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흥미로운 떡밥이 보여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배경설정의 방향성 이야기.


사실 저 질문 자체는 별로 좋은 질문이 아님. 현실에서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고, 마법도 아마 없을 가능성이 높거든. 그래서 순전히 상상에 의존해야 하는데, 신의 영향력이 어디까지냐, 그 신이 선신이냐 악신이냐(적어도 인간의 보편적인 도덕관에 비춰서 봤을 때 선하거나 악하다는 규정이 가능한가), 신성마법은 독실한 사제에게만 주어지는가 아니면 사제 자격이 없어도 신앙심 깊고 그 신이 제시하는 도덕관념에 투철하면 시골농부도 기적을 발휘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마법으로 가능한 선은 어디까지이며 마법사는 똑똑한 사람이 존나게 공부 열심히 하면 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혈통빨이 필요한가, 뭐 그런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공통된 합의점이 있어야 그 세상에서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 있는지에 대해 토론이 성립할 수 있거든. 같은 '중세 판타지' 장르라고 해도 저 설정은 작품마다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이하는 그저 '내가 중세 판타지 배경으로 플레이를 할 때(정확히는 마스터링을 할 때) 자주 기본 전제로 삼는 방향성' 차원의 이야기임


1)신들보다도 위에 있는, 근본적인 우주의 섭리 내지는 초월적 에너지 같은 게 있음(D&D를 할 때는 가치관이 곧 이 '에너지'가 됨). 이 에너지의 흐름과 변환이 우주적인 근본원칙이고, 신들은 그 근본원칙의 가장 수준 높은 체현자

2)절대다수의 세상 사람들은 신들의 존재를 알고, 꾸준히 기도한다. 그러나 특정한 한 신에게 투철한 신앙심을 품고 봉사하겠다는 맹세를 할 정도는 아니고, 그저 봄이 오면 모내기를 하며 대지의 신 신전에 찾아가 기도를 올리고 제물을 바치며 풍작을 빌고, 결혼을 하면 배우자와 가정과 결혼의 신 신전에 가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리고 제물을 바치고, 흉년이 들고 돌림병이 퍼지면 기아와 질병의 신(보통은 악신) 신전에 가서 분노를 거둬달라고 기도를 올리고 제물을 바치는 식.

3)대개의 신들은 자기를 섬기는 교단이 있고 교단에서 운영하는 신전이 있으며 그 신전에 다수의 사제를 둬서 간접적으로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침. 사제 중에서도 신이 보기에 괜찮다 싶은 소수만 골라 신성주문 시전능력을 내려줌. 같은 사제라도 대부분은 신성주문 같은 거 못 쓴다. 하지만 가끔은 사제가 아닌 보통 사람이어도 자신의 계획에 필요하다거나 ㅈㄴ 열심히 기도를 했다거나 하면 일시적으로 신성주문 시전능력을 주기도 함

4)마법사들의 주문은 신이라는 매개 없이, 그 초월적인 에너지를 임의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조작하는 것. 그걸 이해하고 조작하기 위해선 존내 공부해야 함. 신성주문과 비교하자면 굳이 특정 신을 열심히 섬기거나 그 교리를 충실히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음. 그 대신 몇몇 능력(특히 치유와 부활 관련)은 마법사들이 흉내낼 수 없고, 덤으로 사제들이 무엄하게 신들의 힘을 멋대로 빼돌려 쓴다고 퍼킹하게 봄... 말하자면 신성주문도 비전주문도 둘 다 근본은 같지만 신성주문 시전자는 실기 정품 사용자, 비전주문 사용자는 (구현이 제한된) 에뮬 사용자 


하지만 결국 신성주문도 비전주문도 쓸 줄 아는 건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극소수의 엘리트들임. 신성주문은 애초에 신이 내려주는 거고, 비전주문은 이론 상으론 머리 좋고 피토하게 노력하면 누구나 배워서 쓸 수 있지만 그걸 널리 보급할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의 경제적, 사회적 인프라가 다져지지 않은 상태. 또한, 엄밀하게 따지자면 신들도 모탈들보다 근본원칙을 훨씬 많이 알고 훨씬 더 잘 쓸 수 있는 강력한 존재일 뿐 근본적으로는 모탈들과 비슷한 감정과 욕망이 있으며 가끔은 실수도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모탈 입장에선 일단 졸라 세고 많이 아니까 일단 숙이고 들어가긴 하되 굳이 진심으로 숭배해야 할 이유도 없음(물론 사제들은 이런 관점을 싫어하긴 함)


그런 철학적인 이유도 있고, 애초에 사제도 마법사도 별로 없는 지역에서는 신에도 마법에도 의존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평범한' 수단으로 개인의 인력 이상의 자연적, 기술적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과학과 실용적 공학 및 의학에 대한 연구가 진행될 수 있고, 그게 상당한 수준까지 도달할 수도 있다... 는 게 개인적으로 자주 써먹는 설정. 대개는 열기구랑 화승총, 초기형 증기기관 정도가 있는 선까지로 제한하긴 하는데. 이 이상의 복잡한 부분(사제와 마법사와 공돌이들의 사회적 위상 차이, 대립의 강도 같은 거)은 보통 실 플레이 전에 팀원들과 이야기해서 '이번 캠페인에선 어떤 식으로 하자'고 결정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