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관련하여, 옛날에 쓰다 만 설정을 하드 구석에서 발견했다. D&D 3.5가 끝물이었고, 패스파인더가 나오기 전에 만든 설정이니 아마 7~8년 쯤 전이었던 듯.


이제 와서 이 설정으로 캠페인을 돌릴 일은 아마 없겠지만, 걍 재미 삼아 봐 줬으면 함. 사실 이런 걸 턀갤에 올리는 이유는 일하러 가기가 싫어서다. 좀 길어서 두 부분으로 나눠 올림.


------------------------------------------------------------------------------

1. 창생

  태초의 우주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 속에서 음(Negative Energy)과 양(Positive Energy)이 혼돈과 더불어 한 데 뒤엉켜 있었다. 이 세계의 시원(시간이 존재하지 않을 무렵이니 ‘시원’이라는 표현은 다소 부적절하지만)에는 다만 음과 양, 그것이 한데 뒤섞여 있는 상태 그 자체인 혼돈 뿐 신들마저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것은 있었다. 그것들을 ‘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미묘하다. 그 존재들이 거대한 힘과 불멸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신과 비슷했다. 그러나 신자들의 신앙심에 의해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하고 고양시키는 것도 ‘신성의 불꽃’에 근원을 둔 것도 아니라 창조된 바 없이 처음부터 스스로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일반적인 신들과 달랐다-관점에 따라서는 반대로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신’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들은 음양이 뒤엉켜 있는 상태의 우주적인 혼돈 그 자체의 화신일지도 모르고, 혹은 음과 양 자체보다도 이전부터 있어 온- 진정한 의미에서의 만물의 창조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까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을 편의 상 ‘선주신(Primeval God)’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음은 어둡고 무거운 것이며,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양은 밝고 가벼운 것이며, ‘위로’ 떠올랐다. 이 무렵부터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기 시작했다. 음 에너지 계와 양 에너지 계가 그렇게 분리되었고, 양 에너지 차원에서 불의 원소계와 대기의 원소계가 갈라져 나왔다. 음 에너지 차원에서는 물의 원소계와 땅의 원소계가 갈라져 나왔다. 그렇게 내계(Inner plane)가 탄생하고 아스트랄 계가 각 차원들을 둘러쌌다. 음 에너지 계와 양 에너지 계, 거기서 비롯한 4대 원소계 사이의 중심 영역- 각 차원의 에너지들이 균형 잡힌 우주 가운데서 그림자 계 및 에써릴 계와 겹쳐진 형상으로 주물질계가 탄생했다. 음과 양이 분리됨으로써 Law의 초석이 최초로 마련되었고, 주물질계가 탄생하며 Chaos 가운데서 태어난 Law의 첫 번째 결정체가 맺어졌다. 

  선주신들은 육체를 가지고 갓 태어난 주물질계를 거닐며 자신들끼리 거대한 전쟁을 벌였고, 마치 부싯돌을 부딪치면 불꽃이 튀듯이 그 힘과 힘의 충돌 가운데서 ‘신성의 불꽃’이 피어올라 그로부터 이른바 ‘1세대’ 신들이 태어났다. 원래대로라면 단순한 ‘힘’에 불과할 뿐이던 것이 어떻게 자아와 의지, 그리고 감정을 가진 신들을 창조했는지는 신들 자신마저도 알지 못한다. 선주신들의 맹목적인 파괴 가운데서 이제 갓 태어난 이 세계 자체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선주신들이 남긴 힘을 재료로 해서 신들을 탄생시킨 게 아닐까 추측만 할 뿐. 이질적이고 공허한 선주신들은 주물질계에 대해 어떤 애착이나 흥미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전쟁 과정에서 주물질계를 비롯한 다른 차원들이 얼마나 황폐화될 지에 대해서도 무관심했다. 선주신들이 자신들 간의 전쟁에 정신이 팔려 있던 사이 1세대 신들은 선주신들을 저지하고 갓 태어난 이 세계를 지켜야 한다는 것에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본질적으로 선주신들이 남긴 에너지의 편린에 불과한 이들이었고, 게다가 이제 갓 태어난 참이었기에 저 강력하고 불가해한 선주신들에 대해 직접 맞선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1세대 신들은 주물질계를 벗어나 저 머나먼 내계 너머, 아직 음과 양이 채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채로 혼돈이 휘몰아치고 있는 공허의 장소에 터전을 마련하고는 신중히 스스로의 힘을 키우며 선주신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이 때 1세대 신들이 머문 장소는 훗날 신들의 터전인 외계(Outer plane)의 근원이 된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어떤 목적도 의도도 없이 다만 그 자체를 위해 수행되는 것 같은, 선주신들 간의 전쟁은 장구한 세월 동안 계속되었고 전쟁터가 된 주물질계는 그 막대한 에너지에 휩쓸려 끝없이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개중에는 선주신들의 에너지에 밀려 사라지지 않은 채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 가고 있는, 두 가지 형태의 ‘생명의 가능성’이 있었다. 1세대 신들은 선주신들의 힘에 강한 저항력을 가진 이 두 ‘생명의 가능성’들이 선주신들에 대한 항쟁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리라고 예상하고, 꾸준히 발전시켜 온 그들의 힘을 이용해 각성시키고 진화시켜 완전한 정신으로 이끌었다. 페러스 드래곤들과 엘더 타이탄들의 첫 탄생이었다.  


  2. 반역, 그리고 분열

  충분히 힘을 키웠다고 판단한 1세대 신들은 페러스 드래곤들과 엘더 타이탄들을 앞세워 하늘의 별들만큼이나 많은 군세를 일으켰다. 선주신들은 하나하나가 압도적인 힘과 권위를  가지고 있는 거대한 존재들이었으나 서로 협력한다는 개념이 없었고, 1세대 신들의 조직적인 공세 앞에 하나 둘 패퇴하기 시작했다. 1세대 신들 중에서도 많은 이들이 이 전쟁 가운데서 소멸했고, 그들을 구성하고 있던 에너지는 흩어져 차원들 틈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결국 승리를 거둔 건 1세대 신들이었고, 선주신들은 몰락하여 외계 너머, 만물이 실존성을 얻지 못한 채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는 머나먼 공간으로 유폐되었다-이 공간은 훗날 변원계(Far realm) 혹은 차원 소용돌이(Planar Vortex)로 알려지게 된다-. 살아남은 1세대 신들은 자신들의 본거지와 그 너머 사이의 경계 구역에, 자신들이 거하며 추방된 선주신들을 감시하기 위한 장소로써 내계들과 주물질계를 둘러싸는 형태로 외계를 창조했다. 주물질계는 선주신들로부터 안전해졌지만 아직 남은 문제들이 있었다. 

  1세대 신들은 선주신들이라는 거대한 공통의 적 앞에서 단결했으며, 협력하여 승리를 얻었다. 그러나 그들은 저마다 다른 성격과 가치관, 그리고 이제 안전해진 주물질계를 어떤 식으로 발전시켜 나갈지에 대한 저마다 다른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까지는 선주신들의 격멸이라는 공통 목적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았던 1세대 신들 간의 갈등과 알력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세대 신들은 크게 세 세력으로 갈라졌다. 

  첫 번째 세력은, 주물질계야말로 혼돈의 심연 가운데서 떠오른 Law의 결정체나 다름없으며 마땅히 모든 것이 단일한 섭리 아래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완전함을 이뤄나가야 하고 신들인 자신들이 그런 세계를 만들어 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 이들이었다. 

  두 번째 세력은, 우리들(1세대 신들)역시도 우연히 태어난 존재들이며, 혼돈과 불확실성이야말로 창조와 발전의 원동력이고 자신들은 신으로서 그를 확산시켜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었다. 

  첫 번째 세력은 우주의 본질이 혼돈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걸 그대로 놔두면 자신들이 신으로서 지성과 자아를 가지고 있는 의미가 없으니 보다 더 낫고 올바른 곳으로 바꿔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두 번째 세력은 신들도 옳고 그름의 기준을 멋대로 재단할 권리는 없으며 우주는 본연의 모습 그대로 가치가 있다고 맞섰다. 이러한 논쟁은 ‘세계 속에서 신들이 왜 존재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신을 만든 세계는 무엇을 지향하며 어떻게 되어 갈 것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양쪽 어느 편도 들지 않은 채 아마도 복수를 꿈꾸고 있을 선주신들을 감시하고 주물질계를 보호하는 데 역점을 두거나 적절한 수준에서 양쪽의 견해를 절충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신들이 세 번째 세력을 이뤘다. 신들의 이러한 대립은 다시 우주와 차원을 변화시켰다. 차원의 근본적인 구조 자체는 변하지 않았으나, 자신들이 세계에 의해 창조된 존재지만 또한 그 세계에 영향을 미쳐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기도 하다는 인식을 가진 신들이 자신이 속한 외계의 각 영역들을 바라보자 그 역시도 그에 걸맞는 성향을 띄게 되었다. 신들이 거주하던 외계의 영역들은 Law, Chaos, Neutral의 세 종류 가치관으로 나뉘어 갈라졌고, 거기에 다시 영향을 받아 신들의 대립은 격화되어 갔다. 아직 1세대 신들에게는 함께 선주신들에게 맞선 동지들이라는 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었고, 그러한 공통된 의식과 중도 성향 신들의 중재로 인해 직접적인 무력 투쟁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 대립의 골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기만 했다. 


  3. 지성 종족들의 탄생

  신들이 저마다 지배하고 있는 고유 영역들이 자리하고 있는 저 먼 상위계(Upper plane)에서 벌어지는 신들 간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주물질계는 순조롭게 성장해 가고 있었다. 온갖 동식물들이 번성했고, 페러스 드래곤들과 엘더 타이탄들은 주물질계의 단 둘 뿐인 지성 종족으로서 각지에 자손을 남기고 번식하며 다양한 아종들을 만들어 냈다. 이 두 강력한 종족의 세력권 밖에서는 공룡들이 활보했다. 아직 인류는 등장하기 전이었고, 주물질계는 음과 양, 질서와 혼돈이 조화를 이뤄서 착실히 발전해 가고 있었다. 1세대 신들은 그러한 주물질계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에 공감했고, 자신들의 대립을 섣불리 힘으로 종결시키려고 했다가는 선주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세계를 다시 파괴하게 되리라는 것에 동의했다. 세 세력으로 분열된 1세대 신들은 잠정적으로 자신들의 투쟁을 멈췄고, 어느 쪽이 진정 ‘올바른’ 것인지- 자신들을 창조한 이 세계 자체가 선택할 미래가 어느 것인지 판단하기 위해 

  1)주물질계에 필멸성을 가진 지성 종족을 추가로 창조하여, 그들의 숭배를 받으며 후원한다 

  2) 신들은 상위계를 고향으로 하는, 신과 같은 위상은 없지만 불멸성을 가진 지성 종족을 창조하여 자신의 종복이자 사도로 삼는다(이 사도들은 훗날 ‘엔젤’ ‘아콘’ ‘엘라드린’으로 갈라진다) 

  3)모든 신들은 이렇게 태어난 지성 종족의 성직자들에게 신탁을 내리고 사도를 보내고 마법 능력을 부여하는 등 오직 간접적으로만 주물질계와 상호 작용해야 하며, 직접적인 개입은 금지한다 

  4)신들은 능력과 헌신성이 입증된 필멸자들에게 자신의 신성 일부를 나눠주고 사도들의 통솔권을 부분적으로 이양함으로써 자신의 하위신으로 삼을 수 있되, 이러한 ‘승급’이 행해질 때는 모든 신들의 회합에서 참가한 신들의 2/3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5)‘승급’된 필멸자 출신 신(이러한 신들을 편의 상 ‘2세대 신’이라고 부른다)들은 숭배자의 수와 신앙 정도에 따라 그 힘이 커지거나 줄어들 수 있으며, 심각할 경우 신성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이상의 5개 조항을 골자로 하는 합의안에 동의했다. 선주신들과의 전쟁에서 가장 크게 공헌한 최초의 페러스 드래곤이었던 아이언 드래곤 ‘안스락사스’와 역시 가장 큰 공을 세운 최초의 엘더 타이탄이었던 ‘아우로라’가 최초의 2세대 신이 되었다. 그리고 드래곤들과 자이언트들에 이어 신들에 의해 두 번째 지성 종족이 태어났다. 처음으로 숲 속을 거닐며 별들을 올려다보고, 자신을 둘러싼 삼라만상에 이름을 붙이고, 동물을 사냥하고,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죽은 자를 추모하기 시작한 종족은 훗날 엘프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 뒤를 이어 산과 동굴 속에서 불을 피우고, 돌 속에서 아름다운 귀금속과 보석들을 캐내고, 거대한 석상과 빛나는 기념비를 세운 종족은 훗날 드워프라고 불리게 되었다-노움은 이후 신들의 개입을 거치지 않은 채 드워프에서 갈라져 나왔고, 하플링은 인간과 비슷한 시기에 탄생했다고 여겨질 뿐 그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지성 종족의 수가 늘어나고 그들의 문명이 발전하며 서로 간에 갈등이 생겼고, 비교적 원만히 해결될 때도 있었지만 때때로 그것은 결코 작지 않은 규모의 전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도 언제나 질서와 혼돈이라는 두 원리의 대립으로 규정되는 신들 간의 알력에 비롯한 것이었다. 지성 종족들의 역사가 길어지며 수많은 영웅들과 악당들이 명멸했고, 그들 중에서 특출난 자는 신성을 양도받아 성스러운 판테온에 그 이름을 올렸다. 신들은 성직자들이 올리는 제물과 기원을 받고, 선주신들과의 싸움에서 힘이 다해 소멸한 동족들이 남긴 힘의 잔해로부터 에너지를 끌어내 가공함으로써 디바인 매직의 체계를 만들어 성직자들에게 전해 주었다. 주물질계라는 체스판 위에서 벌어지는 신들의 다툼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불멸하는 신들의 기준으로도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혼돈’이 세계 속으로 기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