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포복하는 혼돈

  처음에는 신들도 그 조짐을 깨닫지 못했다. 신들은 물론 자신을 창조한 세계 전체와, 자신들이 선주신들에게 맞서 싸움으로써 지켜낸 이 주물질계를 소중히 여겼다. 그것은 질서적이냐 혼돈적이냐 중도적이냐라는 신들 개개의 성향을 떠나 모두가 공유하는 가치였다. 그러나 신들이 가진 주물질계에 대한 애정은, 어린 아이의 소유욕과도 비슷한 것이기도 했다. 세계가 우리를 만들었다->우리는 세계를 지키기 위해 강대한 선주신들과 맞서 싸워 승리했다->우리는 지성 종족들을 창조해내고 그들을 진화시켰다->세계가 우리를 만들었지만, 우리가 세계를 바꿀 수도 있다는 인식은 신들로 하여금 부지불식간에 주물질계가 자신들의 소유물이며, 질서와 혼돈으로 양분된 신들의 이념이 충돌하는 전장으로 여기게끔 만들었다. 선한 신들은 아무리 자신들의 피조물이라 해도 그들을 자신들의 대립을 대신하는 체스 말 정도로만 취급하는 게 과연 온당한 것일까 가끔 회의했고, 악신들은 기꺼이 운명의 실을 조종하여 피조물들을 자기 뜻대로 움직였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 선과 악의 문제는 질서와 혼돈의 문제에 비해 부차적이고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어느 한 시기까지는. 

  신들은 언제부터인가 자신들의 ‘체스 말’이 가까운 미래 정도는 거의 확실히 예지하는 신의 통찰력으로도 눈치 채기 힘들 정도로 미묘하게- 그러나 분명히 통제를 벗어나고 있으며, 그 일탈이 수없이 누적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과정을 거치며 자신들의 거대한 계획에서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감지했다. 처음에는 신들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필멸 종족들은 성직자들을 통해 전해지는 신탁에 민감하게 반응하긴 했지만 신들이 그들의 일상 모든 부분에 이르기까지 까다롭게 개입하는 건 아니었고, 그 외의 상황에서는 스스로가 대체로 자유롭다고 믿었다. 그들은 세계를 직접적으로 선도해 가는 지성에 걸맞는 자아와 고유한 의지가 있었다. 그들은 신들이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소한 영역에서는 신들도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일들을 늘 벌리곤 했고, 그것은 한 때의 단발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엘프와 드워프 두 종족 간에 대립이 시작된 사건이나, 드워프에서 노움 종족이 갈라져 나온 사건 등-. 물론 그러한 사태가 일정 규모 이상 커질 것 같으면 항상 신들은 그 탁월한 지혜와 권능을 펼쳐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거대한 계획에  들어맞게끔 손을 쓰거나 그 자체를 자신들의 계획 일부로 편입시키곤 했지만 그런 일 자체는 상당히 자주 있어 왔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필멸 종족들의 대립과 협력, 정치적 술수와 직접적인 무력행사들은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신들의 계획을 뒤틀어 놓고 있었다. 신들이 그걸 확실히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극히 사소한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갈등은 엘프와 드워프, 노움들은 물론 드래곤들과 자이언트들까지 개입하는- 모든 지성 종족들의 거대한 전쟁으로 이어졌고, 독자적으로 지식을 습득한 자들이 신들을 경유하지 않은 채 우주로부터 순수한 마력 자체를 끌어 들여 가공해서는 그 힘을 행사하는 형태의 새로운 마법인 아케인 매직이 대규모로 쓰였다. 이것은 신들이 배후에서 주도해 온, 질서와 혼돈이라는 두 이념의 충돌의 연장선상에서 행해져 온 지금까지의 전쟁과는 전혀 달랐다. 질서와 혼돈, 선과 악과 같은 우주적인 법칙들은 물론 각 종족과 국가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서로에 대해 쌓아온 편견과 증오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거대한 전쟁이었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게 피와 죽음이 아니라 평화와 이해였다면 신들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고민했을망정 그토록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뒤늦게 신들은 필사적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고, 신탁을 내리는 정도로는 부족하여 주물질계에 대한 직접적 개입을 금지한다는 합의안을 일시적으로 철회하고는 스스로의 아바타를 내려 보내 이 전쟁을 중재하려는 극약 처방까지 시도했다. 

  신들이 직접 나서자 필멸 종족들은 그제서야 서로에 대한 학살을 멈췄지만 사태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리고 유래가 없는 신들의 직접 개입은 더욱 나쁜 상황을 불러 왔다. 거대한 힘을 가진 아케인 매직의 남발에 따른 부작용과, 드래곤들과 타이탄들의 충돌이 남긴 힘의 여파에다가 신들이 일제히 지상에 강림하자 그 존재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힘 때문에 모든 법칙과 가치관들이 균형 잡혀 있던 주물질계의 환경은 크게 훼손되었고 심각한 부작용이 그들을 덮쳤다. 대규모의 지각 변동이 일어나며 ‘첫 번째 대륙’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고, 음 에너지 계에서 누출된 힘이 시체들을 언데드로 일으켰고, 각 원소계에서 쏟아져 나온 정령들이 폭주했다. 에써릴 계를 거닐던 유령들과 그림자 계를 통해 흘러들어 온 다른 차원의 생명체들이 미쳐 날뛰었다. 그들이 치고받는 과정에서 발생한 에너지의 폭풍에 지금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끔찍한 몬스터들이 새로이 나타났다-오크나 홉고블린 따위로 대표되는 대부분의 휴머노이드 몬스터들, 몇몇 매지컬 비스트, 몬스트러스 휴머노이드들은 이 때 처음 생겨난 몬스터들이다. 애버레이션 역시 이 때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끔찍했던 결과는, 이 주물질계의 첫 번째 주인들이었던 드래곤들과 타이탄들이 그 재앙의 여파로 그들의 존재 정수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사건이었다. 당당하고 고귀한 자들이던 자이언트들 사이에서 우둔하고 난폭한 자들이 나타났고, 특히 운이 나빴던 자들은 지성마저도 희박해진 몬스터가 되어 버렸다(파이어 자이언트와 힐 자이언트 등을 비롯해 트롤과 예티, 오우거 등이 이 때 나타났다). 드래곤들은 한결 나았지만 그들 역시 코볼드라는 가학적이고 비열한 휴머노이드 몬스터들이 그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신들은 선주신들과의 전쟁 이후 처음으로 보는 끔찍한 참상에 참담한 절망과 알 수 없는 패배감을 짓씹으며 필멸 종족들을 규합해 상황 수습에 나섰다. 시간이 지나고, 주물질계 전체를 뒤덮었던 난폭한 힘의 격류가 잦아들고, 새로이 나타난 몬스터들이 산과 숲속, 바다 속 깊은 곳으로 숨어 버리자 신들은 아바타를 거두어 들여서는 어쩔 줄 몰라하는 필멸 종족들에게 곧 신탁을 내리겠다는 약속만을 남긴 채 다시 상위계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 어느 쪽에 더 큰 책임이 있는지 2세대 신들 간에 논쟁이 있었으나 직접 싸우기에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던 데다가 싸울 장소도 여의치 않았고, 이 모든 것들이 어쩌면 신들의 의지마저도 넘어서는 그 무언가에 의해 조장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고 있던 1세대 신들의 중재 때문에 큰 싸움이 되지는 않았다. 신들도 지치고 절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2세대 신들과 선주신들과의 싸움 이래 처음으로 초라한 신세가 된 1세대 신들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을 반기는 존재가 있었다. 깔끔하게 민 대머리에 작달막한 키와 검은 피부, 세련된 화술과 품위 있는 몸가짐을 가진 그 ‘존재’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신들의 원탁 한 가운데 서서 신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제가 제공한 조촐한 서비스가 모쪼록 만족스러우셨기를 바랍니다. 저는 당신들이 선주신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의 종복으로, 이름은 편할 대로 불러 주시면 됩니다. 아참, 지금은 적절한 이름을 붙여 주시기가 힘든 상황이겠군요. 실례했습니다. 저는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답니다. ‘엔트로피의 아들’ ‘핏빛 혀를 가진 자’ ‘시간 끝에서 울부짖는 것’ ‘영겁 허위’ ‘기만과 미혹의 주(主)’ 등이요.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그저 ‘포복하는 혼돈(Crawling Chaos)’이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네요. 제가 여러분들께 처음으로 모습을 보이는 자리인만큼 좀 더 공들여서 일을 처리하고 싶었는데 즐거우셨는지? 

  제 주인님들은 위대한 분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너무나 위대하신 나머지 여러분들처럼 미개하고 하찮은 존재와 의사소통을 하는 능력은 없으시거든요. 아니, 지금 그분들이 거동이 좀 불편하신 건 사실이니 너무 화내지는 말아 주세요. 저마저도 제 주인님들의 크고 넓은 뜻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지만 이번 일은 만족하시는 것 같군요. 하지만 정작 게스트들인 여러분들이 과연 기쁘게 받아 주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 무기는 내려놓으세요. 이곳은 당신들이 회합을 갖는 장소죠? 제법이군요, 도저히 아름답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나름 시간과 열성을 들여 꾸민 흔적이 있어요. 이런 곳에서 그렇게 교양 없이 행동하셨다가는 엉망이 되잖습니까, 안 그래요? 힘을 회복들 하시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텐데. 아, 제가 원하는 게 뭐냐고요? 과연 1세대답게 눈치가 빠르시네요, 제법 품위도 있으시고요. 제 대답은 ‘아무 것도요.’ 저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아요, 저는 어디까지나 제 주인님들의 종복일 뿐이고, 제 의사는 중요치 않아요. 마치 여러분들이 물질계 필멸자 분들의 의사를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제가 주인님들의 뜻을 이해한 바는 단순합니다. 여러분들 사이와 주물질계에 혼돈을 퍼뜨려라. 단지 그것뿐이었어요, 방법은 제 취향을 반영해 약간 어레인지하긴 했습니다만. 표정들을 보아하니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아아, 기쁩니다. 사실은 좀 더 깔끔하게 뒷마무리를 하고 싶었거든요. 다소 미진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으셨더라도 처음이라서 약간 서툴렀다고 모쪼록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면 다음엔 보다 더 나은 서비스로 즐거움을 안겨 드리겠습니다. 궁금하신 게 많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전부 답해 드리기에는 다음 스케줄이 빡빡해서 힘들겠네요. 미리 예상되는 질문들 몇 개에 대해 대답을 준비해 뒀는데 그것만 말씀드려도 괜찮겠죠? 

  어허, 거기! 쓸 데 없는 짓 관두시라니까요. 아무리 여러분들이 하찮다 해도 아무렴 제가 아무 대비도 하지 않고 왔을까요? 게다가 저는 평화주의자거든요. 야만스러운 싸움 따윈 좋아하지 않아요. 이런, 또 시간이 지났네요. 가장 궁금하시리라 생각되는 질문 두 가지에 대해 대답해 드릴 정도 여유밖엔 없겠어요. 우선, 제 주인님들은 여러분들에 대해 딱히 복수심이나 원한은 갖고 계시지 않은 것 같아요. 가정형으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 걸 양해 부탁드려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제 주인님들의 의도를 모두 헤아릴 수는 없거든요. 게다가 그 분들의 감정이나 지각은 하등한 존재들과는 워낙 차이가 크기도 하고요. 다만 비교적 분명해 보이는 건, 무한한 시간 속에서 영원한 권태에 차 있던 주인님들께 여러분은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는 점이에요. 

  아, 그렇게 슬픈 표정 짓지 마세요. 저까지 마음 아프잖습니까, 웃으면서 사는 게 좋은 거에요. 여러분들이 그럴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있다고 치고 말씀드리는 건데, 여러분들의 그 ‘반역’은 확실히 제 주인님들께 꽤 많은 ‘피해’를 주긴 했으니까요. 그것이 과연 ‘피해’라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는 좀 미묘하지만, 하등한 존재의 언어로 말하자니 어휘가 제약이 심해서 영 귀찮네요. 아무튼, 여러분들의 발악이 헛된 건 아니었어요. 일단은 그 정도 밖에 말씀 드리지 못하겠네요. 그리고 두 번째로, 제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하실 텐데… 그건 저로서도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여러분들은 이 세계 자체에 의해 스스로가 창조되었다고 생각하고 계시죠? 일단 그 가설이 맞다고 가정하면, 저도 비슷해요. 여러분들이 세계에 의해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 세계가 어떻게 되어 있으며 어떻게 되 가고 있는지, 자신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불명확한 것처럼 저도 주인님들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주인님들의 깊으신 뜻을 모두 알 수는 없어요. 어떤 면에서 보자면 저와 여러분들은 동전의 앞뒷면 같은 거죠. 

  제가 주인님들과는 달리 어째서 여러분들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고, 무엇보다 당신들이 단단히 걸어 잠근 변원계와 이 상위계의 경계를 뚫고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지도 궁금하실 텐데… 시간이 다 된데다, 전부 설명하면 재미가 없으니 수수께끼로 남겨두지요. 그대로 두면 영원히 맞추지들 못하실 테니 조금만 힌트를 드릴게요. 여러분들이, 제 주인님들이 어쩌다 흘린 것에 의존해 태어난 주제에 조잡하고 저열한 수준으로나마 나름 존재론적인 면에서 ‘진화’를 이뤄온 것처럼, 지금까지 내내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무한하고 공허할게 분명해 보이던 제 주인님들도 ‘변화’하기 시작한 게 아닐까요? 그렇기에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이런, 너무 늦었군요.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다들 모쪼록, 다음에 뵐 때까지 잘 지내시기를. 감사합니다.”

  그리고 길고 장황한 이야기를 순식간에 마쳐버린 ‘포복하는 혼돈’은- 경악과 불신에 찬 신들의 시선 앞에서, 과장된 몸놀림으로 허리를 굽혀 크게 절을 하고는,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나타났듯 애초에 그 자리에 아무 것도 없었던 양 모습을 감췄다.


  5. 지옥에 첫 악마가 내려앉다, 그리고 인류의 탄생

  충격과 공포가 가라앉은 이후, 신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변원계와 외계 사이의 결계를 다시 점검하는 것이었다. 결계는 여전히 굳건했고, 선주신들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여지는 없어 보였다. 신들은 잠정적으로 선주신들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결계를 깨뜨릴 힘이 없지만 그들의 힘과 의지를 이어받은 ‘포복하는 혼돈’은 그를 뚫고 들어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활동하기 위한 특수한 능력이 있다는 두려운 결론을 내렸다. 주물질계에서 벌어진 전쟁은 일단락되었지만 타락한 드래곤과 자이언트들, 그리고 수많은 몬스터들이 나타나 도처에 둥지를 틀고 있었고, 성직자들이 가지고 있던 신들과의 신성한 연결은 약화되어 신성 주문을 사용하는 능력도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도처에 언데드들이 출몰했고, ‘첫번째 대륙’이 가라앉으며 대규모의 지각 변동이 일어나 주물질계의 표면은 거의 이전 모습을 찾기 힘든 상태였다. 

  공포에 질린 주물질계의 주민들은 ‘신들이 허용하지 않은 힘’인 아케인 매직의 남발로 인해 이런 대재앙이 찾아 왔다고 믿고는 마법사들을 탄압했다. 이토록 비참한 상태가 된 주물질계의 모습을 바라보며 신들은 전율했다. 질서와 혼돈의 대립, 그리고 그로부터 갈라져 나온 선과 악의 대립은 언제나 있어 왔다. 그리고 그로 인한 파괴와 혼란도 늘 있어 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세계의 내부적인 이유로 인해 발생했으며, 이 세계의 방식으로 해결하고 치유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이러한 사태를 야기한 것은 ‘포복하는 혼돈’이었으며, 그가 섬기는 선주신들의 어두운 의지는 철저하게 이질적이고 불가해한 종류의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그 사실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건 악신들이었다. 이 세계 모든 ‘악’의 주재자임을 자임해왔던 악신들에게 있어 그토록 이질적인 성격의 ‘악’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으며, ‘포복하는 혼돈’의 존재는 그들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 그들은 ‘포복하는 혼돈’이 주물질계에 퍼뜨린 악과 광기를 ‘정화’하여, 이 세계의 논리로 이해 가능하고 이 세계의 일부로 해석될 수 있는 성격의 것으로 바꾸고자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사실들을 필멸 종족들에게 알렸다가는 신들도 진정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며, 두려워하기도 하고 번민하기도 하며 알지 못하는 것들도 많은- 자신들보다 강력하고 현명하긴 하지만 다만 존재 자체로 섬김 받을 자격이 있는 위대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 드러날 것이었다. 신들은 지금까지 선주신들의 존재와 고대의 전쟁을 필멸 종족들에게 은폐하고 있었고, 주물질계의 필멸 종족들은 신들이 우주와 세계, 자신들을 창조했다고 여기며 신들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신들은 본질적으로 자신들이 자신의 창조물들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걸 인정하기에는 너무 자존심이 강했다. 자존심을 버리고 주물질계로 내려가 필멸 종족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그들이 ‘포복하는 혼돈’과 그 뒤에 있는 선주신들에 저항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소수 의견도 있었지만 설령 그 모든 진실을 필멸 종족들에게 알린다 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는 점, 그리고 그토록 충격적인 진실을 섣불리 드러냈다가는 마음을 기댈 곳을 잃어버리고 공황에 빠진 자들의 폭주로 인해 지금까지 그토록 정성을 기울여 가꿔 온 주물질계가 파국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점 때문에 그 의견은 반려되었다. 

  그 때,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단 셋 밖에 남지 않았던 1세대 신 중 하나가 그 ‘이질적인 악’을 떠맡기로 결심했다. 필멸 종족들에게는 다만 어떠한 고위급 사도가 오만과 탐욕으로 인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획책했고, 주물질계가 처한 위험도 모두 그의 음모 때문이었다고만 알게 해두고 자신이 신들의 터전인 상위계를 떠나 ‘포복하는 혼돈’이 퍼뜨린 ‘이질적인 악’을 포용하여 이 세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평범한 악’으로 바꿔낼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 그곳의 주인이 되겠다고. 그의 결심은 곧 스스로의 신성을 영원히 포기하고, 자신들이 창조하고 애정을 담아 양육해 온 모든 필멸 종족들의 원한과 증오의 대상이 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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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 정리 및 기타 사항:

이 설정에서는 선과 악보다 Law와 Chaos의 대립이 먼저

디어티 앤 데미갓의 Tight Pantheon 개념과 그레이트 휠 차원 구조 채택 

선신도 악신도 기본적으로는 '이 세계를 지키고 유지해 나가야 한다'는 공통된 목적 의식을 갖고 있으며 가끔은 협력하기도 함. 신들의 가치관 차이는 그러한 목적 의식을 이루기 위한 이념과 방법론의 차이. 하지만 물질계 필멸자들은 그런 거 모름

1세대 신들은 프라이미벌 갓들의 충돌 틈바구니에서 튄 신성의 불꽃 속에서 태어난 존재. 2세대 신들은 물질계 출신 필멸자였다가 1세대 신들이 자신의 에센스 일부를 나눠줘서 신성을 얻은 존재. '태초부터 스스로 존재해 온' 건 프라이미벌 갓들 뿐.   

캠페인 특성 상 1레벨 캐릭터는 0레벨 민간인들보다 훨씬 강하고, 1레벨부터 어느 정도 스케일이 있는 사건들(도시 규모의 음모라거나)에 엮이기 시작. 그 대신 전체적인 파워 레벨이 낮아서 10레벨 쯤이면 국가 최강 반열에 들고 16레벨 쯤 가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역사에 이름이 남을 영웅들이 되는 수준. 캐릭터 레벨에 비례해 스토리의 스케일이 커지는 전통적인 구조 채택. 20레벨 근처까지 가면 위 설정들에서 언급된 신들과 차원 간의 문제, 프라이미벌 갓들과의 싸움 등을 다루게 됨.

캠페인에서 쓸 서플들은 코어 3종 세트에 추가로 플핸2, 컴플릿 워리어, 컴플릿 어드벤처러, 컴플릿 스카운드렐, 매직 아이템 컴펜디움 정도. 여기 추가로, NPC 전용으로 몬매2~3, 컴플릿 아케인과 디바인, 로드 오브 매드니스, 핀디쉬 코덱스 정도. 사이오닉과 에픽 레벨 관련 룰들은 전부 안 쓴다. 에픽 레벨 꺼져. 에픽 캐스터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