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인이 좀 늦었음. 정보격차가 큰 이유는 엄청 간단해(실은 작위적인 거임). 펜텍스 배후에 있는 게 웜이니까. 웜과 관계된 모든 괴물들이 펜텍스에게 필요한 정보를 비밀리에 제공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야. 그러니까 사실 펜텍스는 뱀파이어, 늑대인간, 마법사, 요정, 귀신, 기타 등등에 대한 정보에 다 접근할 수 있어. 심지어는 미이라들 중에도 베인 미이라라고 해서 펜텍스와 맞닿은 애들도 있다. 게다가 애초에 펜텍스는 인간문명을 이용하고 내부로부터 약화시키기 위해서 웜이 선택한 도구이다 보니, 인간과 맞닿은 다른 괴물 조직에 대해서는 성립 초기부터 이미 정보수집을 하기 시작한 경우까지 있어. 즉 펜텍스 자체가 감시와 통제를 위한 웜의 도구이다 보니 다른 괴물들과 대비시킬 때 정보격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


 이건 심지어 상대가 테크노크라시일 때도 마찬가지야. 펜텍스 계열사 중 일부는 테크노크라시가 어떤 이유로 직접 키웠거나 투자한 회사였기도 해. 자기네의 이익추구와 효율화를 위해서 손을 쓰다 보니 어느새 펜텍스 계열사 반열에 합류한 거지. 이런 자의적/타의적 합병이 천천히 조용히 일어나다 보니까 대개의 테크노크라시는 펜텍스가 인류의 퇴락 같은 별 뜬금 없는 목적을 위해 고의로 세계를 오염시키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별로 안 해. 문제는 펜텍스에 스며든 초자연적 존재들의 영향이 어느 정도고, 그 영향이 자기들의 계획에 얼마나 걸림돌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거지. 그런데 최소한 Revised 판까지 테크노크라시는 펜텍스가 허용 가능한 범주의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지속적으로 펜텍스를 감시/통제할 요원들을 보내는 정도로만 손을 대는 거지. 20주년 기념판에서는 어떻게 바뀌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엄청 큰 변화가 있지는 않을 듯.


 그럼 테크노크라시 요원들은 펜텍스의 실체에 대해서 파악을 못할까? 대개는 둘 중 하나야. 진짜 파악 못하는 경우도 있고, 파악하는 도중에 웜에 오염되서 테크노크라시의 대의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지. 전자의 경우는 이전 글에서 대충 설명했으니까 넘어간다. 애초에 펜텍스의 베인들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 대단히 은밀하고 선택적이기 때문에 쉽게 파악하기 힘들다는 거임. 특히 테크노크라시의 약점인 "영성"과 관계된 방면이기도 하고. 또 펜텍스 계열사들은 이러한 영적 방면에서 소통하기 때문에 일반적 방법으로는 계열사들 사이의 유기적인 관계와 본질적인 목적을 알아내기는 힘든데, 거기에 더해서 펜텍스는 자신들의 진의를 감추기 위한 위장사업을 대단히 많이 벌임. 물론 실제로 자기들의 이익추구를 위해서 벌이는 "적당한 수준의 부패와 악질사업"도 있고 말이야. 그래서 얘들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핵심 임원진에 들어가서 그들 중 일원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핵심 임원진으로 올라간 애들은 웜의 영향에 직접 노출된다는 거야. 아마 펜텍스가 웜의 직속기구라고만 하면 어느 정도로 연관성이 있는지 파악이 안될 수도 있는데, 대충 이런 정도야. 임원 중에 캐서린 몰렛이라는 여자가 있다. 20주년 기념판 시점에서도 임원 중 하나임. 그런데 얘는 디파일러 웜에게 직접 선택받은 인간이야. 비지니스계에서는 대놓고 초인으로 불림. 16살에 조기졸업해서 대학에 들어갔고 20살이 되기 전에 심리학 석사학위를 취득했어. 거기에 더해서 직접 웜에게 특별한 힘도 얻었는데, 이건 누가 하는 얘기를 들으면 그 배후에 있는 사실관계를 직관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는 거야. 테크노크라시 요원이 임원진에 들어왔어? 몇 마디만 해보면 배후에 있는 조직과 목적을 알아버린다. 그런데 더 웃기는 건 얘는 그냥 인간이라는 거야. 물론 20대 중후반부터 슬슬 변이의 조짐이 나타나기는 했는데, 일단은 마법사도 아니고 포모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뉴미나가 있는 것도 아니지. 그래서 대부분의 웜에 특화되지 않은 초자연적 감지는 이 여자한테 먹히지가 않아. 그리고 펜텍스 임원진에는 이런 인간이 몇 명 더 있다. 펜텍스 임원진이 이렇게 강하고 훌륭하다는 게 아니라, 이 정도로 웜의 직접적인 영향과 비호를 받고 있다는 얘기야. 새 임원이 이너 서클에 낀다? 그는 바로 웜의 눈에 들어간다. 웜의 애완동물을 건드리는 놈은 무사할 수가 없어.


 테크노크라시는 아니지만, 엔조 조반니라는 뱀파이어가 펜텍스 임원진에 들어가서 보드를 쥔 적이 있었어. 당시에 베네치아의 조반니 클랜은 펜텍스가 잠재적인 위험이라고 판단했고, 내부에 자기네 사람을 심어서 펜텍스를 약화시키고 자기네 꼭두각시로 삼고 싶어했거든. 그래서 엔조 조반니라는 이름의 안실라가 파견됐어. 장로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얻은 그는 그리 힘들지 않게 펜텍스의 임원 후보까지 올라갔고, 결국에는 보드를 쥐게 됐다. 하지만 그는 곧 임원들 사이의 경쟁에 끼고 말았어. 기존 임원들 중 일부는 엔조를 약화시키기 위해 그가 지닌 계열사의 가치를 하락시키기 위한 음모에 착수했고, 어떤 놈들은 아예 엔조에 대한 정보를 늑대인간들에게 풀어서 공격을 받게 했어. 물론 늑대인간들은 엔조가 웜의 사도라고 생각해서 거의 죽이기 직전까지 쫓아왔지. 그런가 하면 어떤 임원들은 기존의 경쟁자들에 대적하기 위해 엔조에게 동맹을 제안하기도 했어. 이런 혼란 속에서 엔조는 자기 힘의 한계에 대한 절망, 공포, 탐욕, 질투, 증오, 분노를 키우면서 저도 모르게 웜의 영향 하에 들어갔어. 어느 순간부터인가 엔조는 베인들의 목소리를 듣게 됐고, 자기 야심을 위해 웜의 힘을 받아들였으며, 클랜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웜을 위해 헌신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클랜에는 웜의 허용하거나 의도하는 선의 정보와 자원만을 제공했지. 하지만 클랜은 이런 내막을 모른 채 그냥 엔조가 시킨대로 펜텍스에 잘 잠입해서 정보와 돈줄을 물어오기 시작하니까 잘된 것으로 생각했지. 고작 인간들의 대기업일 뿐이잖아? 클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능란한 뱀파이어가 직접 들어가면 쉽게 휘어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또 결과적으로도 그렇게 믿었던 거야. 하지만 실은 아니었지. 이런 방식으로 인간이든 괴물이든 펜텍스 임원이 된 애들은 빠르게 웜의 노예가 된다.


 그리고 만약이지만, 일단 펜텍스의 정체가 파악되면 거 까짓 거 테크노크라시가 얘들 없애버리고 다른 대기업으로 대체할 수는 없냐는 얘기. 우선 펜텍스의 정체가 공공연하게 드러나게 될 가능성은 Revised 때까지는 없다고 보면 됐음. 이건 설정의 정합성 문제가 아니라 메타게임적인 이유야. 펜텍스는 현대문명의 무한한 물질적 욕망을 이용해서 인류를 타락시키는 흑막기업임. 근데 흑막의 정체가 드러나면 더 이상 흑막일 수가 없다. 정체가 드러나면 펜텍스라는 대적의 의미가 엄청 퇴색하거든. 그래서 일단 펜텍스가 대놓고 정체가 드러나서 렌치 맞을 일은 없을 거라고 봐도 된다. 하지만 그래도 만약... 만약에라도 테크노크라시가 공공연하게 펜텍스의 정체와 진정한 목적을 파악하고 집단차원에서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고 치자. 뭐 그럼 내 생각에는 결국 테크노크라시가 전체적인 구조를 뜯어서라도 펜텍스를 와해시킬 수는 있을 것 같다. 어쨌든 테크노크라시는 개념적으로나마 현대문명의 틀을 쥐고 있는 애들이라서, 어떻게든 깽판을 쳐서 결국 펜텍스를 약화시킬 수는 있을 거 같아.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대체"라거나 하는 식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어.


 자주 나오는 얘기로 "에에 돈이나 주식가치 같은 건 그냥 NWO랑 신디케이트가 계산기 두드리면 끝나는 거 아니에요? 현대에는 돈과 정보의 흐름을 쥐는 애들이 짱이잖아요!"라고들 한다. 근데 안 그래. 정필모씨 말 맞다나 계획/개념경제가 실물경제의 한계랑 따로 놀면 언젠가는 그 간극의 모순이 터지게 된다는 것도 있고, 실무에서의 역량도 무시할 수가 없으니까 말이야. 당장 펜텍스가 반세기 동안 석권해오던 여러 분야의 사업들에 대규모 조정을 가해서 경쟁사들이 펜텍스의 자리를 뺏게 한다고 치자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펜텍스가 지금까지 맡고 있던 경제적 역할이 온전히 위임되는 게 아니야. 당장 마이크로소프트 망하게 하면 기존 윈도우/익스플로러 체제는 어떻게 될까? 골드만삭스 망하면 금융흐름은 어떻게 되고? 대체재가 있다고 치더라도 그 전환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과 혼란이 초래되겠지. 이베이가 갑자기 망하면 아무리 대체재가 등장한다 해도 중고거래 경매량이 주춤하는 건 피할 수 없어. 또 대체재가 기존 기업 만큼 효과적으로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거고. 아무리 같은 돈 쥐어주고 같은 역할을 맡겨도, 일하는 사람과 기업철학이 다르면 세부적인 사항에서는 다르게 돌아갈 수밖에 없어. 그러니 결과적으로 펜텍스를 제거한다는 건 대체재가 있다고 해도 대단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모험인 거야. 펜텍스가 대단히 작위적일 정도로 여러 굴지의 계열사들을 거느린 것도 어떻게 보면 "함부로 개기지 마라"라는 제작진의 의도인 셈이지. 아, 그리고 물론 펜텍스 자체의 저항도 감수해야지. 테크노크라시가 짜놓은 테이블에 맞춰서 그냥 현실이 바뀌는 것도 아니거든. 펜텍스는 물론이고 그냥 보통 인간들도 자기네 의지와 탐욕에 따라 움직일 수 있어. 테크노크라시가 "펜텍스 너네 망함. 그리고 수면자들은 앞으로 다른 대체재 사용해라." 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냥 그대로 흘러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임.


 그런데 테크노크라시 입장에서는 펜텍스를 건드리면 패러다임에도 타격을 받는다. 뭐 M:tA에서의 패러다임이 거창한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아주 단순한 것도 포함임. 전화기 처음 나왔을 때 테크노크라틱 유니온 소속이었던 VA가 존내 열심히 투신했던 비공식적 업무 중 하나가 장난전화였을 정도야. 전화기라는 물건의 기능과 가치를 수면자들한테 각인시키고, 그들의 일상 속에 전화기를 끼워넣기 위해서였지. 그런데 전세계 정상급 기업 21개와 그 산하 계열사 및 하청업체들을 다 박살내고 대체시킨다고? 할 수야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절대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사실상 부분적인 자폭이지. 그러면 그 틈을 타서 트래디션이나 여타 다른 잡스러운 마법사들이 기회다 싶어서 이상한 짓을 할 테고, 테크노크라시한테는 그게 제일 가시적인 위협이야. 결국 테크노크라시의 최고 관심사는 패러다임이고 최고 주적은 자기네 패러다임을 위협하는 놈들이거든. 이 관료주의적인 놈들은 조직논리에 입각해서 움직이지 단순히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쉽게 칼을 빼들지 않아.


 이래저래 두서없이 말이 길었네. 하지만 사실 제일 중요한 건 메타게임적으로 펜텍스가 테크노크라시의 주적이 아니라는 거야. 가끔 One World of Darkness 얘기 나오는 거 같은데, 그래봤자 지금 당장은 마찬가지다. One World of Darkness는 그냥 데이터호환하고 대충 라인별로 접점있는 애들 설정 대충 써준다고 완성되는 게 아니야. 너네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이 One World of Blizzard라고 생각 안 하지? 물론 히오스에 트레이서랑 테사다가 같이 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오버워치랑 스타크래프트는 아예 다른 분위기와 다른 주제를 가진 게임이니까. WoD도 마찬가지야. 뱀파이어는 인간성에 고뇌하며 내면에 침잠하는 외로운 괴물들이고, 늑대인간은 기본적으로 무리생활하며 세상을 오염시키는 적들에 맞서 피비린내나는 전투를 치르는 전대물임. 체인즐링은 지나가버린 장밋빛 아지랑이의 환상에 취한 채 남고 싶은 씁쓸한 동화고. 레이쓰는 후회, 희망, 발버둥에 대한 내용이지. 근데 이렇게 상이한 주제를 가진 게임들을 단지 한 장소에 몰아넣는다고 해서 진짜로 한 덩어리가 되지는 않아. 따라서 W:tA의 대적으로서 의미를 갖는 펜텍스와 M:tA의 대적(이제는 주인공으로도 쓸 수 있지만)으로서 의미를 갖는 테크노크라시가 존립을 걸고 싸운다는 건 애초에 WoD라는 게임을 현실적으로 보지 않고 플러프놀음하는 꼴이라는 거지. 그래, 지금 내가 하는 짓 말이다.


 그러니 내가 쓰는 글들은 대충 재미삼아서 "아 지금까지 나온 설정들 갖고 보면 대충 이런 것도 있구만"하고 넘겨. 진지하게 테크노크라시가 펜텍스 근절시킬 수 있냐는 얘기는 사실 넌센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