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세션이 박살났다. 나랑 한 플레이어간의 갈등 떄문에 그랬다.


첫 입문을 운이 좋게도 굉장히 좋은 팀에 들어가고, 그 이후로 모집한 다른 인맥들도 좋은 분들이고 해서 세션이 터진 일이 사실상 없었는데, 처음 터진 세션이 하필 내가 마스터로 하는 거라서 더 정신적인 타격이 크다. 글들을 보면 세션이 터져나간 적이 많다고들 하는데, 대체 어떻게 극복해냈는지 비결이라도 묻고 싶을 정도다.


아예 남 탓만 하고 있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세션이 터진 첫째 단추가 혼돈 중립~중립 악 사이 정도 성향의 캐릭터도 잘 이끌고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내 오만함이었고, 기폭제가 된 마지막 단추 또한 내 큰 실책임을 고려하면, 오만 가지가 내 탓인 것처럼 보이고 사실상 마스터링을 놔야 하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 '애초에 그런 백스를 컷해야 한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내 이전까지의 경험상 '어...?'싶은 백스를 짜온 사람들도 초반에 걱정됐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로는 다들 세션에 잘 녹아들어 스무스한 진행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컷하기가 좀 꺼려졌다. 자신이 굉장히 오래 생각해온, 가장 하고 싶은 캐릭터였다고 어필하는 점과, 그 사람의 경력이 상당해 문제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넘겼다. 어쨌든, 나의 경력의 거진 열 배는 티알판에서 구른 사람이니까. 그런 점들을 고려하다 보니


내가 잘못해서 이렇게 됐나?-> 아니 근데 내가 다 잘못한거야? 아니지 않나?-> 그래도 내가 중간에 조정하거나 잘 양보했으면 이럴 일도 없지 않았나? 하는 무한 루프에 빠져서, 아직까지 잠도 못 자고 있다. 


세션이 터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아마 내 성격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 경험 부족일지도 모르고.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하게 꼽을 수 있는 원인은, 그 플레이어와 나의 판타지 세계에 대한 심상 차이가 있었고, 그걸 내가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trpg, 특히 D&D를 돌릴 때 기본적으로 엘더스크롤 시리즈를 생각한다. 선한 선택지도, 악한 선택지도 고를 수 있으나, 명백하게 그에 따른 대가가 오는. NPC라도 자신에게 손해가 가거나 악랄한 짓을 당한다면, 분노해서 관계가 틀어지거나 불이익을 가할 수 있다고 보고, 좋은 작품의 설명에 '판타지라도 기본 행동 원리는 현실에서 있을 법해야 한다'라는 구절과, 혼돈 성향이나 악 성향을 통제하는 법으로 '사회의 눈초리' 혹은 '직접적인 제제'가 사용될 수 있음을 읽고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플레이어가 같은 PC에게 악행을 하는 것을 넘어서, NPC에게 좋지 못한 상호작용을 한다면 그에 대한 반발이 결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분의 심상은 조금 달랐나 보다. 'trpg는 현실적이지 않다'는 사실상 인식론과 경험론으로까지 끌려가는 길고 답이 나오지 않을 논쟁을 하려던 찰나에 '아직 격양되지 않은 목소리로 작별할 수 있을 때 서로를 위해 여기서 끝냅시다'라고 내가 도망치듯이 나온 것을 제하더라도, 캐릭터성을 위한 rp는 적절한 선에서 마스터가 그냥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나도 가끔 플레이어로서 적당히 rp를 하다가 NPC가 불쾌해할 만한 말들이 나왔음에도 마스터가 너그러이 넘겨준 경우가 있었고, 그런 것처럼 가볍게 던진 rp까지 마스터가 현실성이란 명목 하에 무겁게 받아들이면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난처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모든 것들이 돌이켜보면 다 아쉬운 점뿐이지만, 로그도 없고 나의 개인적 감정이 들어갈 만한 다른 것들과 다르게, 적어도 위에 서술한 NPC에 대한 악행을 어떻게 받아줘야 하는가에 대한 점만큼은 조언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가 그냥 적당히 낮춰서 받아줘야 하나? 아님 세션 전에 나는 이런 성향이라고 밝히고 거기에 수긍하는 사람만 받아줘야 하나? 아님 어느 한쪽이 진정한 trpg를 즐기는 방법이라고 정해진 게 있을까? 짧은 답변이라도 좋으니 부디 나름의 의견을 말해줬으면 한다. 


새벽녘에 두서없이 긴 글을 써서 미안하다. 혼자 속으로 앓는 것보다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구덩이를 파고 외친 이발사처럼, 익명 신문고마냥 이런 식으로라도 내 생각을 정리해 쓰는 게 조금 나아지는 방법일 것 같았다. 다들 좋은 하루 보내고 앞으로의 세션에 다이스 갓님의 가호가 함께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