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표상을 '세계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PC들이 쥐고 있는 서사의 몰입성과 설득력이 됩니다.
거두절미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예시를 들어 보겠습니다.
13시대를 WW2시대로 바꾸고
거기서 중요인물 하나를 13시대의 표상처럼 표현해보자면...
히틀러
나치 독일의 퓌러(지도자 겸 국가수상), 유럽 땅의 침략자, 유대인들의 악몽입니다. 그는 악명높은 나치당을 이끄는 뛰어난 연설가이며, 유럽을 포함한 전세계에 전쟁의 불씨를 지피는 실존하는 위험입니다.
한 마디
"국력은 방어가 아닌 침략에 있다."
소재지
현재는 베를린 어딘가의 벙커
알려진 이야기
히틀러는 아마도 WW2에서 가장 악랄하고 비인간적인 표상일 것입니다. 그의 친위대들 역시 그렇습니다. 히틀러는 모든 유럽 땅의 지배자로 서고 싶어하며, 이 대지에 서있는 인간들 중 오직 게르만인이 순수하고 이상적인 존재라고 믿습니다.
(하략)
이번 WW2시대 캠페인에서 플레이어 장발장은 히틀러를 극도로 증오하는 레지스탕스(이른바 빨치산) 도적 PC인 볼테르 쿠스토를 가져오려고 합니다.
"제 PC는 어린 시절 나치당의 앞잡이들에게 끝없는 수탈과 압제를 겪었으며, 레지스탕스에 가입하기 전에는 틈이 날 때마다 나치돼지들의 물건을 몰래 전쟁고아들에게 '재분배'했습니다. 레지스탕스에 가입한 그는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강렬한 증오를 느끼며 그에게 반격의 기회가 있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장발장은 볼테르가 가진 히틀러에 대한 부정적 관계 2점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히틀러가 그 사실을 아나요?"
"히틀러는 볼테르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세션이 시작되고 완파된 마을을 거닐던 파티는 어느덧 비교적 멀쩡한 가옥을 발견합니다...
볼테르는 사전에 표상굴림에서 히틀러 6을 띄워놓은 상태입니다.
GM이 장발장 앞에 놓여있던 6 주사위를 집어들며 말합니다.
"쉴 곳을 찾던 일행들의 귓가에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유일하게 온전해보이는 2층 벽돌집에서 나오는 소리 같습니다. 이따금씩 독일어가 들려옵니다. 볼테르는 그 잡담 속에 나치의 은어가 섞여있음을 알아챕니다."
장발장은 마른 침을 삼킵니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요?"
"실없는 농담으로 보입니다. 누에콩와 처칠의 생식기의 공통점에 관한... 느리고 어눌한 발음으로 보아 만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볼테르는 인기척을 내지 않고 조용히 가옥 현관문을 넘어 소리가 들리는 2층으로 접근합니다.
GM은 볼테르가 독일군의 야전경계 메뉴얼을 꿰고 있고, 상대가 경계를 특히 소홀히 했으므로 특별한 판정 없이 그들을 선제공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장발장은 처음에는 생포를 선언하려 했으나 그들의 옷깃에 달린 무공휘장을 보고 그들이 저항하기 전에 죽이기로 합니다. 볼테르의 손에서 투박한 국민권총이 불을 뿜습니다.
GM은 일행들이 쉴 건물이 성공적으로 확보되었으며,
볼테르의 눈에 손질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권총이 들어온다고 말합니다.
볼테르는 그 권총을 주워듭니다.
[ 상등품의 +1 루거 권총 ], 자세한 효과는 핸드아웃으로 전달되었습니다.
...
GM은 볼테르가 가진 히틀러와의 표상관계점수를 활용해 마법무기를 제공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히틀러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나치독일군이 등장하였습니다.
13시대에서는 이런 식으로 표상의 하수인이나 하위조직을 등장시키는 것을 권장하며, 다르게 말하면 세션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세력은 모종의 유형으로 대부분 표상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표상이 곧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표상의 영향력은 실제 히틀러가 그러했듯 겉잡을 수 없이 세상으로 퍼져나갔고
볼테르도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형태는 지극히 유동적입니다.
이번 세션에서 히틀러는 여전히 볼테르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합니다.
볼테르도 역시 히틀러 개인에 대한 살의를 뿜은 것이 아닙니다.
나치독일군은 히틀러가 세상에 풀어놓은 영향력이며, 그의 광기와 동조하는 세계의 일부를 나타냅니다.
볼테르의 부정적 관계는 발단도, 과정도 그러한 영향력에서 영감을 얻었을 뿐입니다.
심지어 이보다도 더 적은 연관성만 있는 내용도, 표상에 대해 건너건너 엮을 수만 있다면 룰북에서는 활용하라고 합니다!
다음이 그 예시입니다.
"불현듯, 작년 포지에서 드워프들이 들려 준 말도 안 되는 수수께끼들이 생각납니다. 그것들이 갑자기 조합이 되면서, 여기서 빠져 나갈 길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관계 판정, 회상 장면의 활용 中
히틀러도 드워프 왕도 이번 표상활용에 대해선 직접 행차하지 않았습니다.
룰북이나 공식 시나리오에서도 그러한 사례는 적습니다.
마지막 단원에 들어서기 이전의 PC에 대해 표상은 그저 '세계에 흩뿌려진 영향력'에 가까운 형태로 영향을 끼치며, 그들이 직접 등장하는 경우는 대체로 PC들이 그들과 대적하거나 함께할 단계에 들어섰을 때일 겁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13시대 룰에 따라 WW2시대를 진행한다면
PC의 선택에 따라 히틀러가 그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도 막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그 레지스탕스의 눈엣가시를 당장 잡아오라고 소리를 칠 수도 있고, 그의 한쪽 불알을 쏜 게 사실은 자신이라는 한가지 특별한 것을 써도 됩니다.
선택지는 항상 열려있습니다. 표상을 개인으로서 접근하길 원한다면 그럴 수 있고, 그만한 거물이 PC에 직접 접근하는 것이 싫다면 다른 방법을 취하면 됩니다.
결국 표상은 이미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길지만 재밌는 예시에도 불구하고 표상 룰이 구린 이유는 이런 룰을 쓰지 않아도, 표상굴림에서 6을 띄우지 않아도 히틀러의 친위대랑 만나서 투닥거리는 것을 PL과 GM이 원한다면 그냥 그렇게 하면 된다...
표상굴림에 대해서는 저역시 극도로 부정적인 입장입니다. 다만 표상 자체를 자캐딸이라는 이유로 부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못했기에 장문의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것과 별개로 글은 재밌게 잘 읽었음. 글 잘 쓰네.
룰을 쓰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건 다른 룰들도 다 필요 없이 PL과 GM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어 전투룰이 없어도 대화해서 과정과 승패도 정할 수 있어 저 룰이 있음으로해서 플레이어는 히틀러의 친위대와 싸우고 싶다는 제안을 하기 쉬워지고, 마스터는 플레이어의 모든 요구가 아니라 표상에 대한 요구만 들어주면 되는거야
말한대로 쓸거면 굳이 표상이라고 따로 개념을 만들 필요가 있나? 그냥 배경설정에서 주는 유리점 정도인데 13개니 뭐니 어렵게 만들 필요 없는거 같은데. 여러모로 참 두루뭉술하다는 말 밖에 못하겠네
백지에서 시작하는 것과 공통적인 영감을 받고 시작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모두가 작가가 될 순 없으며, 마스터에도 PC들과 함께 공유하는 세계의 가이드라인이 존재한다는 것이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표상관계(즉 세계의 일부와의 관계)를 쓰는 행위는 모든 PL이 의무적으로 세계에서 자기 자리를 확고히 가지도록 유도합니다. 즉, 13시대에 '자신이 이세계에서 왔다고 주장하며 이 세계가 오락의 일부라는 헛소리를 하는 검사' 캐릭터를 누군가 가져올 경우,
13시대는 그에게 표상관계를 요구합니다. 이에 따라 그 캐릭터의 발자취에 '대마도사라면 자신이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알고 있을거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 또는 '눈을 떴을 때 내가 있던 곳은 대사제 영향권에 있는 비애의 신전 한가운데였다' 같은 내용이 추가되었습니다. 마스터는 이것을 통해 이 PC를 어떻게 모험으로 유도해야할지 실마리를 가질 수 있으며, 검사는 다른 PC와 공통된 관심사를 가지고 소통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안전장치로서 쓰이는 표상의 역할이며, 더 나아가서 세계의 탐구에 대해 열의를 가진 PL도 표상들을 통해 영감을 얻고 자신이 이 세계에서 어떤 형태로 영향을 끼치고 싶은지 표상점수를 통해 마스터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두루뭉술하더라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서사적 출발점이 되기에 유리하다는 거고 (테이블 모두가 공유하는 심상을 제시하면서), 두루뭉술한 만큼 각 테이블에서 조정해서 쓰기도 용이함. 비록 심상 공유와 세계관 구축 기능으로의 표상을 게임 메커니즘으로 결합하는 부분이 엉성해서 표상 굴림은 좋은 소리를 못 듣지만
'배경설정에서 주는 유리점'은 표상 시스템을 요약하기엔 좀 비약이 심한 표현 같음. 개인적으론 표상관계/출신/한특것 세 가지 모두를 한데 모아 함께 잘 활용해야 제13시대만의 특장점이 발휘된다고 생각하기에 더욱
던전월드 단점 중 하나가 그런 것 하나 없는 백지에서 시작하다보니 심상 일치 안되서 혼란 오는 경우도 자주 있음
히틀러 표상 정성 보고 개추 눌렀다...
페겔라인?
설명 개잘하네
이건 정보글로 강제징집좀 하자 주딱아
나 13시대 마스터링 준비중인데 존나 도움됐다 개추줌
이 글이야말로 개념글을 받기에 충분한 글이로다
그냥 평범하게 13시대 표상으로 예를 들지 않고 히틀러로 예를 든 이유가... 뭐노...
표상의 하수인도 결국 표상의 입김이고 따지자면 자캐딸이 아닌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례를 봐서... 특정 인물의 영향력이 세계에 번질 정도로 강대하면서도 그의 개인적인 개입은 배제된 PC와의 연결고리가 어떻게 실질적으로 가능한가에 대해 납득하기 쉬운 예시를 들다 보니 히틀러가 생각이 났습니다. (※히틀러는 글쓴이의 개인적인 신념과는 무관합니다) 오크두령, 투장, 악귀술사로도 비슷한 예시는 들 수 있겠으나 그들의 하수인이 표상의 직접적인 명령을 벗어난 형태로도 기능하는 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려면 많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반면 특정 국가의 휘하에 있는 군대의 구성원, 독일군 개인이 히틀러 개인과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 그리고 동시에 서로 어떻게 연관이 되었는지는 많은 사람이 가늠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밀덕인가보네..
대한민국 국민도 군대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고, 밀리터리에 크게 관심이 없더라도 군인과 국가원수의 관계를 현역으로든 공익으로든 기본적으로 느낄 수 있다고 봤습니다.
TRPG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라면 거기에 더해 판타지에 관해서도 많은 식견을 가질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판타지는 세계관과 작가의 묘사에 따라, 그리고 TRPG에서는 추가적으로 마스터의 해석에 따라 우두머리-하수인의 관계가 크게 변동하며 이는 심상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때문에 그 중 누군가가 처음 답글에서 제시됐던 의문을 가지는 것도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이런 경우 판타지로 다시금 예시를 들면 또다시 심상의 차이가 발생하고, 때문에 장르의 해석이라는 요소가 이해방식을 침범하기 만들기 어려운 '현실의 역사/사회구조'를 가져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 중 우두머리-말단하수인에 비유할 수 있는 직관적인 예시는 군대와 군인이며, 격정의 시대인 13시대에 빗대기 좋은 표상은 히틀러였습니다.
다만 이는 '이러한 해석만이 표상-하수인 관계에 관해 옳은 사례이다.'라는 의미가 아니며, '어째서 표상의 영향력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가 있는가?'에 대해 '이렇게 이해한다면 가능하다.'라는 예시에 불과합니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으며, 이 글은 그 가능성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려는 시도에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