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 모든 캡처에서 d10의 10은 0으로 생각해주세요. 0~9 주사위를 따로 만들기 귀찮았음.



혹시 '건독·리바이스드'라는 룰에 대해 들어 본 적 있는가?



턀갤에 건독으로 제목/내용 검색을 돌려보면, 올해는 총 5개의 글이 올라왔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작년에는 총 11개의 글이 올라왔었고.


그렇다. 하는 사람 ㅈ도 없는 ㅈ망룰이다.



왜 턀갤에는 건독 떡밥이 안 굴러갈까? 본인이 RPG 초보인지라 확언하기는 좀 힘들지만,

솔직히 룰북만 읽어봐도 대충 그 이유가 짐작이 간다.



d100을 써서 성공 판정을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 값의 자릿수합을 구해 ‘달성치’로 사용하는 귀찮은 판정법.

매 라운드마다 팀 단위로 이니시 판정([전술 판정])을 다시 해야 하는 번거로움.

이동 방법이 [신중한 이동], [일반 이동], [전력 이동]으로 나뉘어 매 턴 시작 시마다 어느 방법을 쓸지 선언해야 하고,

판정마다 이 이동 방법뿐 아니라 거리나 심지어 광량 등에 따라서도 복잡한 수정치가 들어간다.

공격만 하려 해도 단발/점사/연사, 1사/2사/3사, 1목표/2목표/3목표,

거기에 제압사격에 샷건에 그레네이드에 무기 격투에 격투: 타/투/극 등등, 한도끝도 없이 다양하며,

그마다 명중률과 대미지에 다른 보정이 붙는 것도 모자라, 관통/비관통 판정을 해서 서로 다른 대미지 주사위를 쓰고,

심지어 피해가 10을 넘으면 대미지 페널티 표를 참고해서 추가 피해나 상태이상이 주어진다는, 기나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다. 너무 귀찮다.

총기 데이터에 줄줄이 적혀 있는 지근/근/중/원거리 수정치네 CP(휴대치)네 한손/양손 근력 요구치네 하는 것들을 보면 알겠지만

건독은 ‘현실적인 총격전’을 구현하고자 하는 일념 하에 지저분한 수정치와 번거로운 규칙들로 점철되어 있는 룰이다.


PL도 마스터도 이 룰을 전부 숙지하기란 상당히 힘든 일이며 룰링에서 실수를 안 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현대 총격전을 충실히 구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치려 해도 말이지,

애당초 ‘현대 총격전’을 충실히 플레이하고 싶어하는 PL과 마스터가 세상에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이미 자기들끼리 모여서, 영어 자료 돌려 읽고 군사 무전 용어를 써 가며 자기들끼리 재미있게 놀고 있지 않을까???


본인은 그 정도로 밀덕은 아니다. 솔직히 RPG에 그 정도로 의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밀덕들 사이에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낄 정도의 용기도 없고

룰 서머리 대충 읽어보고 겁먹은 사람들을 억지로 끌고 가면서 마스터링을 할 실력도 못 된다.



이것이 내가 군을 전역한 2019년 초, 건독·리바이스드 룰북을 산 지 삼 년 하고도 절반이 지나기까지

이 룰북을 묵혀만 두고 있어야 있었던 이유다.


룰북이 낡다못해 책의 정확히 절반인 138~139p 부분의 접착제가 벌어져 버리게 되기까지 충분한 시간이었다.

개뻥이다. 산 지 한 달만에 이 지경이 됐다. 마감상태 실화냐? 정말 티알클은 레전드다...



그 동안 너무 할 짓이 없었던 나는 구글 스프레드시트로 건독 자동화 시트를 만들었고

Roll20 무료계정이 API 스크립트 없이 건독의 지저분한 판정을 매크로로 만들 수 있나 연구하고 있었다.

사격 판정을 절반 정도 자동화하는 데는 성공했는데 이것보다 좀만 복잡해지면 뻗더라. 무료계정의 한계였다.


그러면서 내심 나는, 이 헛짓거리들이 빛을 볼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주일 전, 턀갤에서 건독 당일치기 구인이라는 믿을 수 없는 구인글을 운명처럼 만나기 전까지는.



솔직히 구인하는 사람이 제정신인가 하고 의심했다.

다시 말하지만 건독은 룰링이 편집증적으로 번거로운 룰이다. 근데 당일치기로 모은다고?

심지어 미경험자도 아니고 룰북 없는 사람도 ㅇㅋ라고???


둘 중 하나일 터였다. 초보 마스터의 무모한 도전이던가, 고인물 마스터의 빠요엔 들박쇼거나.


본인은 어느 쪽일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 빠요엔이 오더라도 내가 다른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지나 않을까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추하게 디코로 ORPG 같이 하는 지인들에게 ‘이거 츄라이해 말어?’ 라고 물었고

‘ㄱㄱ’ 라는 답을 두 개나 듣고 나서야 구인글에 디코 닉을 남길 용기를 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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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플레이를 마친 소감을 말하자면...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좀 더 구체적으로 내가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뛰어난 마스터가 도와준다면, 건독은 생각 이상으로 뉴비에게 친화적인 룰일 수 있었던 것이다!



새삼 강조하지만 본인은 룰북을 몇 번 읽어봤을 뿐, 그마저도 최근에 읽어본 건 두 달도 더 전이었고 플레이는 처음이었다.

함께 참가한 PL 두 명은 말할 것도 없다. 룰북 자체를 읽어본 적이 없었으니.

마스터도 머릿속에 저 지저분한 룰북이 다 들어있는 타입의 빠요엔은 아니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본인이 몇 번 룰링 훈수를 하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어떤 요술을 부렸기에 저 복잡한 룰이 매끄러운 플레이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본인은 PL로서 어떤 재미를 느꼈고 어떤 부분이 좋았던 것일까?



이 소감은 물론 함께 참가한 PL들과 마스터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지만

동시에 본인 스스로 이 드문 체험을 어떻게든 정리해 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기적의 조건들을 룰적인 부분과 플레잉적인 부분으로 나누어 분석해 보자.




1. ‘현대’ ‘총격전’ ‘d100’ 룰의 접근성


(룰북에서는 2d9 듀얼 롤이라는 독자용어로 사람 헷갈리게 하고 있지만 아무튼)

건독은 기본적으로 d100을 사용하는 룰이다.

CoC처럼 다양한 기능(건독에서는 스킬)마다 성공 확률이 부여되어 있으며, 포괄적인 능력치 판정은 없고,

기본적으로 d100 하향 판정에 성공하면 그 행동에 성공한 것이다.

달성치라는 귀찮은 부분도 존재하지만, 일단 별도의 주사위 굴림을 요구하는 게 아닐뿐더러

‘성공률이 높으면 달성치도 높아질 확률이 크다’는 점이 보증되므로

PL 입장에서는 어쨌든 ‘대충 내가 이 시도에 어느 정도 성공률이 나오겠군’을 직관적으로 짐작 가능하다.


스킬 분야는 댄디나 던월의 시각에서 보자면 필요 이상으로 세밀해 보이지만

결국 메인/서브 클래스와 능력치에 따른 보정을 받도록 카테고리가 나뉘어 있기 때문에

(일본룰답게 단일 능력치가 아닌 여러 능력치의 가중치 있는 합으로 되어 있다.

총격전 룰에 어울리는 좋은 구조인데, 주제를 벗어나기에 생략)

결국 ‘[지능]캐면 이런 시도를 해볼 법하네’ ‘[감각]에 투자한 [스카우트] 클래스면 이런 행동에 유리하겠구나’ 정도는 쉽게 체감할 수 있으면서도

추가로 자신이 투자하고 싶은 스킬을 더 찍어서 성공률과 달성치를 높일 수 있는 구조다.


사실 TRPG를 처음 해 보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댄디의 “당신은 성직자니까 지혜가 높고 따라서 주변 관찰도 잘 합니다(?)” 같은 건

게임 메커니즘적으로는 잘 돌아갈지언정 초보자가 할 법한 직관적인 사고와는 거리가 멀다.

초보자에게는 설사 시트가 지저분해 보일지라도, <감지>가 80%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이

“저 혹시 이 상황에서 <감지> 가능할까요?” 라는 발상을 떠올리기에 더 편할 것이다.



하물며 건독의 배경은 ‘현대’ ‘총격전’이다.

댄디나 던월 같은 판타지 세계 내지는, 독특한 법칙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다.

숨고, 달리고, 총을 쏘고, 부상병을 치료하고, 포로를 심문하는 건

마법을 쓰고 거기에 대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직관적이며, 그 룰을 이해하는 것도 번거로울지언정 난해하지는 않다.



2년 전쯤, 위에서 내게 용기를 복돋아줬던 지인들과 댄디 5판 단편을 한 적이 있다.

그 시점까지 댄디 경력이라고는 중간에 파토난 장편 4세션 정도에 단편 2~3세션뿐이었던 본인은

‘신속한 후퇴를 쓰고 전격의 손아귀를 쓰면 치도리 아니냐? 기회공격 안 받고 카이팅 개꿀?’

라는 괴상한 발상으로 위저드를 만들어 가서 한 턴에 주문을 하나밖에 못 쓴다는 걸 깜빡하는 찐빠를 저질렀으며


그리고 무엇보다 기스양키는 안개 걸음이라는 주문을 쓰고 다닌다는 커다란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카이팅은 개뿔 메이지 아머랑 실드 없었으면 그대로 시트 찢어졌을 듯.



그러니까, 사실 댄디의 세계에서 자기가 하고 싶었던 걸 제대로 하려면

몬스터 매뉴얼(초심자특: 사놓고 안 읽음)까지 숙지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총질에는 그런 난해한 부분이 없다. 그냥 엄폐를 안 했으면 총 맞고 즉사할 뿐이다.



모 아니면 도 마인드로 엄폐 없이 달려들어서 총알을 갈기면 이렇게 죽일 수 있다.

참 쉽죠?



건독은 룰적으로 리롤이라던지, 이동기나 기타 게임의 메타적 부분을 건드리는 시스템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룰링은 각 상황마다 지저분한 수정치를 얼마나 덕지덕지 붙이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에 비하면 댄디의 이점/불리점 시스템은 단순하면서도 게임에 큰 변화를 준다. 이렇게만 보면 훨씬 낫지.



하지만 건독의 기본 룰을 플레이 도중에 배워가는 초심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어차피 그 지저분한 수정치라고 하는 것들은, 결국 전부 마스터가 알아서 계산해 줄 일 아닌가?

결국 총격전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사거리로 달려가서, 총알을 갈기고, 맞기를 기도하고, 숨는 게 총격전의 전부다.

결국 ‘빨리 달리면 조준이 흐트러진다, 나도 적군도’,

‘총알을 많이 뿌리면 명중 확률과 대미지는 늘겠지만, 총알이 다 떨어지면 행동을 써서 재장전해야 한다’

이 두 가지만 PL이 인식하고 있으면, 정확한 룰 숙지 없이도 그럴싸한 총격전 액션 묘사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잠시 이야기를 삼천포로 돌려서, 이 관점에서 새롭게 깨달은 것도 있다.

'왜 트위터에선 별의별 것들을 다 CoC로 플레이하는가'에 대해서도 이해의 실마리가 잡힌 것이다.


물론 ‘이미 모두가 CoC를 많이들 하고 있기 때문에’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생각하기에, CoC가 각 기능들을 시트에 나열해서 가시화해 주는 d100 룰이면서

보너스/페널티 주사위나 그보다 복잡한 메커니즘(FATE의 면모라던지, 덥크의 크리티컬 시스템이라던지)이

거의 배제되어 있다는 점도 적잖아 영향을 주지 않았나 한다.



분명 저런 메커니즘들은 잘 사용하면 게임을 보다 흥미롭게 만들고 PL에게 더 넓은 선택의 폭을 제공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PL들이 숙달되어 있지 않다는 게 전제라면?

저런 기믹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고,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조차 정하는 데 망설임이 있다면?

그런 PL에게는 분명히 “운명점 써서 A 면모를 발현시켜서 설득을 한 번 해 보겠습니다”보다

시트를 훑어보고서 “설득 성공률이 60%인데 한 번 해 볼게요” 쪽이 직관적이고 허들이 낮을 것이다.

룰에 수정치가 덕지덕지 붙는 건독조차도 행동 선언에 대한 PL의 심리적 난이도가 낮은데,

행동에 대해서 룰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절반/5분의 1/강행 정도밖에는 없는 CoC라면 얼마나 진입장벽이 낮겠는가.



물론 이번 건독 세션에서 동료 PL들이 행동 선언에 적극적이었던 건 그들이 좋은 PL이었기 때문이 가장 컸다.

아마 건독이 이것보다 더 복잡하거나, 비직관적인 시스템을 썼다 하더라도 이 사람들은 좋은 플레이를 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들처럼 좋은 PL을 만나지 못하는 불운한 마스터들이 존재하며,

아마 트위터라면 턀갤보다는 그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자신의 플레이를 매끄럽게 굴리기 위해서 행동 선언과 룰의 메커니즘 사이의 결합도(?)를 낮추는 선택을 한 것은

RPG의 재미 관점에서는 좀 어긋날지언정 이해 불가능한 선택은 아닌 것도 같다.




2. 일본룰 특유의 조립식 캐릭터 메이킹


어떤 의미에서, 건독은 뉴비에게 찍먹해주는 단편에 잘 어울리는 룰 같기도 하다 느꼈다.

턀갤 번개팟이라는 상황과 일본룰의 캐릭터 메이킹 방식이 상성이 꽤 좋다는 느낌이다.


판정이 더럽게 난해한 것치고는, 캐릭터 메이킹은 꽤 간단하게 만들어져 있거든.

메인/서브 클래스 정하고, 클래스 아츠 정하고, 능력치랑 연령 정하고, 경력 정하고,

이에 맞춰서 스킬들 정하고, 저금액에 맞춰서 장비 챙기고. 끝.

커넥션은 단편이라 쓸 일이 없었고, 옵션 룰로 특징이랑 신념이 있는데 옵션이라 크게 중요치는 않고.


뭐 이런 식으로 말하면 댄디 캐릭터 메이킹은 안 단순한가 싶겠는데, 결국 이것도 총격전 게임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댄디처럼 주문을 선택하거나 서플 참고하고 멀클로 빌드를 짜거나 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결국 하는 짓은 다 똑같이 총질이니까.

클래스 아츠 같은 것들도 대부분이 뻔하게 좋은 일회용 버프/디버프/추가 행동들이지,

댄디 피처들처럼 메커니즘을 건드려 ‘할 수 없는 걸 할 수 있게 되는’ 카테고리가 아니어서, 정하는 데 그리 고민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


물론 작정하고 최적화를 하려면 신경 쓸 건 많을 것이다. 총기나 장비들이 꽤 다채롭기도 하고.

본인만 하더라도 실수로 근접무기를 챙기지도 않고 [녹 다운] 클래스 아츠를 픽하는 찐빠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막말로 단편인데, 조금 모자란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것도 단편의 재미 아니겠는가?


다들 전술을 전혀 안 찍어서 가장 전술이 높은 메딕 할아범이 성공률 48%로 이니시 판정마다 개같이 멸망했으며

다른 PC들이 힘을 3, 4 찍어오는 바람에 CP가 곱창나서 자기 총과 탄약을 드는 것도 버거워했고

때문에 본인이 팀원들 군장을 다 들어주는 돌쇠가 되었지만, 이 역시 RP적으로는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성능이 아닌 RP 중심으로 캐릭터를 짠다고 생각하면, 생각보다 캐릭터 메이킹이 간단한 룰일 것이다.



그리고 역시 일본룰답게, 취득 가능 경력에서 결정장애가 오면 그냥 주사위를 굴려서 결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실제로 PL 한 명이 RP 방향성을 못 잡자 본인이 주사위 굴리기를 제안했고, 자그마치 99가 나와버렸다.

99에 할당된 경력이 뭐냐 하면...


17세 하와와 메이드쟝(UZI 연발로 갈김)이었다. 아 ㅋㅋ 메이드가 총질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고

이런 씹덕같은 부분도 건독에서 소소하게 재미있었던 점 중 하나다.




3. 마스터가 픽한 개쩌는 소재


전술했듯이 건독의 복잡한 룰은 그 자체로 진입장벽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장애물로도 작동한다.

말인즉은 ‘이 정도로 빡세게 현실적 총격전을 구현하려 드는 마스터와 PL들이라면 틀림없이 밀덕일 것이다’라는 형태의 선입견이다.


그리고 솔직히 적어도 룰북 저자는 그 선입견에 맞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룰북을 작성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룰북 53p까지 가상의 국제정세를 설명하는 데 쓰고 있다고?

총기 데이터가 복잡한 건 그렇다 쳐도 왜 총기마다 다 설명이 붙어 있는데.

룰북에 첨부된 예시 시나리오 두 개도 전부 유괴범을 사살하는 게 목적이고.


결국 건독을 룰북에 충실하게 맞춰서 플레이한다면, 작정하고 라이트하게 가야 메탈기어 시리즈,

현실적으로는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내지는 허트 로커 같은 걸 배경으로 한 물건이 튀어나올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솔직히 본인은 PL들이 룰을 보고 도망갈 가능성 쪽보다는

형연할 수 없는 밀덕 내음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리타이어할 가능성 쪽을 좀 더 걱정했었다.



그러나 이런 내 걱정을 일축하듯이, Roll20 플레이룸의 포트레이트는 다음과 같았고



시놉시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킹룡! 와 ㅅㅂ 킹룡이라고!



단순히 PL들이 모두 공룡을 좋아했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폐쇄된 쥬라기 공원이라는 소재가 생각 이상으로 건독의 룰에 잘 어울렸던 것이다.



건독은 섬세하게도 군사 활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기동’을 [에어리어 맵]이라는 룰로 다루게 되어 있다.

그니까 개ㅈ같은 산악행군을 TRPG에서도 즐길 수 있어요! 라는 건데

이런 말하기 좀 그렇지만 저자가 미필 일본인이어서 이딴 걸 재미있겠답시고 룰북에 넣어놨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마스터가 가져온 쥬라기 공원 지도를 붙여넣자, 이 에어리어 이동마저도

‘중생대를 재현한 정글을 헤쳐나가며, 언제 위험한 공룡이 튀어나올지 몰라 바짝 긴장한’ 분위기가 되면서

밀리터리적인 리얼리티 없이도, 쥐고 있는 총 한 정에 의지하는 심정에 매우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매우 쓸데없이 세세한 격투전 룰 역시, 그 주체가 공룡이 되자 ‘날카로운 공룡의 송곳니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 되었으니

건독 룰북의 왜 있나 싶었던 부분들도 실제로 다 적용해 볼 기회가 된 것이다.

PL 입장에서도 ‘러시아 극우파가 어쩌구~’ 하는 것보다 더 몰입하기 쉬웠던 건 당연지사.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악덕기업 사병들의 산업스파이 행위를 저지하게 되는 흐름으로 이어지면서

건독 룰의 핵심인 대인 총격전까지도 경험해 볼 수 있었으니,

솔직히 마스터가 소재를 굉장히 잘 가져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격전 룰이니 총격전을 중심으로, 밀덕적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겠다’는 게 본인의 편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건독으로 미소녀들이 총들고 설치는 씹덕물 같은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4. 까다로운 룰을 조자룡 헌 창 쓰듯이


계속 총격전 룰의 장점만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총격전이라는 건 그만큼 어려운 점도 많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건 플레이 양상의 경직일 것이다.

PC도 NPC도 엄폐물 뒤에 숨어 총질하면서 주사위 굴리기만 반복하는 건 분명 노잼이겠지.



물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룰적인 장치들이 있다.

[전력 이동] 덕에 캐릭터들이 시원시원하게 이동하면서도 빗발치는 총알 속을 누비고 다니는 게 가능하고,

반대로 사격 시에는 [신중한 이동]이 워낙 유리하다 보니, 거리를 벌리면서 카이팅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때문에 상대에게 근접해서 맨손 격투를 통해 CC기를 걸어 제압하는 행동이 매우 유효하다.

존 윅처럼 적군을 엄폐물로 활용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비살상 제압도 가능하고.

실제로 본인은 그래플러 빌드를 짜서 재미를 꽤 보았다. 사격은 한 턴에 단발 3사, 클래스 아츠를 써서 2회 행동으로 총 6발 쏜 게 전부일 정도로.


그리고 이런 장치 외에도, 사격전 양상이 루즈해지는 걸 예방하기 위해 건독은 명중탄 한 발의 대미지가 매우 높게 할당되어 있다.

누가 상태이상이 걸리거나 아예 드러눕는 것만큼 전장상황을 급변시키는 것도 없을 것이다.

매 라운드마다 이니시 굴림을 다시 하는 것도 이 때문에 극단적으로 유리한 선공의 장점을 어떻게든 중화시키기 위한 것이라 봐도 좋다.

사격이 한두 번 관통되면 사실상 사망 확정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NPC건 PC건.



그래, 여기서 총격전 룰의 두 번째 문제점이 나온다. 죽창이 너무 심하다.

주사위 두세 번 잘못 뜨면 그대로 시트를 찢어야 하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뻔했다.



아무리 근력 덤핑을 한 데다 도하 판정에 실패해서 누적 대미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풀피 24의 한의사 할배(영어 못함)가 한 발 명중탄에 21딜을 받고 바로 드러누운 상황.


기절 상태지 즉사는 아니지만, 룰적으로 내구력이 마이너스일 때는 회복판정 자체가 안 되고

파티의 유일한 메딕이 누웠으니 의료행동이 불가능한 건 둘째치고(나머지 둘은 성공률이 음수다),

의료장비가 백팩에 들어 있으므로 꺼내는 데만 3라운드가 걸린다는 환장할 상황이다.

즉 룰대로라면 남은 게임 내내 PL은 치사 판정만 굴려야 할 처지인데



이 때 자비로운 마스터가 제시한 거래.



단순히 룰을 어기고 PL을 살려줬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나름 룰북 내 근거를 가지고 하우스룰을 적용해 준 거라는 점에서, 마스터링을 되게 잘 한다는 것을 느꼈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서사룰적인 시도를 유도리 있게 잘 받아준다던가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상황전환을 잘 시켜준다는 것에서 마스터의 내공이 느껴졌다.



전술했던 대로 총격전은 양상이 굳어지기 쉽다.

왜인지는 몰라도,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NPC들이

다이스 갓의 가호를 받아 유독 총알이 피해다니면서 전투를 질질 끌어버리는 현상이 자주 일어나는데

그렇게 NPC에게 불리하게 상황이 기울어질 때마다 마스터가 돌발행동을 잘 벌여 주는 게 굉장히 인상깊었다.


애초에 싸워서 이길 방도가 없으니 보트의 엔진을 터트리고 수중으로 도망쳐 버린다던가.

총알에 얻어맞은 공룡이 후다닥 도망가더니만 풀숲 속에서 우리를 노린다던가.


그 중에 백미는 최종전에서의 저 차 타고 도주하려는 놈을 가로막는 상황이었다.

전투원 두 명은 어떻게든 <운동> 판정으로 차에 달라붙어서 놈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방금 죽다 살아난 한의사 할아범은 이 상황을 최루탄 한 방으로 깔끔하게 처리하려고 했고


<투척>을 찍지 않았던 할아범은, 부위공격 페널티 때문에 29를 띄우고도 개같이 멸망했다.

빗나간 최루탄은 용케도 아무도 맞지 않았으나(본인은 1칸 차이로 효과범위 밖이었음)

마스터는 여기서 차가 움직이면 가스 범위에 들어간다는 걸 지적함과 동시에


동시에 NPC 포트레이트가 끼고 다니던 방독면이 장식이 아니었음을 선포했다.



덕분에 차를 붙들고 있던 아군만 죽어나가고



본인은 강인함 판정에 성공한 대신 펌블로 차에서 떨어지고

자동차는 후진으로 맹렬하게 도망가는 개판 속에서




할아버지가 플레이 중 처음으로 쓴 총 한 발이 기가 막히게 타이어에 명중,

도망치는 놈을 제압할 수 있었다...!




확실히 이런 걸 보면, 설사 데이터와 룰링이 빡빡해 보이는 룰을 하더라도

마스터가 돌발상황을 대처하고 만드는 능력은 어떤 룰에서도 빛을 본다는 게 느껴졌다.

전투맵을 따로 준비한 것도 아니고 즉흥적으로 그리던 거 같은데, 그럼에도 전투가 꽤 재미있었다.

이동거리가 아슬아슬하게 딱 맞거나 꼭 한 칸 모자라던 상황이 반복되는 것도 스퀘어맵 특유의 재미를 잘 살려줬다.

이것까지 노렸다면 ㄹㅇ 마스터링의 신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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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글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졌으니 슬슬 소감을 정리하도록 하자.


본인이 건독 룰북을 샀던 것은, 과연 빡빡한 데이터룰이라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며

개인적으로는 존 윅 같은 빡센 총격 액션이나 테크노 스릴러 장르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첫 건독 세션은 이런 서바이벌, 요절복통 액션이었다는 게 참 신기한 일이며

그게 무척 재미있었다는 것 역시 즐거운 아이러니였다.

공룡 유전자 샘플을 빼돌려서 팔아먹으려는 할아버지의 뻘짓거리는 엔딩을 즐겁게 장식해 줬다.



룰보다 함께 하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은 절대로 룰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다.

차라리 좋은 사람들과 함께라면, 룰은 자신의 잠재력을 100%, 120%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처음 잡아본 룰이라서 전투에 소극적이 될 법도 한데도 과감하게 진입하면서 파티의 딜링을 맡아준

UZI를 연발로 갈겨대는 17세 메이드 미소녀쟝 ‘김마리아’를 맛깔나게 플레이해 준 PL,

메딕 캐릭터로 설계됐지만 룰의 난해함 때문에 전투로는 통 기여를 못했음에도

적극적인 RP로 재미를 불어넣고, 사고를 친 다음 총알 한 발으로 그걸 깔끔히 해결해 낸

64세 할아버지 한의사 ‘장만득’을 플레이해 준 PL 모두

룰 미숙지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단편 플레이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팀원이었다.


그리고 미경험자 세 명, 심지어 둘은 룰북 미소지자임에도 불구하고

세션을 매끄럽게 진행시켜 나간 마스터, 턀갤 닉 ‘감자와고구마’에게 찬사를 보낸다.



이들과 만나봤기에, 나는 앞으로 누군가에게 건독이 그렇게 똥망룰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좋은 팀원만 만날 수 있다면, 률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면

건독은 꽤 좋은 룰임이 분명하다고.




귀찮은 룰 적용 따위야 전부 자동화해 버리면 그만이지 않은가.

자동화... 자동화가 최고다...



나중에 FVTT라도 사서 공부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