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루-테루는 하이브의 고위 치유 사제의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잉태된 씨앗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혈통의 고귀함 자체를 떠나 가진 바 능력의 수준이 영 미덥지 않았기 때문에, 잉여인력으로 분류되었죠.
하이브의 사냥감을 운반하고 손질하는 잡일꾼 역할을 수행하며, 자비로운 사냥조의 일원에게 사격술을 배우기도 하던 여느날.
그녀는 여왕의 호출을 받게 됩니다.
사방에 동족의 피가. 여왕의 손에는 으깨진 고위 치유 사제의 머리통이.
그녀가 테루-테루를 부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혈통의 형질. 치료사로서의 몫을 다하라는 명령.
마침 고위 사제의 자리가 비었으니, 자신의 아이를 치료해 준다면, 그 자리를 준다는 것이었죠.
무지렁이 테루-테루가 그것을 해낼 수 있을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테루-테루는 공포감에 덜덜 떨면서 여왕의 명령을 받들었습니다. 명령을 거부했다간, 죽을 것 같았거든요.
다시 생각해보면, 어차피, 명령을 따라도 죽는 건 똑같았겠지만요.
테루-테루는 여왕의 육아실로 내려가, 고귀한 피를 이은 자손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애벌레가 꾸물대며 종양처럼 부풀어오른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런 상태의 동족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여왕에게 고개를 돌리지만, 여왕의 표정은 단호했습니다.
테루-테루가 머뭇거리자, 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비웁니다.
애벌레가 죽으면 테루-테루의 목이 잘려서 내걸릴거라는 경고와 함께 말이죠.
여왕이 뒤돌아선 그 순간. 테루-테루가 손에 힘을 줄 때, 으직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녀는 내려다보았습니다. 손에는 석궁이 들려있었습니다.
조잡한 석궁입니다.
그 나뭇대는 엉망으로 휘어있고, 현도 끊어질듯 조잡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상처를 꿰맬 때 쓰이는 실패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기에, 경계를 사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건 기회였습니다.
테루-테루는.
손아귀에 꼭 쥔채로 감춰져있던 화살 한발과 함께
여왕을 향해 석궁을 발사합니다.
행운이었을까요? 질끈 감은 눈 너머로 여왕의 비명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녀는 서둘러 몸을 숨기고 여왕을 피해 방을 빠져나갑니다.
여왕의 히스테릭한 성격 때문인지 근처에 경비병조차 없어. 다행히도 그녀는 잡히지 않았습니다.
복도를 걷고, 하이브의 위아래로 뻗은 거대한 공동을 타넘어, 수많은 방들을 지납니다. 여왕의 분노한 외침이 점점 멀어져 갑니다.
생각할 시간은 없었습니다. 어느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그녀는 어린 시절 발견해 자신만 아는, 외부로 향하는 버려진 통로에 몸을 비집어 넣고 통과합니다....
정신을 차려보면, 하이브 바깥입니다.
그녀는 뒤를 돌아봅니다. 저 위로 높게도 뻗은 하이브가 태양을 가려, 지상에서 빛을 앗아갑니다.
풀 한포기 없는 대지를 타넘어 가면 저 멀리에서는 일꾼들이 수명이 다해 죽은 동족조차 식량으로 쓰려고 운반하는 게 보입니다.
테루-테루는, 마지막으로 사냥조가 자신을 향해 석궁을 들어올리는 것을 봅니다.
그녀는
뒷걸음질 치다가,
땅만을 본 채
도망칩니다.
그리고 깽창
유리창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발견한 적 없던 무언가의 관문을 통과한 그녀는 한참을 구르며 정신을 잃습니다.
풀숲에 내리앉아, 감겨가는 눈 사이로. 햇살이 따갑습니다.
(대충 이번에 시작하는 월드 위드아웃 넘버즈 다차원 세션 백스라는 내용)
퍼리 ㅅ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