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된 이야기임, 나랑 친구 셋이 TRPG를 하기로 결정하고 넷이서 모여서 게임을 시작함.


한 명은 DM이고, 나머지 셋이 플레이어였는데 처음부터 약간 꼬임, 왜냐면 일단 우리 셋이 한 팀으로 모험을 해야 하는데 서로가 선택한 성향도 다른 데다 무엇보다 탱커가 없었거든.


한 놈은 마법사, 한 놈은 사제, 나는 하프엘프 레인저였지. 우리 세팅을 본 DM은 그래도 누군가는 파이터든 뭐든 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진지하게 물었지만 우리 중 누구도 양보를 하지 않았어.



결국 DM은 게임을 시작시켰지, 우리는 그래도 꽤 문제 없이 모험을 했어, 특히 사제의 활약이 돋보였지, 이놈은 악 성향 사제였는데 정말 베테랑이었어, 농담이 아니라 사제를 잡은 플레이어 본인이 경험이 많았거든.


이 사제놈이 설정상 순결서약을 하긴 했는데 위저드의 캐릭터도 여자고 내 캐릭터 여자고 우리 일행에서 사제 혼자 남자였는데 이 캐릭터가 설정상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걸 지적한 마스터에게 맹세를 어기는 것도 악 성향에 맞는 일이라고 주장했고, 그 말에 미친 듯이 웃은 마스터는 사제가 마음대로 여자들을 건드리고 다니게 용인했었음. 다만 우리 둘을 건드리지는 않았는데 어찌되었든 캐릭터가 여자라도 눈앞에 보이는 우리 둘은 남자인 데다 모험 동료를 성적으로 건드린다는 건 좀 감정적으로 찝찝하긴 했는지 마을에 가서는 여자들을 추행하고 다니는 주제에 우리 둘을 엿본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음.


나는 파티에서 원거리 사격을 담당하기는 했는데 내 돈은 언제나 마법화살과 은화살을 어디서 구해오느라고 소모되고, 우리 파티는 이상하게도 내가 쓸 법한 무기나 방어구를 손에 넣지 못했어. 사제와 마법사는 각자 온갖 마법이 떡칠된 철퇴와 마법지팡이, 갑옷, 단검 등을 가졌는데 나만 빌어먹을 화살을 비롯한 소모품을 빼고는 초기 아이템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고, 나는 내 친구인 DM에게 따졌지만 자신도 주사위를 굴려서 보상을 결정하는 거라서 내가 운이 없을 뿐이라고 했어. 내가 뭐라고 할 말이 있었을까? 그냥 입 닥치고 플레이했지, 아무튼 간에 우리는 친구였고 이런 게임으로 우정이 파괴되는 걸 원치는 않았거든.


뭐, DM도 미안하기는 했는지 내게 이런저런 방식으로 판정을 후하게 주더라. 덕분에 나는 우리 파티가 히드라를 두들겨패는 동안 단 1HP도 잃지 않았어, 히드라가 내가 활을 쏴대는 동안 사제와 마법사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었거든. 어쨌든 간에 히드라를 때려잡고 나서야 나는 처음으로 활 다운 활을 구할 수 있었지, 기분이 좋아진 나는 히드라랑 한바탕 붙은 숲을 나와서 소모한 화살을 재보급하고 마을에 가서 조금 쉬자고 제안했어, 마법사는 적극 찬성, 사제도 반대하지는 않겠지만 자기는 숲에허 할 일이 있다고 선언했어, 우리는 그게 뭔지는 몰라도, 그 사제가 악 성향일지언정 아직 우리가 뭉쳐서 모험을 하는 이유가 달성되지도 않았는데 우리 뒤통수에 칼침을 놓을 음모를 꾸미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했어, 무엇보다 마법사가 무리를 많이 한 탓에 재정비가 시급했고, 나 역시 피로를 적잖게 느끼는 데다 활은 손에 넣었지만 화살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거든. 평소에 쓰던 마법 화살은 3발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일반 화살은 16발 정도가 남아 있었지, 결국 우리들은 잠깐 갈라졌다가 숲 인근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어.


그런데 문제는 빌어먹게도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거야, 게다가 다수의 적이 우리를 추적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지, 빌어먹을.


그 적이 누구인지는 짐작가는 게 너무 많았어, 우리는 파티를 맺은 동안 우호관계도 많이 맺었지만 그 반대급부로 적도 많이 만들었거든.


마법사와 나는 불침번을 섰어, 사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서로를 마음속 깊이 믿지는 않았지만, 일단 우리는 고용되어 이득으로 뭉친 관계인지라 그 이득을 믿고 있었지, 언제나 의뭉스럽게 굴던 사제놈은 여기 없고, 마법사는 선 성향인 데다 내가 없으면 솔직히 그렇게 실력이 뛰어나다고만은 못할 본인 혼자서만 살아남아야 했고 무엇보다 내 뒤통수를 쳐서 얻을 게 눈곱만큼도 없었어, 마법 아이템이라고 해 봤자 내 활과 화살 정도였고 본인은 쓰지도 못하는 거였지, 지갑을 털어봤자 몇 푼 있지도 않았어.


반대로 마법사는 중립 성향인 나를 조금은 의심했던 모양이야, 하지만 나는 막말로 화살받이가 하나라도 더 있으면 낫다는 판단하에 우리는 서로를 배신하지 않고 기억에 없는 어느 황량한 황무지로 접어들었지, DM 그놈이 뭔가 수작질을 부렸을 거야. 굳이 날이 저물고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고 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마을이나 숲은 보이지도 않고, 어둠 속에 떨어진 우리 둘은 초긴장 상태로 주변을 수색하다가 딱 봐도 수상한 큼지막한 동굴을 발견했지, 우리 둘은 들어가느냐 마느냐를 놓고 강력하게 분쟁했어, 마법사는 저 안에 뭔가가 있을 거라고 확신하듯 말했고, 또 돈을 잔뜩 썼는데도 얻은 게 별로 없으니 여기를 털어서라도 돈을 구하자고 주장했어. 나는 반대했지, 내가 제일 먼저 지적한 부분으로 그놈에게 주문이 5개밖에 안 남아 있고, 충전하려면 하루 이상이 지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나도 무장 상태가 영 빈약하다는 것을 들었지, 최소한 사제가 동행하거나 하루를 버텨 주문이 충전된 뒤에 들어간다면 찬성했겠지만 정체불명의 집단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한가하게 동굴이나 뒤지는 데에는 반대했어, 무엇보다 동굴은 그리 크지 않아 보였고, 다른 출구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아서 입구가 막히면 우리 둘은 그 안에서 굶어뒤질 지경이었거든.


위저드는 그러나 내 말을 안 쳐듣고 혼자 들어갔고, 나는 쌍욕을 하면서 입구에 서 있었음, 일단 보이는 데까지 진행하면서 문제가 생기면 활을 쏴서 지원해줄 생각이었지, 입구도 경계하고.


아니나 다를까 그놈이 좀 깊이 들어가기 무섭게 스켈레톤들이 덮쳐들기 시작했음, 그놈은 곧장 벼락과 불덩어리를 쏴서 그놈들을 조졌지, 나 역시 활을 쏴서 그놈을 지원해주고 있었는데, 우리를 추적해오던 적들이 모습을 드러냈음.


결국 나는 입구에서 그놈들과 싸워야 했고, 대부분을 쳐죽이기는 했지만 나머지 몇이 나를 때려눕혀 제압했음, 난 캐릭터 시트를 찢을 준비를 하고 있었지, 부활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던 데다 설령 그걸 쓸 수 있다고 해도 가난한 우리 파티로써는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거든.


그런데 DM이 놈들이 날 죽이지 않고 포박한 다음 옷을 벗긴다고 선언함. 말했지만 나는 하프엘프, 그것도 여성 하프엘프였던 데다 내 매력 수치가 꽤 높은 편이었거든, 그래서 DM은 저놈들이 나를 죽이기 전에 꽤 오래 쌓여 있던 성욕을 해소하겠다고 결정했다고 내게 말해줌, 내 캐릭터는 발버둥쳐가면서 시간을 끌었지, 별로 희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놈들은 어쨌든 내 입에 재갈을 물리고 내 팔다리를 묶어버리는 데까지 성공했음. 어쨌든 이것도 마스터가 내 캐릭터가 너무 허망하게 죽어버리지 않도록 핑계를 대면서 시간을 끌어서 기회를 더 주고 있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 어쨌든 마스터는 기회를 주긴 했음, 다만 죄다 펌블이 났을 뿐.


그때 위저드가 매직 미사일을 쏴서 안으로 들어오던 놈 하나를 날려버림. 문제는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게 위저드의 마지막 공격 주문이었음, 다른 2개는 각각 주문 이름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강화 주문과 방어 주문이었거든. 게다가 위저드를 노리는 해골바가지들이 아직 한무더기 남아 있었음.


그리고 나는 위저드가 자기한테 그 두 개의 주문을 쓴다고 선언하는 걸 들었음, 그리고 위저드는 자기 마법책으로 스켈레톤의 해골을 깨버렸지.


다른 거 없이 마법책만 휘둘러 대면서 위저드 혼자 자기에게 덤비는 언데드들을 괴멸시켰음, 심지어 계속해서 다이스가 높게 뜨는 바람에 위저드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자기에게 덤비던 언데드들을 몰살시키고, 그대로 달려나와서 동굴 입구 근처에서 막 내 캐릭터의 가랑이 사이에 제 물건을 들이밀면서 처녀막을 가져가려고 하던 놈의 대가리를 마법책으로 후려침.


DM은 미친 듯이 웃어대면서 계속 주사위를 굴리고, 위저드는 하드커버 마법책 하나만 가지고 날 돌려먹으려던 놈들에게 전부 두개골 골절을 선사해줬음.


그리고 그 썩을놈은 내 손목과 발목 중 하나를 풀어주지도 않고 바로 휴식을 선언하고 맨바닥에 드러누워서 쳐 자기 시작함. 그 새끼는 8시간 뒤 깨어나서 메모라이즈를 마치고 동굴을 마저 수색한 다음 발가벗겨진 내가 밧줄에 묶인 채 재갈이 물려진 상태로 시체들 사이에서 꿈틀대는 걸 목격할 때까지 나를 풀어주지 않았음, 마법책 무쌍에 본인, 심지어 평소라면 나를 안 풀어줬다는 걸 상기시켜줬을 DM까지 내 캐릭터의 존재를 까먹은 거임. 뭐 거기에서 우리가 쓸만한 괜찮은 마법 아이템이 여럿 나와서 나와 내 캐릭터의 화는 빠르게 풀렸음. 일단 거기서 나온 마법 아이템 셋 중 둘이 내 거가 됐고, 나는 처음으로 변변한 방어구와 보조무기를 갖출 수 있었거든. 무엇보다 우리가 나누고도 남아도는 대량의 GP가 나왔다는 게 기뻤음.


상황이 끝난 뒤에 사제를 다시 만났음, 그놈은 이상하게도 만족스러워 보였고 여러 물건들을 가지고 있었지, 위저드가 그가 가지고 있는 장검이 히드라를 숲에서 때려잡기 전 우연히 접촉한 드라이어드의 물건이라는 걸 눈치채고 출처를 물었음. 사제는 드라이어드가 히드라를 잡아준 것에 대한 감사표시로 줬다고 주장했지만 뭔가 수상했음, 하지만 하루 전까지만 해도 문자 그대로 며칠 정도 강간당한 다음 끔찍하게 살해당할 뻔한 내 캐릭터는 우리를 죽이라는 의뢰를 받고 자기를 강간하려 한 그 도적떼의 배후에 사제가 있는 것만 아니라면 사제가 뭔 짓을 했든 신경쓰고 싶지 않을 만큼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었고, 위저드는 악 성향의 사제가 그걸 정당한 방법으로 얻지 않았다고 의심했지만 결국 내 캐릭터가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신경쓰고 싶지 않다는 의사표시를 온몸으로 해대는 걸 보고 사제와 말싸움을 하지는 않기로 결정했음. 아마 내가 적극 위저드를 지지해줬으면 분명 더 추궁했겠지. 아무튼 사제는 우리가 겪은 일을 듣고는 굉장히 화를 냈음.


그 도적떼의 배후에 있던, 우리가 그의 불법 노예 거래소를 털어버리는 바람에 우리에게 원한을 품었던 부패한 영주를 잡았을 때 우리가 보물고를 약탈하는 동안 사제는 그의 아내와 딸들을 영주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들에게 던져버리고 그와 그의 아들에게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게 한 다음 문을 다 잠가버리고 그 구획 전체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러버렸음. 생존자는 없었지.


그 일 이후 숲을 다시 지날 일이 있었는데 그제서야 나는 그 사제가 내가 강간당하기 직전의 상황에 놓여 있던 동안 숲의 드라이어드랑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음, 그놈이 그만큼 빡쳤던 이유는 자기가 떡치는 동안 자기 동료가 강간당할 뻔했다는 것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된 나는 사제를 잠깐이라도 의심했던 것에 대해서 미안한 감정을 느끼기는 개뿔이.... 사제가 자리를 비운 게 히드라랑 싸우기 전에 잠깐 만났던 드라이어드를 어떻게든 자빠트리려고 남은 거였다는 걸 뒤늦게 알고는 경멸의 시선을 안 보낼 수가 없더라. 그놈만 있었으면 애초에 내 옷이 벗겨질 일도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