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TRPG는 RP도 G도 중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은 떼자.

그건 마치, '파스타에서는 소스의 질보다 면의 질이 중요하다' 라는 말을 하는 데 옆에서 '그럼 너는 면만 삶아 쳐먹어 이새끼야'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빌드, 성장, 전투. 존나 중요한 보스에서 TPK가 날 각이 보여 GM에게 던질 피드백을 미리 머릿속에 몇 가지 돌리며 굴린 주사위에서 나온 내츄럴 20.

서사, 대화, 이야기. 항상 모든 대화의 끝에 유쾌한 농담을 껴넣던 바드가 어린 소녀의 죽음에 내뱉은 웃음기 없는 준엄한 꾸지람.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고, 좋은 TRPG에서는 그 양쪽 모두가 갖춰져 있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떤 라그나가 칼을 들고 찾아와 둘 중 하나가 더 중요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네놈 대신 장편 세션의 클라이맥스에 참가하겠다 협박한다고 가정하자.

대단히 애석하게도, 그런 상황에서는 나는 RP가 G보다 훨씬 중요함을 몇 가지 논거로 설명할 수 밖에 없다.


우선 방금 적힌 협박을 들여다보자. '어떤 라그나' 가, 과연 나 대신 클라이맥스에 껴서 어떻게 세션을 망치겠는가?

여러분 십중팔구는, 틀림없이 위대한 여정의 끝에 마침내 PC들이 맞서싸울 만한 적수임을 인정한 어둠의 세력의 주인이 잔을 들어 자신의 정당성을 궤변으로 설파하고, 자신의 세력에 가담한다면 줄 수 있는 보화, 여인, 또 영광에 대해 엄숙하게 선언하는 순간 손을 드는 기사를 상상했을 것이다 : '저기, 일단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아오 아까 먹은 멧돼지 고기가 분명히 덜 익었다니까-'

그렇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등신같은 RP를 하는 건, 등신같은 G를 하는 것, 뭐 예를 들어 어둠의 주인과의 전투에서 16~20이 나와야만 적중시킬 수 있음이 명확해졌음에도 그레이트 웨펀 마스터를 활성화해 25%의 확률을 5%로 낮춘다던지보다 하는 것보다 훨씬 치명적으로 세션을 조져놓는다.

애초에, 라그나라는 명칭 자체가 '처참하게 등신같은 빌드와 적용' 에 맞춰졌는가? '처참하게 등신같은 대사와 컨셉' 에 맞춰졌는가?


혹자는 말할 것이다. 방금의 예시에서는 RP가 너무나도 크게 병신같지만, 그웨마를 켜는 건 그 정도로 병신은 아니었다고.

이를 위해 적절한 병신성의 조율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이것이 설문 가능한 문제가 아닌 이상, 나는 전혀 새로운 예시를 다음 논거로 제시하겠다.

한참 전에 언급한 파스타의 문제로 돌아가자. 즉, 면 없는 파스타 소스와 소스 없는 파스타 면 - 당연하게도 면수에 간을 하는 것 외에 소금을 칠 수는 없다 - 중 무엇이 더 맛있는가?

이를 악물고 분리를 해야만 한다면, TRP인가 TG인가?

우리는 사실 전자를 이미 알고 있다. 주사위 없이 빌드 없이 룰북도 없이 RP만 주구장창 하는 곳. 그렇다. 역극이다. 

역극의 위대함을 논하고자 함은 아니다. TRPG나 역극이나 그게 그거 아님? 이라는 주장을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TRPG에서 G를 뺀 TRP는 어쨌거나 컨텐츠로 분명히 기능하고 있고, 그걸 즐기는 사람도 수천 - 어쩌면 수백? 잘 모르겠다 - 명 정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반대의 경우는, 적어도 내 지식 하에선, 없다. 우리 누구도 트위터, 혹은 카페산 DND라면서 캐릭터도 제대로 안짜고 빌드만 깎은 뒤 RP도 없이 다이스만 굴려재끼는 DND를 보고 '보드게임은 보드게임갤로' 라고 한 기억은 없다. 왜냐하면 그런 걸 즐기는 사람은 없으니까. 


세줄요약

1. 세션을 조져놓고 박제추를 쓸어담으며 턀갤 개념글에 가는 경우는 9할 이상이 G보다 RP를 조짐이다.

2. TRP는 역극으로 성립하지만 TG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다. 

3. 그래서 RP가 더 중요함. 반박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