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 앞서, 이 글은 '이 방식이 맞다' 가 아닌 '난 이 방식으로 생각한다' 임을 전제로 두려고 함. 말투가 조금 답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느껴져도, 글의 가독성을 위한 조치일 뿐임을 미리 밝히고 싶음. 매 문장 끝에 ~라고 생각함. 을 붙이긴 어려우니까...



1. 전투란 무엇일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전투란 하나의 상황 제안 방식에 불과함.

다만 다른 상황에 비교해서 그 방식이 조금 직관적일 뿐임.


이게 무슨 말이냐? PC들에게 있어 유일하게 의미있는 재화가 뭘까?

돈? 장갑? 아이템? 다 아님. 오로지 의미가 있는 재화는 단 하나, HP뿐임.

생각해 보자. 돈으로 포션을 삼. 돈으로 장비를 삼. 돈으로 더 안전하고 튼튼한 가옥을 삼. 다른 모든 재화의 목적은 'HP의 소모를 줄이거나 없애는 것' 에 있음.

왜? 그야 HP가 0으로 떨어지면 PC는 끝이 나기 때문임. (물론 흑관문 판정이나, 때로 죽음 이후의 세션을 다루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일반적인 죽음을 하나의 세션 요소로 봤을 뿐, 'PC가 정말로 끝나는 경우'는 엄연히 존재함.)



2. 직관적이라는 게 무슨 소리임? 말 그대로임.

TRPG에 있어 모든 상황들은 궁극적으로 HP라는 재화를 거래함. 예를 들어 보자.

1. 어떤 악덕 NPC가 PC들을 거짓 증거로 협박하고 있음. 이 거짓 증거가 재판장에 도착하면 PC들은 위기에 처할 거임.

2. 고대의 비석에 알 수 없는 언어로 비문이 새겨져 있음. 이 비문을 풀면 전설에 따라 PC들은 고대의 기술이 담긴 장비를 얻게 됨.


먼저 상황 1을 보자. 거짓 증거가 재판장에 도착하면 PC들은 위기에 처하게 됨. 이때 위기란 무엇일까? 사형이든, 재산의 몰수든... 

사형은 HP를 통째로 없애 버릴 거고, 재산의 몰수는 장비들을 없애 HP를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 거임.

그럼 상황 2를 보자. 비문을 풀면 PC들은 좋은 장비를 얻게 됨.

이 장비들은 무엇에 쓰일까? 적을 빠르게 죽이거나, 적의 공격에 버티거나, 위협적인 상황을 일시적으로 넘기는 데 사용됨.

적을 빠르게 죽이거나 위협적인 상황을 넘기면 어떻게 될까? 오게 될 피해가 줄어듦. 피해의 근원이 사라졌으니까.


이해가 됨? 어떤 상황이든, 궁극적으로 따져 보면 암묵적으로 HP가 거래됨. 다만 직접적으로 피해가 가해지지 않을 뿐.

다시 전투를 보면, 여타 상황과 똑같이 흘러감. DM은 HP가 줄어들 것이다, 늘어날 것이다라고 경고하며, PC들은 대응함.

다만 전투에서는 HP가 명시적으로 줄어듦. 1d8데미지를 맞으면 1d8만큼 HP가 까이는 거임.

그러니까 다른 상황보다 직접적이고, 또 그러니 위협적이라고 볼 수 있겠지.



3.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임? 전투가 근본적으로 여타 상황과 똑같다는 건 이해했음. 그래서 뭐...?

이제 그걸 알았으면, 전투를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음.

서사룰을 마스터링함에 있어, 대부분의 DM은 전투를 너무 급작스럽게 제시하곤 함.

'여러분이 산길을 걷고 있을 때, 산적이 나무 사이에서 나타나 여러분을 급습합니다!'

'여러분이 뒷골목에서 햄스트링 자작의 비리를 캐고 있을 때, 슬라이스 햄 모양 두건을 두른 무리가 칼을 들고 나타납니다!' 등등...


이런 제시 방법에는 어떤 전개 방식의 다양성도 없음. 싸우고, 때려눕히고, 나아가게 됨.

전투가 여타 상황과 똑같다는 걸 감안하고 생각해 보면, 이건 '여러분은 길을 걷다가 갑자기 함정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하시나요?' 와 다를 바가 없음.

어떤 위기 상황이 이미 완료된 채로 제시되려면, 전조 증상이 앞서 제시되어야 한다는 소리임.


만약 '2. 그래서 직관적이라는 게 무슨 소리임?' 의 예시에서 전조 증상(위조 증거의 발견)이 없었다고 생각해 보자.

PC들이 재판장에서 열심히 주장하고 있을 때 갑자기 악덕 NPC의 위조 증거가 도착하고, PC들은 재판에서 패배하게 됨.

딱 봐도 불합리하지 않음? 고로시당하기 딱 좋은 전개 방식임. 그런데 우리는 전투에 있어서는 유독 이걸 생각하지 못한다는 말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  


'여러분이 길을 걷고 있을 때... 혜 굴림을 굴려주세요. 몇 걸음 앞에 인위적으로 흩뿌려진 것처럼 보이는 나뭇잎 무더기가 있습니다! (전조)'

'여러분이 산길을 걷고 있을 때, 저 멀리에 있는 나무와 수풀 사이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입니다... (전조)'

'여러분이 햄스트링 자작의 비리를 캐고 있는 모습을, 저 멀리서 슬라이스 햄 문양을 달고 있는 누군가가 지켜봅니다... (전조)'


굴림이 필요하면 굴리면 되고, 굴림 없이도 알 수 있는 묘사라면 묘사하면 됨. 요점은 여타 상황처럼 전투에 전조를 부여해야 한다는 거임.

그래야 PC들이 대응할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으니까. 통행로가 하나밖에 없는 공간인데 전투의 전조가 제시된다면 PC들은 하나뿐인 통행로에 함정을 깔고 수비를 준비하거나, 창문을 깨부수거나 벽에 구멍을 내는 방식 등등으로 후퇴로를 내거나, 전투를 피하기 위해 숨거나 할 수 있겠지.


추가적으로, 다양한 해결 방식을 염두하고 전투를 꾸며 주면 더욱 즐거운 플을 만들 수 있을 거임.

'나무 사이에서 나타난 산적들은... 12세 즈음의 어린아이와 고블린이 섞여 있군요. 아이들은 쫄쫄 굶은 것처럼 말라 있는데, 돌과 나무로 만든 조잡한 무기를 들고 있습니다.' <- 고블린이 아이들을 전투 노예로 삼은 걸까? 고블린과 아이들이 친구가 된 건 아닐까? 애초에 왜 이 깊은 숲 한가운데에 있을까? 등의 의문을 제시하고, 플레이어들이 데미지를 넣기보다는 '"왜 이런 곳에 있니?" 하고 묻습니다.' 등의 다양한 행동을 하게 함. 상황이 흥미롭기 때문임. 


DM이 능숙하다면, 이를 훅으로 활용할 수도 있을 거임. 이 아이들은 사실 햄스트링 자작의 사생아들인데, 햄스트링 자작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PC들을 시기해 사생아들을 시켜 치명적인 거짓 증거를 만들 계획이다...! 등으로.



4. 세 줄 요약 해 주면 안됨? 말을 왜 이렇게 어렵게 함?

1. 전투도 협상, 비석의 수수께끼 풀기, 햄스트링 자작 몰래 뒤쫓기처럼 하나의 상황일 뿐이다.

2. 다만 전투는 여타 상황에 비해 훨씬 직관적이고 빠르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투 전에 대비가 가능하도록 전조 증상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3. 흥미로운 상황을 제시해 전투 자체를 재미있게 만들 수도 있으며, 이를 훅으로 엮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