는)을 촉발하게 됐어.
경험적으로 이런 양상이 극대화되다 보면 시나리오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더라고.
1)플레이어들은 플레이어들대로 전투 비중이 큰 룰에선 전투력이 강한 캐릭터를 만들어야 활약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인식+가장 옵션이 많은 전투 관련 룰을 조합해 이론 상 최대한 강한 캐릭터를 만든다는 것 자체에 대한 무의미한 도전의식+서로에 대한 경쟁심리+교섭이나 조사에 관한 룰은 빈약하고 마스터의 임의적인 재량에 맡기는 부분이 많으니, 수치적으로 보장된 캐릭터의 전투력만이 심리적으로 기댈 수 있는 기반이 됨
2-1)마스터는 마스터대로 온갖 핑계와 합리화를 통해 전투 괴물이 되어 가는 캐릭터들을 통제하고 자기 의도대로 시나리오를 이끌어가기 위해 그걸 능가하는 스펙을 갖춘(그리고 대개 PC들에게 고압적이거나 적대적인) NPC들을 투입해서 그걸 찍어 누르려고 함
2-2)캐릭터들이 퀘스트를 마치고 보상을 얻으려면 당연히 난관을 제시해야 하는데, 이 난관을 만드는 것 자체도 마스터다 보니 이 역시도 캐릭터들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오남용되는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
3)캐릭터와 이야기는 이 와중에서 실종되고, 플레이 자체가 플레이어들과 마스터 간의 룰을 무기로 삼은 정당화 배틀이 됨. 이게 당연시되어 가며 플레이어들은 룰에 대한 온갖 유권해석과 이야기 내적 합리화를 통해 이 마스터가 얼마나 깐깐한지 간을 보고, 마스터 역시 한 발 앞서서 막강한 NPC와 고난이도 퀘스트를 제시해서 플레이어들을 길들이려고 하게 됨. 결국 가장 독하게 룰을 파고들어 최적화하고 그럴싸하게 합리화를 성공한 측이 ‘승리’함(앞서 말했다시피 이건 마스터의 승률이 절대적으로 높음. 기본적으로 마스터는 캐릭터들의 수치가 적힌 시트를 전부 볼 수 있고 캐릭터들의 능력을 지나치게 강화할 만한 옵션 룰들은 아예 안 쓴다고 금지해 버릴 수도 있으므로).
4)이러한 정당화 배틀에서 대개 마스터가 승리함. 하지만 이미 플레이어들은 감정이 나빠졌고 마스터 역시도 애초에 짠 시나리오를 잘 써먹지 못했으니 찜찜함. 남은 자리마다 폐허다......
이 과정을 거친 끝에 결국 'TRPG는 룰 잘 알고 말빨 센 놈이 이긴다'는 식의 인식을 갖게 되고 TRPG 자체에 흥미를 잃어 버리게 되는 사람도 많이 봤다.
흠... 그러면 OOC적인 지식을 대놓고 쓸 수 있는 로그호라같은 룰은 원작 설정이 그런것도 있지만, 저런 군비경쟁을 덜하는 예상 외의 효과가 있을 수도 있으려나?
꽤 옛날 문제 아니냐?
결국엔 전투만 주요컨텐츠가 되는걸 어느정도 방지해야한다는거임?
ㄴ딱 온라인게임이 가는 길이네. 그렇게 보면....
그냥 딜딸을 치지 말라는 소리임
민맥싱이랑도 상통하는 문제
좋은 글 잘 봤다. 졸라 읽었고.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은데 따로 글을 써서 표현할게.
민맥싱 자체가 강화뻥튀기질 아니냐 솔직히...
114.207.*.*/옛날 문제 마즘ㅇㅇ 하지만 지금도 어느 정도 그런 경향성은 남아 있는 듯함. 아래 글 보고 걍 생각나서 딴 데 쌌던 글 긁어 온 거라.
hastat../전투가 주요 컨텐츠인 거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봄. 나도 본문에선 저렇게 써놨지만 D&D할 때면 돈법사 포럼 뒤져서 강하다고 추천되는 클래스 골라 잡아 캐릭터 만들거든(예전처럼 빡세게 빌드질하진 않지만 그건 걍 빌드질 자체가 피곤해져서 그렇고). 다만... 그런 경향성 자체가 '플레이어들이 만든 캐릭터'VS'마스터가 만든 몬스터 및 적대환경'이라는 구도로 흐르기 쉽고 그런 구도 하에선 플레이어와 마스터 간의 대립 및 감정적 갈등을 조장하기 쉽다는 거지.
아래에 덧글달고 왔더니 더 잘 써놨구만... 너무하다, 고닉...
ㄴ뭐 왜 뭐ㅇ0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