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게임에서 보이지 않는 벽을 세워 맵 바깥으로 나갈 수 없게 막아놓듯이

RPG에서도 어떤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그 울타리의 정체는 바로 합의다




RPG의 기본적인 합의 중 하나, 즉 개연성을 갖추어 캐릭터들이 할 법한 행동을 한다는 것을 지킨다고 해보자

마스터는 도시를 배경으로 선한 캐릭터들을 위한 모험을 준비했다

선한 캐릭터들이 범죄를 저지를 일은 잘 없을테니, 마스터는 경비대와 감옥을 준비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선한 캐릭터들이 갑자기 도둑질을 해 준비되지 않은 감옥 문을 두드리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좋은 RPG 플레이어라면 합의를 잘 지키므로, 엉뚱한 도둑질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선한 캐릭터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울타리가 하나 만들어졌다




그런데 플레이어들은 합의를 어기지 않고 이 울타리에 얼마든지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질 나쁜 귀족이 시민들을 갈취해 재산을 축척했다고 한다면, 선한 캐릭터들도 충분히 도둑질을 고려할 법하다

이 도둑질이 실패해서 감옥에 가게 된다면 울타리를 마주치게 될까?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그냥 도둑질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선한 캐릭터들은 선한 도둑질을 하기 위한 전제로 질 나쁜 귀족을 만나야만 했다

게다가 질 나쁜 귀족의 등장은 사실 마스터의 명확한 의도를 갖고 있으니, 애초에 마스터가 도둑질에 대비했다는 증거이다

플레이어들이 갈 감옥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기에 플레이는 막히지 않는다

이처럼, 플레이어들이 울타리에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울타리는 멀어지기만 할 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캐릭터들이 하지 않을 법한 행동을 위한 계기, 개연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빌드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빌드업을 시키며 대비할 시간을 얻은 마스터는 도둑질이라는 울타리 밖의 빈 공간에 귀족의 저택, 경비대나 감옥 등을 채워넣어 울타리를 넓힐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플레이어들은 어디로 가도 울타리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니 자유롭다고 느끼게 된다




쉽게 말해 무한한 심리스 월드와 같다

다만, 로딩이 1주일 넘게 걸릴 수는 있다




아무튼, 이런 점을 바탕으로 생각해보자

울타리는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플레이를 가로막지 않는다

자유도는 허상일까?




답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이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울타리는 관측되기 전까지 중첩상태로 존재한다

플레이어들이 울타리를 느끼지 못했다면, 울타리는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는 있었더라도 마스터가 말하기 전까지는 그렇다





그런데 위의 경우는 이상적인 플레이에 한정되므로, 상대적으로 울타리를 마주치게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원인은 다양한데, 합의가 어긋났기 때문일 수도 있고, 플레이어가 제멋대로인 빌런이었을 수도 있고, 마스터가 그냥 잘못했을수도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빌런이 있으니, 두 경우의 확률을 비교해보아 "자유도는 허상이다"의 판정승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당부 하나 하겠다

턀붕이들은 속한 팀이 이상적인 팀이 아닌 이상 작게는 피드백, 상황이 심각하다면 로그와 죽창을 준비하도록 하자

자유를 억압받고 있다면, 그것은 죽창혁명의 때가 온 것이다

만국의 턀붕이들이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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