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은 적절한 대체)




나는 긍지높고 의리가 있지만 신비로운 과거를 감춘 섀도우 일족의 일원으로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용병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펜싱, 함정 해제, 캠핑 스킬 등을 익힌 나는 파티의 척후를 담당했고 최근에는 동물을 사역하여 노래를 부르도록 하거나 함께 싸우도록 다루는 기술도 갖추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불꽃과 모루의 신을 모시는 드워프 성기사, 그래플링으로 사람을 찢는 메이드 로봇, 태생적으로 물에서 호흡이 가능한 엘프 마법사, 총과 마도바이크 같은 알 수 없는 마법무기로 무장한 인간 마도사 등이 있었다.

평소처럼 오래된 던전을 이잡듯 뒤지던 우리는 그 곳이 고대 마법국가의 연구실이자 실험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먼지와 벌레만 가득한 이 곳에 과거의 지식인이 안배한 희귀한 보물이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축축한 습기와 어둠을 찾아 들어온 동굴 서식형 몬스터와 그들을 먹이로 삼는 포식 생물들 뿐이었다.

충천한 사기가 바닥나고 파티원들이 복도에서 애꿎은 몬스터 시체를 뒤적거리고 있을 때 마침 실내에 남아있을지 모를 함정을 찾고 있던 나는 알 수 없는 스위치를 발견했고, 이를 파티원들에게 알려 경계 태세를 갖춘 후 스위치를 조심스레 눌러보았다.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자욱한 먼지가 우리를 덮쳤다. 인간 파티원들이 들고 있던 횃불은 그만 꺼져버렸고, 야간에도 또렷이 물체를 인식할 수 있는 섀도우와 엘프들 또한 먼지 때문에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잠시 후, 먼지가 가라앉고 복도 반대편에서 희미한 빛줄기가 새어나오자 파티는 나를 선두에 세워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에는 거대한 방, 아니 공동이라 불러도 좋을 거대한 공간이 있었다.

공간의 한 가운데에는 강철로 만든 듯 은색의 비늘을 번쩍거리는 드래곤 모양 조형물이 있었고 곱게 접은 양 날개에는 알 수 없는 사출장치도 달려 있었다. 기분 탓일까, 깨끗하고 단단하지만 영혼이 깃들지 않는 차가운 붉은 빛이 맴도는 드래곤의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는 느낌이 들었다.

고대의 언어를 해독할 마법사와 혹시모를 함정을 해제할 내가 드래곤의 조형물에 접근한 순간, 귀를 찢는 기계음과 함께 드래곤의 아가리가 벌어지더니 붉은색 광선이 마법사와 나를 덮쳤다!

항시 가벼운 장갑을 착용한 덕에 가까스로 회피에 성공한 나와 달리 마법사는 큰 충격을 받아 바닥에 쓰러져버렸고 다른 팀원들은 망설임없이 우리쪽으로 달려왔다.

우선 성기사가 불꽃의 가호를 두르고 마법사와 드래곤 사이로 뛰어든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무쇠갑옷을 입은 탱커가 시선을 끄는 사이 마도사는 몬스터를 분석 후 마법 시전, 메이드로봇은 곧장 드래곤의 무릎을 노린다.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겨온 파티의 역할 분배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나 또한 갑작스러운 기습을 피한 직후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주머니 속 페페 (노래부르는 개구리 펫) 를 어깨에 태워 용기를 일깨워주는 씩씩한 선율을 노래시켰다. 그리고 일전에 사역한 와이번을 소환하여 메이드 로봇과 드워프 성기사에게 한눈팔린 드래곤의 날개 이음새를 노려 돌진했다.

그러자 일순, 방금 보았던 붉은 빛이 다시 한 번 나를 뒤덮었고 다음 순간 와이번과 나는 땅바닥에 곤두박질 치고 말았다. 분명 드래곤의 아가리는 입구에서 총을 쏘고 있는 마도사를 향해 있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한 사이, 정신을 차린 마법사가 드래곤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마법사는 이것이 고대의 연구자들이 만든, 입과 양 날개에서 붉은 빛을 쏘아 침입자를 배제하는 살인 기계라고 말했다. 단단하게 만들어진 강철의 비늘과 발톱은 평범한 쇠붙이에 상처하나 나지 않으며 움직임은 놀랍도록 재빠른데 사지가 각각의 생물처럼 자유롭게 움직였다.

그러던 와중 어느샌가 홀로 도망쳤던 페페가 다시 내 어깨에 올라타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용기를 얻은 나는 땅에 떨어져 다친 와이번의 소환을 해제한 후, 상대의 모든 방어구를 꿰뚫는 명검 "피어싱" 두 자루를 거머쥔 채 드래곤에게 돌격했다. 마침 드래곤의 공격을 받아내던 성기사는 나에게 불꽃의 축복을 내려주었고 신명나게 드래곤의 무릎을 박살내던 메이드로봇이 남긴 틈으로 검을 꽂아넣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드래곤은 천장을 향해 붉은 광선을 쏘아 보냈고 그 때문에 천장이 부서지며 생긴 돌덩어리들이 파티를 덮치기 시작했다. 성기사는 마법사를 보호하며 뒤로 물러섰고 마도사 또한 바위가 닿지 않는 곳으로 대피했지만 메이드 로봇은 이에 굴하지 않고 드래곤의 전신을 타격하고 있었다.

나는 쏟아지는 돌덩이를 피해 드래곤에게 달려들었다. 발소리를 줄여주는 매직아이템 덕분이었을까, 드래곤의 턱 밑까지 도달한 나는 메이드 로봇의 공격에 맞춰 양손의 검을 전력으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왼손의 검으로만 한 번, 두 번, 세 번의 공격을 단숨에 꽂아넣었다. 다른 손으로도 두 번의 공격, 총 다섯 번의 치명타를 드래곤의 가슴팍에 꽂아넣은 나는 곧장 드래곤에게서 거리를 벌려 파티가 있는 쪽으로 도망쳤다.

위협적인 마찰음과 함께 드래곤의 세 부위에서 레이저가 뿜어지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고 이전과는 다른 새하얀 빛이 나를 덮쳐 나의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죽음을 앞둔 나의 발버둥을 비웃기라도 하듯 괴상하게 춤추는 나의 그림자가 너무나도 밝은 빛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게 되었을 때, 나는 그만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눈꺼풀이라는 얇은 장막 뒤에서 거대한 폭발이 지축을 흔들었고 나는 어깨위에서 아직도 노래부르는 페페를 품 속으로 집어넣고 바닥에 몸을 던졌다.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바닥에 엎드린 내 귀에 잠시 후 육중한 무언가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붉은 광선이 내 몸을 뒤덮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땅에 쓸려 따가운 어깨와 무릎 그리고 품 속의 페페가 버둥거리는 현실에 살며시 눈을 뜬 내 눈앞에는 가쁜 숨을 내쉬는 마법사와 마도사가 그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물론 팀의 체력을 책임지는 성기사 또한 나와 드래곤의 사이에 굳건하게 서있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후에 메이드 로봇이 알려준 바에 따르면 나를 향해 광선을 쏘려고 준비중인 드래곤의 아가리에 마도사의 레지스트봄이 직격했고 그 속에 들어있던 화염저항감소 분진이 마법사의 파이어볼과 만나 그대로 대폭발, 레지스트봄 덕분에 화염 속성 공격에 약해진 드래곤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고 했다.

드래곤의 머리 부분이 날아가고 더이상 움직이지 않게 됐음을 확인한 파티는 조심스럽게 드래곤의 몸체로 다가갔다. 흉물스러운 기체의 잔해 속을 헤집으며 승리의 전리품을 챙기길 기도한 파티원들은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는 데 성공했다.

나를 빼고.

다른 파티원들이 쓸만한 아이템을 챙기는 동안 내 수중에는 다같이 나눈 골드 뿐이었다. 와이번과 페페와 함께 이름도 모를 던전에서 생을 마감할 뻔한 나는 갈 곳 잃은 분노를 드래곤의 기체를 마구잡이로 파헤치면서 해소했다. 한 손에는 옛날에 어떤 시골 마을에서 산 행운의 부적을 꼭 쥔 채 드래곤의 강철 시체를 뜯어내는 데에 집중했다. 다른 파티원들의 기쁨과 감동에 찬 환호가 들릴 때마다 행운의 부적은 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갈 뿐이었다.

그 때, 드래곤의 잔해에서 거대한 구체가 떨어져 내 발밑으로 굴러왔다. 크기는 무릎까지 오는 쇠구슬이었고 군데군데 붉은 색 반점이 눈에 띄었다. 양 손으로 들어올려보니 단순한 쇠구슬이 아닌 듯 비교적 가볍게 들려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마법사가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와 조사를 위해 마나를 흘려넣은 순간

쇠구슬이 조금씩 갈라지더니 하나씩 하나씩 구체적인 형태의 조형물로 바뀌기 시작했다. 붉은 반점은 눈과 입, 날개의 관절이 돼고 은색으로 빛나는 비늘과 발톱도 생겨났다. 즉 내 품 속에 방금 쓰러뜨린 드래곤의 헤츨링과 같은 모습의 드래곤이 있었다.

파티원들의 뜨악한 표정이 그것을 향해 있었는데 그것은 곧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더욱 품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강철의 비늘로 둘러쌓인 그것이었지만 신기하게도 긁힌 상처 따위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내 일정한 고동과 함께 움직임을 멈추었다. 잠에 빠진 듯 했다.

그제서야 나와 팀원들은 내가 강철 드래곤의 새끼를 사역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전력이 생겼음을 축하했다. 나 또한 새로운 동료가 생겼음에 감사했으나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일이 있었다. 나는 손을 든 채 질문했다.

"마스터, 방금 저희가 쓰러뜨린 녀석은 이 놈의 어미였나요?"

마스터는 약간 당황한 눈치였다. 아마 팀에서 유일하게 라이더 기능을 가진 날 위한 특별펫획득 이벤트로 간단하게 마무리될 일이 조금 난감해져버린 것이다. 어미를 죽이고 새끼를 납치해 탈 것으로 사용하다니 이래서야 밀렵꾼이 따로 없다.

"아뇨. 감수성이 풍부하시네요, 하하. 어미는 아닙니다. 애초에 기계니까요. 녀석과 같은 종류의 또 다른 기체일 뿐입니다."

마스터는 뒤이어 내가 획득한 새끼용이 고대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기계 생명체이므로 마나와 에너지를 받아들여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음을 알려주었고 그 날 던전 탐색은 마무리 되었다.

던전에서 강력한 힘을 주는 반지, 무엇이든 썰어버리는 도끼, 무한한 마나를 제공하는 목걸이 등을 얻은 파티원들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지어졌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거대한 기계용의 잔해에서 건진 새끼용을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사람은 나 뿐이지 않을까.

그 날, TRPG뉴비로서 처음 참여한 중편 세션의 어느 날, 나는 평생토록 잊지 못 할 기억 속 기계새끼용을 한 마리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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