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2월 14일 저녁. 인싸들이 서로 춰컬릿 따위를 주고받고 겸사겸사 반수염색체도 주고받을 시간에
나는 턀갤러들과 함께 아이언스원(Ironsworn)이라는 생소한 룰의 단편 플레이를 시작했다.
“갑자기 취직이 되어서 일정이 바뀌어버리면 팀원들이 곤란해 할 테니,
장기플은 일자리를 확실히 구하고 나서 찾아봐야지” 라고 정한 게 대체 언제였더라.
그렇게 내가 왜 턀갤 눈팅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모르겠다 싶던 차에
당일치기 세션 구인글이 올라온 것이다.
중근세 일본풍 배경이라는 것도 취향 적중이었고,
새로운 룰을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 이제 RPG는커녕 면접관 외의 상대와 대화라는 걸 해 볼 기회가 사라진 나에게는
2월 14일 이 날, 랜선 너머로나마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악덕 다이묘에게 잡혀간 주군의 딸을 구하기 위한 우리의 모험은 시작되었다.
1.
아이언스원은 북유럽풍 로우파워 다크 판타지 세계 ‘철의 대지’에서 ‘철의 서약’을 수행하는 PC들을 그리는...
같은 소리는 애당초 일본풍 배경으로 마스터가 갈아치웠으니까
이 후기에서 다룰만한 건 아닌 거 같고
(개인적으로는 정판스러워서 마음에 들긴 했음,
관심 있으면 영판이 무료니 읽어보는 것도 ㄱㅊ을듯)
룰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들만 짚어가면서 설명해 보자.
1) 기본적으로 AWE 영향을 받은(부분성공 개념이 있는) 서사형 룰
아이언스원의 판정법은 꽤 독특한데, 수정치가 적용되는 ‘행동 주사위’와,
2개의 10면체 ‘도전 주사위’를 한 번의 판정에 함께 굴린다.
행동 주사위가 도전 주사위 둘 다보다 크면 대성공, 하나만 크면 부분 성공,
전부 작거나 같으면 실패로 판정하는 식이다.
또한 도전 주사위 두 개가 같은 값이 나오면 ‘일치’라고 해서
흥미롭거나 예상치 못한, 혹은 특이한 일이 일어나도록 지시하고 있다.
보통의 판정에서는 뇌절을 자제하고 평이하게 처리하는 것을 권장하되
창의력을 발휘해야 할 때 확실히 발휘하라는 의도인 모양이다.
이런 주사위의 성공률 분포가 어떻게 되는지 시뮬레이션 돌려 볼까 했는데
코드 짜다 귀찮아져서 때려치웠다.
이렇게 특이한 판정법을 쓰는 이유가 설마 정규분포가 싫어서겠냐고.
다른 메카닉과의 상호작용을 위해서지.
그래서 대관절 그 메카닉이 무엇이냐 하면...
2) ‘기세’와 ‘우선권’ 등 서사적인 범주 바깥에서 작동하는 자원관리 메카닉이 존재
바로 이 ‘기세’ 때문이다.
기세는 +2에서 시작해서, 이점 확보 액션이나 기타 다양한 수단으로 얻을 수 있는 자원으로,
‘기세 불태우기’를 통해 쌓아놓은 기세가 +2로 되돌아가는 대가를 지불해
판정에서 기세보다 작은 달성 주사위를 말 그대로 없던 것 취급해 버리는 효과를 갖는다.
기세 불태우기의 재미있는 점은 역시 행동 주사위와, 이에 적용되는 수정치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데 있다.
던월처럼 +1~+2의 수정치를 추가하여 상수와 비교하는 판정법에서는, 기존 수정치와 합쳐져 주사위의 정규분포 곡선을 자르기 때문에
이런 수정치를 추가하는 것의 효과는 ‘이미 수정치를 많이 받은 캐릭터’에게 더 유리하게 작용하며,
따라서 약점을 노오력으로 극복하는 방식이 아닌, 이미 유리한 판정에 온갖 수정을 덕지덕지 더 붙여서
부분 성공의 페널티조차 피하려고 하는 식으로 작동하기가 쉽다.
또한 소소하게는 PL이 내심
‘기회 만들기에 따른 수정치가 없었어도 성공했겠네’
‘덕분에 대성공이 되긴 했지만, 이 상황에서는 그냥 화살 좀 썼다고 해도 상관없지 않았나...’
식으로, 마치 주사위가 난수 고정이라도 되어 있던 것처럼 착각하고 혼자서 실망하는 뻘짓을 한다는 문제도 있다.
그런데 기세 불태우기는 이런 점에서 꽤 메리트가 있다.
기세가 충만하다면, 그리고 운 좋게도 두 주사위가 전부 기세보다 작다면
내 수정치가 +0이라도 실패를 즉시 대성공으로 만들 수 있으며
충분한 기세가 차 있는 상황이라면, 어지간히 운이 안 좋아서
도전 주사위가 둘 다 10이 나오거나 하지 않는 한에야
기세를 태워 부분 성공 정도는 받을 수 있다고 계산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게 플레이 동안 쌓이고 소모되는, 관리 가능한 자원이라는 점이 PL에게 크게 와닿는다.
이런 식으로 서사적인 기점을 만들고, 그걸 룰적으로 해석하는 건 페이트의 면모 역시 마찬가지지만
전투 상황을 상정해서 면모를 만들어놨더니만, 정작 상황은 협상 중심으로 흘러가서
운명점이 쌓여 있다 해도 ‘이걸 대체 어케 발현하냐???’ 같은 막막함뿐이었던 경험을
페이트 초보자라면 다들 한 번쯤 겪었으리라.
그런데 기세는 그런 서사적인 부분이 ‘그냥 당신은 기세를 탔습니다’로 퉁쳐진다.
격투 중 방의 촛불을 전부 꺼버리는 이점 확보를 해서 얻은 기세로
텍섹에서 기세 불태우기를 해도 무방한, 상당히 게임적인 메커니즘인 것이다.
물론 이것이 서사룰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정교하게 만드는 것, 아다리가 맞아들어가는 재미로 보면 좀 어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사룰에서 보통 초보들이 느끼는 어려움이 뭐가 있는지 생각해 보시라.
실제로 도움이 되는 행동이 뭐일지 고민하기, 하고 싶은 액션이 능력치와 안 맞아서 망하기,
서사적으로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장면이 있는데 개같이 멸망해서 이야기가 파탄 나기...
기세는 이런 함정들을 상당히 보완해 줄 수 있는 룰링이다.
서사적으로 어떻게 쓰일지를 생각할 필요 없이,
그냥 지금 PC가 할 법한 행동을 기깔나게 하면 마스터가 기세로 보상해 줄 수 있다.
능지캐가 싸움을 한다던가, 근육뇌가 은신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도
충분히 기세를 쌓아놓았다면 한 번은 어찌 통과가 가능하다.
그리고 그 장면이 서사상에 꼭 필요한 장면이라면, 마스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런 이유로 디자이너는 기세라는 메카닉을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왜 추정이냐고?
그야 플레이 중에 기세를 아무도 못 써 봤으니까 그렇지...
그 외에도, 기존 서사룰에서 초보자가 다루기 힘들거나 게임 양상을 경직되게 만들기 쉬운 부분을
자원 관리 메카닉을 도입해서 해소하고자 한 부분이 꽤 많다.
이게 제일 두드러지는 게 바로 우선권 개념으로,
서사룰에 없는 일종의 턴 진행을 대신해 전투의 주도권을 추상화해서 다루는 메카닉이다.
턴 플레이어가 있는 건 아니지만, NPC는 아예 액션을 하지 않는 아이언스원의 시스템에서
플레이어가 능동적인 행동을 하는지, 수동적인 행동을 하는지를 지정하며,
판정 결과에 따라서 빼앗기거나 빼앗아 올 수 있는 우선권의 개념은
룰북의 지시만 충분히 따라도 마스터가 전투의 흐름을 자연스레 돌릴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
사실 던월이나 스프롤, 페이트의 전투는
뭐 룰북에서는 초점을 어떻게 돌려야 하고 하면서 재미있게 이끄는 법을 잘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마스터가 실수한다던가, PL 한 명이 의욕과잉이라던가,
정 반대로 비전투 캐릭터가 전투에 나설 건덕지가 없어서 스스로 사린다던가 하는 식으로
졸지에 올드보이마냥 1:17 롱테이크가 되어 버리는 일이 빈번한 게 사실이지 않은가.
그 외에도 보급이라는 자원과 그 증감을 다루는 룰도 꽤 있는 등,
서사룰에서 추상적으로 처리하는 부분들을 PL들이 게임적으로 만질 수 있게 한 부분들이 꽤 인상 깊었다.
3) 전투도, 세션 전체도 포괄하는 ‘진행 동작’
이 ‘서사적인 부분을 메카닉으로 다루는’ 경향의 끝판왕이 바로 진행 동작이라고 생각하는데...
다름이 아니고, 아이언스원은 NPC를 패배시키는 것도, 임무를 달성하는 것도
HP를 깎거나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 한 판정, 전투 종료 액션이나 서약 이행 액션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판정에서는 행동 주사위 대신 지금까지의 진행 트랙의 달성도를 써서 도전 주사위와 비교한다.
아이언스원에서 NPC는 HP는커녕 액션도 없다. 단지 랭크가 있을 뿐이며,
랭크에 따라서 1의 피해를 받았을 때 진행 트랙이 증가하는 정도가 달라진다.
임무 역시 마찬가지로 난이도가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어려운 임무일수록 달성하기 위해 해야 할 노력이 커지는 셈이다.
판정에 성공하면 NPC를 쓰러트릴 수 있고(죽든 물러나게 하든 PL 마음대로), 임무를 성공할 수 있다.
이 룰도 꽤 흥미로웠는데, 이론적으로는 한 대 툭 맞은 적도 운빨로 처리할 수 있고
마을에서 출발자마자 마왕성에 도착하는 것도 된다는 소리니까.
물론 이번 플레이에서는 나 포함 모두가 겁을 먹어서 함부로 이런 액션들을 쓰지 않았지만,
PC들이 NPC를 더 두들겨 팰지, 승부수를 띄울지 결정할 수 있다는 점 자체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던월 전투는 솔직히 판정을 성공해야 겨우 피 조금 깎는다는 기분이 들어서 좀 지루할 때가 많았거든.
또한 이 세션 전체의 진행 상황이라는 것도, 플레이의 진전 상태를
대략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꽤 좋은 장치라고 생각했다.
분명 늦어도 1시에 끝내겠다고 했는데,
진행 트랙 꼬라지를 보면 아 제때 자기는 글렀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말여.
4) 클래스 개념 없이, ‘자산’으로 만드는 캐릭터
말 그대로, 아포엔진 룰에서 정석처럼 여겨지는 클래스 개념이 아이언스원에는 없다.
대신 캐릭터를 만들 때 자산—동료, 길(어떤 분야에 숙달됐는지를 설명하는 개념),
전투 재능, 의식—을 세 개 조합해서 만들도록 되어 있고
경험치를 써서 추가로 자산을 더 얻을 수 있는 조립식 시스템이라, 이런저런 컨셉질에 꽤 유리해 보였다.
특히 플레이어들끼리 자산의 중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투직끼리는 무기를 겹치지 않게 픽한다거나 하는 게 좀 필요하다.
룰에서 보통 클래스를 정해 놓는 이유는,
이런 ‘얘는 할 수 없지만 나는 할 수 있는’ 게 보통 재미있게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거니와
PL의 역할분담, 협력을 이끌어내도록 유도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아이언스원은 그 분담이 강요되는 것 때문에 플레이가 제한되는 게 싫었던 게 아닐까 싶다.
동시에, 모든 PL들이 비슷비슷한 액션을 하더라도, 새 캐릭터를 만들어도 크게 바뀌는 게 적더라도,
판정법과 자원관리 메카닉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거라는 디자이너의 자신감도 느껴졌고.
여기까지가 내가 아이언스원 룰북을 읽으면서 느꼈던 인상깊은 포인트들이고,
이제 플레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2.
내가 괜시리 ‘PC가 악덕 영주의 와카슈도 상대방이었던 걸로 괜찮을까요?’
같은 뇌절을 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동안
다른 PL분들이 먼저 캐릭터를 완성해 준 덕에 캐릭터 만들기가 좀 쉬워졌다.
빈자리를 채우는 식으로 짜면 되잖아.
쟈쿠즈레 코마루는 광대로, 어린 시절부터 아가씨의 웃음을 삶의 기쁨으로 여겼다는 백스를 가졌다.
PL이 순박한 광대를 말투로 표현하는 RP 내공이 장난 아니었던 게 되게 인상깊었다.
기만 관련 판정에 쓰는 그림자에 +3을 투자했고, 전투에서는 슬링을 사용하는 원거리 캐릭터.
자산으로 까마귀 동료를 하나 받았는데 이 까마커의 유틸성이 장난 아니었어서
수틀리면 모두가 까마커부터 찾고 봤다.
댄디에서 레인저의 위상을 챙겨주려면, 일단 패밀리어 소환 주문을 없애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거 같다.
한편 야마나카 츠루기는 닉값을 하는 칼잡이로,
전쟁 고아였던 그를 영주님이 주워 길렀다는 설정이었다.
자신이 지켜줘야 했던 영주님의 따님을 돌려받아야만 하겠다는, 나름 정석적인 서사였는데...
내가 세션 중간까지 이 캐릭터가 당연히 남자일 거라고 여기는 앙증맞은 찐빠가 있어가지고
마스터가 나를 진짜 게이로 의심하는 시선만 더 깊어지고 말았다.
근접 전투와 탱킹에 쓰는 능력치인 무쇠에 화끈하게 +3을 박은 덕에,
전투 방면으로는 눈부신 활약을 보여줬던 PC.
그러면 이 캐릭터들과 차별할 수 있는 컨셉이 뭘까...
능력치 상으로 보자면, 파티에서 비는 부분은
심장(의지력이나 소셜 판정)이나 재치(전문성, 지능, 관찰력 판정)였다.
둘 중 뭘 할까 고민하다가, 역시 소셜 담당은 하나쯤 있어야지 싶어서 심장에 +3을 박기로 결정.
그리고 이제 ‘사회적이고 의지가 충만한 중근세 일본인’으로 적당한 컨셉이 뭘까 고민해 봤다.
음... 댄디 식으로 보자면 지혜랑 매력을 투자하는 클래스면 팔라딘이려나... 팔라딘?
중근세 일본의 팔라딘이라. 제법 힙한데?
이렇게 충동적으로 키리시탄(크리스천) 컨셉이 정해졌다.
길 자산으로 신앙자(매일 기도를 통해 이점 확보를 할 수 있음)를 선택.
그리고 때마침 턀갤에서 맨손 스마이트가 가능하냐는 떡밥이 돌고 있었다. 맨손 스마이트, 이것도 힙한데?
이왕 신앙인, 팔라딘 컨셉질을 했으니 마법도 하나쯤 픽해야 할 것 같았다.
마침 의식 자산 중 ‘예리’라는 게 있었다.
무기를 들고 이것이 죽은 이들을 위해 애가를 부르면 +심장으로 판정해
성공 시 피해 버프가 걸리는 효과의 의식이다. 능력치하고도 맞고, 무엇보다 스마이트스럽다.
마스터에게 이걸 맨손에 적용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고 바로 픽. 성 베드로님, 한 놈 더 올라갑니다!
그리고 맨주먹으로 싸우기로 결심했으니 전투 재능은 싸움꾼을 선택.
근접전에서 +무쇠로 이점 확보를 해서 성공하면 1점 피해도 덤으로 줄 수 있는 효과로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 룰의 핵심이 기세인 것 같았기에, 이점 확보를 많이 해 보고 싶었던 것도 이유였다.
그러면 이제 남들 칼질할 때 왜 맨주먹으로 싸우는지, 어쩌다 남만의 사교를 믿게 되었는지만 설정하면 그만이다.
(에도 막부 이후의 키리시탄 박해까지는 아니지만,
대충 이상한 놈들 정도의 시선은 받을 거라는 마스터의 언질이 있었다.)
일본의 격투기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가라테.
하지만 이 시절일본 본토에는 가라테가 없었다.
가라테는 원래 중국 남권을 류큐인들이 참고하여 만든 무술.
이 시절 가라테카, 아니 티(手) 수련자라면 류큐 출신인 게 자연스러울 터.
그리고 류큐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차별 같은 것도 존재했을 것이고.
반쯤 식민지 출신의 사회 하류층이라 생각해 보면
자신과 같은 하층민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종교에 투신하는 것도 그럴싸하다.
그렇게 영주님의 따님이 박해받던 키리시탄들이나 나환자들에게도 구호의 손길을 내밀었던 마지텐시였다는 걸로 하고
대충 쿠오 바디스스러운 꿈으로 계시를 받아서 구하러 가는 걸로 백스가 정해졌다.
이름을 류큐인스럽게 정하려고 불필요한 삽질을 좀 했는데, 결국 적당히 투박한 오키나와 출신 이름을 찾다가
복화술사 타마키 잇코쿠(玉城 一石) 선생님을 따서 잇코쿠로 정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하나의 반석’이잖아?
앞에서 쿠오 바디스 같은 백스도 썼겠다, 세례명은 베드로로 하자.
그렇게 해서 성씨 대신 세례명을 붙여서 ‘잇코쿠 베드로’ 형제로 결정.
이제 이 컨셉을 어떻게 RP하느냐의 문제가 남았다.
기독교 컨셉질이야 그렇다 치는데, 류큐인을 어떻게 표현하지?
위에서 류큐인스러운 이름 찾겠다고 삽질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시절 류큐 상류층은 카라나(唐名), 그러니까 중국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류큐와 중국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점... 인데.
잠깐만.
해외에서 흘러들어온 육체노동자인데.
평소에 쓰는 이름 말고 중국식 이름이 있고.
외국어를 섞어 쓰는 경향이 있고(류큐어는 일본인들에게 외국어니까).
현지 사람들에게 별로 좋은 취급을 못 받는다... 라...
이거 그냥 조선족 아냐??? 하는 괴상한 생각이 들어버렸고
그렇게 연변 사투리를 쓰는 RP를 하겠다고 정해버렸다.
그렇게 ‘연변 사투리를 쓰는 류큐 출신 격투가이자 키리시탄인 잇코쿠 베드로’로 시트를 완성했고
‘지금 보니 와카슈도 어쩌구보다 이 백스가 뇌절이 더 심한 거 같은데’ 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어쩌랴, 곧 세션 시작하는데.
3.
그렇게 플레이 시작한 세션 도입부의 인상이 어땠냐면
브금이 개쩔었고
배경에 깔아둔 그림도 쩔었다.
첫인상을 브금으로 퉁치는 게 좀 그렇긴 한데...
이게, 마스터가 건져온 동양풍 브금이 뭔가 초점을 잡아줬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면 적당할 거 같다.
내용상에서 뭔가 대단히 특별한 게 있었던 게 아니다. 행복했던 과거를 깔고, 어두운 현재로 돌아오고.
그런데 마스터가 약간 일본 여성 말투라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으로 조곤조곤 묘사를 하고
정말 늙은 사무라이가, 외팔이 낭인이 말하는 느낌으로,
예스러운 분위기 물씬 풍기게 대사를 RP하는 게 뭔가 되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전술했듯이 이 마스터의 조곤조곤 화법이랑 코마루의 순박한 광대 RP가 되게 시너지가 좋았음.
둘이서 합을 맞춰본 적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츠루기는 캐릭터성 자체가 이런 일본풍 칼잡이의 정석 같은 느낌이라서 당연히 잘 어울릴 수밖에 없었고.
그러니까 결국 가장 컨셉이 난해하고 분위기에서 튀는 게 나였다는 거고
솔직히 다른 사람들의 RP에 압도되어서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 좀 두려웠다.
그래도 아무 말도 안 할 수는 없으니, 나름대로 RP를 적극적으로 해 보려고 했는데...
혹시나 조선족 RP 같은 걸 할 생각이 있는,
아니 그냥 자기 모어가 아닌 사투리로 RP를 할 생각이 있는 모든 턀갤러들에게 진심으로 조언한다.
하지마. 왜냐고 묻지 말고 그냥 하지 마...
우리는 윤계상이 아냐...
“너 내가 누군지 아니?”를 글로 적어놓으면, 이게 장첸이 하는 말인지 서울말인지 어케 구별하겠음???
이게 억양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보니, 내가 RP를 하고 있다는 걸 어필하려면 어형 변화를 다 해 줘야 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투리를 그렇게 구현하려다 보니, 이미 이건 연변 사투리도 아니고
엉터리 북한말 종합선물세트가 되어가고 있었다.
다행히도 PL도 마스터도 다 좋은 분들이라 몰입 안 된다고 핀잔을 주거나 하지는 않으셨지만...
당장에 대사 치는 내가 대가리가 깨질 거 같았다.
컨셉 뇌절을 너무 심하게 쳤던 것이다...
너무 간만에 OR을 다시 해보다 보니 감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거 같음.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플레이에 소극적으로 나설 수는 없는 노릇.
대신에 진행에 있어 이것저것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내는 걸로 벌충하기로 마음먹었다.
잡혀간 주군의 따님을 찾아 성에 침투하는 과정까지는 나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검문을 통과할 때도, 위장용으로 갑옷을 훔칠 때도 사람의 이목을 끌 때는 코마루의 까마귀가 대활약했고
나 역시 유대관계가 있었던 NPC와의 소셜 판정으로 경비의 빈틈을 찌를 수 있는 정보를 주워들을 수 있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지나치게 순조로웠다.
내가 판정 하나를 실패하긴 했지만, 보너스 격으로 얻었던 정보 수집 판정이어서 기세를 받지 못하고
손님이 와서 경비가 증강되었다는 불길한 정보를 들었을 뿐, 당장 계획이 수틀리는 건 없었다.
RP적으로는 내가 ‘차라리 그 편이 잠입하기에는 편할 수도 있다’는 궤변을 계속 주워섬겼고.
즉 딱히 기세를 쌓아놔야 되겠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아이언스원에서 기세는 보험의 성격도 가지고 있는 자원이다.
게다가 상황이 계속 침투, 누구 속이기, 대화하기 쪽으로 가고 있으니
전투 위주 캐릭터였던 츠루기에게 비중이 영 분배되지 못하고 있었다. 마스터가 그걸 신경쓰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성 안에까지는 무사히 침투한 우리에게 주어진 난관은, 그래서 연회장까지 어떻게 가는가 하는 문제였다.
여기서 내가 제안한, 부엌에서 요리사를 어떻게 해서 음식을 나르는 척하며 들어가자는 의견은
어떻게 떡 하나라도 얻어먹겠답시고 부엌 근처에서 진치고 있는 아시가루들 때문에 실패.
그리고 츠루기가 제안한, ‘광대, 기생, 차력사로 분장하고
흥을 돋우러 온 사람인 척하자’는 아이디어도 매우 그럴싸했지만...
행동 주사위가 1이 나오면서 개같이 멸망.
기세를 6 정도 쌓아놓았다면 어떻게 부분 성공이라도 만들 수 있었겠지만, 실패가 연달아 두 개가 나오면서
여기서 달리 상황을 모면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마스터는 상황을 위험한 쪽으로 급변시켰다.
그렇게 우리는 대놓고 함정인 곳으로 유도당했다.
4.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ㄹㅇ 프롬겜 보스몹인가 싶은 덩치를 자랑하는 승복의 사무라이, 무사시보 가게토라와
우리를 포위한 요짐보 떼거지였다.
이제는 뭐 싸우는 거 말고는 탈출구가 없는 상황에서...
츠루기는 룰북에 규정되어 있는 액션, ‘원 그리기’를 선언,
저 요짐보 떼거지들과 싸우느니, 차라리 무사시보와 결투로 일대일 맞다이를 까는 것을 선택했다.
맨땅에 헤딩하기 전에 아이언스원의 전투를 한 번 관찰해 볼 좋은 찬스였다.
확실히 우선권 룰은, 다른 서사룰 마스터링 하는 사람도 한 번쯤 응용해 볼 만한 좋은 시스템이었다.
공방을 주고받는 상황을 자연스레 묘사하면서도, 플레이어에게 선택과 묘사의 여지를 많이 준다는 느낌이었음.
아이러니한 이야기지만 던월은 액션의 결과에서 ‘사소한 대가를 받습니다’ 같은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단어를 쓰다보니
PL도 마스터도 ‘잠깐, 이걸 이렇게까지 했다고 서술해도 되나?’ 하면서 망설이게 되는 지점이 분명 있다.
그런데 아이언스원은 그 결과로 ‘주도권을 빼앗긴다’, ‘심장이나 영혼에 -1’ ‘기세에 -1’ 식으로
구체적인 룰적 지시를 하고 있기 때문에,
묘사가 제한되는 만큼 그 안에서 더 명확한 묘사가 가능해진다는 감각이 있었다.
부분 성공에다가 엄청 강력한 피해 묘사를 해도 상관없다.
단지 그 일격에 너무 진을 뺀 나머지 우선권을 빼앗겼을 뿐이지.
그리고 츠루기의 PL도, 마스터도 전투 묘사를 치열...아니, 처절하게 잘 했고
중간에 조류 바꾸기 액션까지 써 가며 화끈하게 싸웠던 덕에,
플레이하는 게 아닌 구경하는 입장에서도 박진감이 넘쳤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면,
츠루기의 PL이 기본적으로 기세를 쌓는 것보다는 대미지를 우겨넣는 것에 더 집중했다는 점.
합리적인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츠루기는 무쇠에 +3을 박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행동 주사위의 값이 높다.
그리고 기세는 행동 주사위를 무시하는 작용이므로, 실패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오히려 더 낮은 능력치를 써 가며 높은 능력치의 보험을 준비하는 건 비효율적인 행동이 된다.
‘행동 주사위보다는 높지만 기세보다는 낮게 도전 주사위가 걸칠 확률’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이야기다.
미리 기세를 조금이라도 쌓아 놓았다면, 전투 중에 자연스럽게 쌓이는 기세에 조금 보태서
도전 주사위가 다 낮게 나왔을 때 대성공을 노리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앞서서 정보 수집이나 이점 확보도 하지 않았고, 캠핑 관련 룰은 쓰지도 않은 우리는 기본 기세 +2에 머물러 있는 상태였기에,
이제 와서 기세를 쌓는 것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간이라는 변수가 츠루기의 PL이 맞딜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다른 플레이어 두 명이 응원만 하고 있으니 빨리 끝을 내야겠다는 생각도 했겠지만...
이 시점에서 이미 11:30, 마스터가 예상했던 종료 시간(00:30)이 거의 다 되어가는 지경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든 빨리 딜을 우겨넣고,
운빨로 우선권을 얻어서 전투 끝내기 액션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5.
그렇게 무사시보를 정정당당한 결투로 쓰러트리는 데 성공한 츠루기였지만...
건강 트랙이 1칸밖에 남지 않은 누더기 꼴인데다 칼까지 부러진 상황.
이거 마스터가 나랑 코마루도 전투 시켜야 하니까 전투 한 번은 더 있을 거 같은데,
이거 괜찮을까??? 하는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다.
한편 무사시보는 그저 요짐보들을 잠시 물려줄 뿐, 이 이상은 해줄 수 없는 듯했다.
본인도 가신의 딸을 빼앗는 짓에 충언이야 해 봤으나 씨알도 안 먹힌 눈치.
이 장면밖에 생각이 안 나네.
아무튼 겨우겨우 도착한 꼭대기에서 아가씨와 재회하고
자물쇠는 코마루가 바늘 두 개로 바로 따버렸다.
다행이였다. 여기서 열쇠를 찾겠다고 돌아다녔다간 정말 밤을 새야 할 뻔했어.
그리고 즉시 빤스런... 하지만
앞에서 그 난리를 쳤는데 안 들켰을 리가.
악덕영주 본인이 병력들을 끌고 추격해 왔다.
본인은 어떻게든 아가씨만이라도 도망치게 하려고, 영주를 붙잡고 늘어지려 해 봤지만
이건 뭐 기세 쌓아놓을걸 같은 소리도 못하겠네;;
이 결과로 기세에 -2를 받아 기세 트랙이 0이 되고 만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우리 어르신께서 구원하러 참전하고
까마커는 오늘도 활약하고 츠루기는 단검을 던지는 와중에
잇코쿠는 보급 자원을 소모해서 최루탄을 준비해 왔다는 판정에 성공,
다들 열심히 주사위를 굴려 가며 다리를 끊고, 탈출에 성공... 했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글에 계속)
주도권 주사위가 정확하게 어떤 느낌인지 알려줄 수 있을까?
너무 즐거운 후기다... 글빨 없는 중생의 완벽한 대리만족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