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PG를 하다보니 바람직한 선택지란 무엇일까 하는 고민이 생겼다. 선택지를 통해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자유로운 롤플레잉을 즐기는 게 TRPG의 매력인데, 선택지가 없으면 레일로드 시나리오가 돼버리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괴물 퇴치 의뢰를 수행하러 가는 시나리오를 플레이 중이라고 생각해보자. 갈림길의 왼쪽 길에는 땅벌레 발자국이 있고, 오른쪽에는 고블린 발자국이 있다. '그냥 아무데나 가면 안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가? 이런 선택지는 굳이 제공할 필요가 없다.
반대로 플레이어의 주도적인 진행으로 추가되는 선택지는 플레이에 깊이를 더해줄 수 있다.
마스터 : "여러분은 고블린 부락을 정찰 마법으로 조사하였습니다. 덩치 큰 족장과 지팡이를 든 주술사가 이끄는 부락입니다. 두 지도자는 야영지 중앙에 있는 천막에 상주하고 있습니다."
플레이어 1 : "주술사는 근접전에서 약할 것 같은데 내가 투명화를 써서 천막에 잠입해 볼까?"
플레이어 2 : "나한테 롱보우가 있으니 멀리서 지도자를 저격하는 게 더 안전할 거 같아. 고지대에서 이점 받고 공격할 수 있을까요, 마스터?"
플레이어의 행동에 의해 새로운 정보를 얻어냈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전략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정보도 사실은 마스터가 미리 준비해 온 설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이 능동적으로 행동해서 얻은 정보이기에 플레이에 몰입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자유도를 빙자한 무의미한 선택지를 내밀기보다는, 필수 정보 조금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하는 게 더 낫다. 왜냐하면 선택지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행동이 플레이에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어의 행동이 플레이에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핵심이라는 말에 백 번 동의함. 그런데 제시한 예시는 그저 정보의 부족 때문에 흥미롭지 않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봄. 예시에 플레이어들이 토론에 쓸 만한 자원이 있음?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땅벌레니 고블린이니는 그저 문자의 나열에 불과함. 생각해 보셈. 플레이어들이 여기서 주장할 만한 의견이 뭐가 있겠음? 고블린이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드니까 잡으러 가자?
그런데 여기서 '땅벌레는 홀로 생활하지만 강하고 위협적인 상대이며, 고블린은 무리지어 생활하지만 개체 개개인은 그리 강하지 않다' 라는 정보를 추가하면 어떻겠음? 이때부턴 의미 있는 토론이 시작될 거임. 우리 위자드의 광역 주문이 있으니 다수를 상대하는 게 낫다, AC가 높은 파이터를 앞세울 수 있으니 땅벌레를 잡으러 가자... 여기서부터는 내 생각인데, '진행을 늦추는 선택지' 가 가장 문제인 선택지라고 생각함. 충분한 시간이 있으면 양쪽 모두를 고를 수 있는 선택지. 선택지는 오롯이 한 번 제시될 때 의미가 있지, 던전의 왼쪽 굴로 들어갔다 살펴본 뒤 나와서 오른쪽 굴로 들어갈 수 있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음?
GM이 선택지를 만들어낼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그 부분일 거임. 플레이어가 양쪽 모두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인상을 줘서는 안 됨. 선택은 오로지 한 번 뿐일 것이고, 던전의 왼쪽 굴로 들어가면 오른쪽 굴의 입구는 무너지는 거임. 둘 다 갈 수는 없음. 그게 선택지를 제시할 때 우리가 암묵적으로 확실시해야하는 부분이고, 플레이어들도 이를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