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비단 사랑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지 취미건 일이건 그 길로 자신을 처음 끌어들인 사람들은 유난히 기억에 오래 남는다.
좋은 기억이건 나쁜 기억이건. 연이 끊겼건 아직 이어져있건. 갑작스레 추억의 저 편에서 튀어나와 사람을 감상에 빠트리고는 한다.
나를 TRPG로 끌어들인 사람이면서, 나의 첫 GM 또한 만나지 못한지 거의 몇년이 되어감에도 종종 기억 속에서 떠오르곤 하는 사람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처음으로 TRPG를 알려주고 세션을 떠먹여준 사람은 아니긴 하지만, 이 취미를 아직 잡고 있게 만들고 사실상 처음으로 제대로 된 세션을 돌려준 사람이니 첫 GM이라고 하자.
상당히 특이한 사람이었다. 기인, 괴짜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그런 사람말이다.
중2병 걸린 씹덕 같으면서도 나름의 통찰과 생각이 확고했고, 아무런 생각이 없어보이면서도 대화해보면 많은걸 아는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하면서 상당히 많은 이야깃거리들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오늘 하려는 것은 그 GM보다는 그와 함께한 어느 세션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다.
요 며칠 턀갤에서 언급 되었던 '강제 진행'에 대한 이야기를 보다 떠오른 추억이다.
그는 '강제 진행', '레일링'을 상당히 싫어하는 GM이었다. 어느 정도 타협은 할 줄 알았지만, 그런 식의 진행을 할 때면 어딘가 아쉬운 티를 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플레이어든 마스터든 자신이 직접 서사를 진행해야 즐겁다, 'TRPG는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게임'이 그가 항상 내뱉는 지론들이었다.
그 때는 그것을 평범하게 RP에 집중하는 세션이라 생각했다. 아니면 흔한 작품병 초기 증상이거나.
그럴 때마다 그는 표정을 미묘하게 일그러트리며 "그거보다는 그..."하며 말을 얼버무리고는 했다.
그는 플레이어가 이야기의 주도권을 상당히 갖길 바라는 마스터였다. 덕분에 그의 세션에서는 종종 곤란한 일이 벌어지고는 했다.
가장 흔한 것이 한창 사건이 전개되는 와중, 플레이어들이 GM에게 무언가 새로운 사건이나 단서가 주어지길 기대하며 마스터를 바라볼 때였다.
그 GM은 그럴 때마다 역으로 플레이어에게 어떻게 사건을 일으킬 지 묻거나, 명확한 길 대신 플레이어가 가공해야할 다른 소재를 던졌다. 지금 생각하면 악몽 같은 '양가놈 식 진행'에 가까웠을지도.
그런 플레이어에게 주도권을 쥐어주는, 어찌보면 GM의 일을 떠넘기는 듯한 스타일 탓에 항상 호불호가 극히 갈리는 마스터였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좋아했지만.
그런 마스터였지만, 그도 종종 레일링을 하듯 플레이어에게 크게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주로 그런 주도권을 갖는 것에 익숙치 않은 플레이어들과 세션을 할 때였다.
그럴 때면 그는 플레이어에게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바꿀 서술권이나 행동권을 주는 대신, 어딘지 아쉬운 표정으로 평탄한 진행을 하고는 했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이야기도 그러한 세션 중 하나였다. 새롭게 팀에 들어온 사람과 어쩌다 하게된 장편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새로 온 플레이어가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흔히 말하는 몰입형 플레이어로, RP를 괜찮게 하며서도 전력으로 세션에 몰입해서 즐기는 타입이었다.
다만, 그 플레이어는 무난한 해피 엔딩을 선호하는 쪽이었고, 그 마스터는 평탄하게 GM이 해피 엔딩을 내주는 것을 극히 싫어했기에 문제였지.
그 장편 세션에 대한 이야기를 일일히 하기엔 점심시간이 다 지나버릴 것 같으니 생략하겠다. 대충 흔한 판타지 배경의 왕도물 스토리, 마왕을 쓰러트리는 이야기였다고 하자.
대략 1년 정도의 시간을 거쳐, 슬슬 최종전에 돌입할 쯤이었다. 이 때 우리는 상당히 지쳐있었다. 새로 온 플레이어는 마스터가 내주는 어딘지 아쉬운 해피 엔딩ㅡ모두가 구원 받지는 못했지만, 당신의 행동은 의미 있었습니다ㅡ에 충분히 만족하지 못했고, 마스터는 눈 딱 감고 그런 해피 엔딩을 내야한다는 사실에 상당히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나? 그 둘 사이에서 둘 다 서서히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떻게든 잘해보려는 둘의 노력에 별다른 말을 하지도 못하고 바라보고 있었지.
솔직히, 둘 모두 노력하면서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그냥 터트리자고 말을 꺼낼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고, 지금도 나는 그러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먼저 타협에 성공한 것은 GM 쪽이었다.
드디어 흑막 직전의 보스와 조우했을 때, 공중요새가 떠오르는 웅장한 연출과 함께 여태 도와온 NPC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며 뽕을 느낌과 동시에, 나는 그가 여기서 평범한 소년만화 전개를 해줄 것이라고 깨달았다. 종종 세션을 하다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앞으로 GM이 뭘 준비했고, 어떻게 레일이 이어질지 깨달아 버리는.
이미 몇년간 그 GM과 같이 세션을 해봐서였을까, 복잡한 감정이었다. 내가 그의 세션에서 느꼈던 매력은 단순히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었기에.
그렇게, 그래도 이 세션은 무난히 마치겠다고 생각하면서 마음 한켠의 어딘지 모를 아쉬움을 치우고 뽕에 몸을 맡기려는 찰나.
플레이어 또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마스터가 준비했을 '여지껏 쌓아온 인연의 NPC들과 함께 최종전'이라는 전개를 거절하며, 그는 다른 전개를 제안했다.
여지껏 세션을 하며 나온 떡밥과 전개들을 꺼내들며, 이렇게 되었더라면 지금 이곳에서 자신이 이를 역이용하여 공중요새를 탈취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제안이었다.
솔직히, 조금 비약과 설정의 과대 해석이 들어가야만 가능한 전개였다. 전개의 완성도적 측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구렸을지도 모르는 전개였다. 그렇지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전개기도 했다.
그것을 듣고 마스터는 침묵했다.
그러나 이내, 미소를 짓고는.
"해볼만 하네요. 판정해보죠."
결과는 성공.
아군들의 도움을 받아 라스트 보스 직전의 적을 가볍게 쓰러트리고 풀 컨디션으로 파이널 배틀에 돌입하는 대신, 우리는 모든 자원을 퍼부으며 적을 쓰러트렸다.
깔끔하고 좋은 전개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최고의 뽕이 있었다. 단순히 세션의 내용이 재미있어서가 아니었다. 이 팀이 1년간 겪은 일들이 있었기에, 그 순간은 최고가 될 수 있었다. 1년 간 엇박자이던 우리가 마침내 합을 맞추는 그 쾌감이.
우리는 단순한게 이야기를 함께 만드는게 아닌, '이야기를 함께 만드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세션이 끝나고, 우리는 여운에 잠겼다. 가볍게 피드백을 나누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 때 그 플레이어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스토리 내내 좆같았던 새끼를 내 손으로 완벽히 조지지 않으면 해피 엔딩이 아닐 것 같았어."
그 대답에 서로 미친듯이 웃었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다.
이후로는 평범한 이야기다.
얼마 되지 않아 그 플레이어와 마스터는 현실의 사정에 휘말려 조용히 이 판을 떠났다. 마지막까지 서로 웃으면서 우리의 팀은 사라졌다.
이후로도 가끔 연락을 주고 받기는 했지만, 나 또한 바빠지며 그 빈도는 점점 뜸해졌고, 이제는 연락이 끊긴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종종 그 팀을, 그 세션을 떠올릴 때면 미소가 나온다.
지금도 그 순간의 카타리시스와 세션을 하며 함성을 내지르던 순간. 그리고 그 순간 느꼈던 것은 아직도 선명히 내 속에 남아있으니까.
TRPG는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게임이라는 것이.
추
대답 걸작이네 저게 맞지 ㅋㅋㅋㅋ ㅈ같은 새끼 못조지면 그게 해피앤딩이냐
탈갤의 보배인 데스
좋은글엔 추천이지 레일의 설계와 서로의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가는건 충분히 동시 진행 가능한 이야기인데 아무튼 GM들이 충분히 납득가능한 굴림 부여해 성공시 레일의 이탈을 조금 더 여유있게 즐겼으면 싶다 GM의 세계를 탐구하는 세션도 즐겁지만, 서로에 세계가 만나서 확장되는 즐거움도 상당하니까
필력 좋아서 더 잘읽었다
글 잘쓰네
나도 내 첫 TRPG 던전월드랑 첫 캐릭터 순진한 사제 웨슬리를 기억하고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