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어그로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TR 접는 겸해서 쓰는 넋두리 겸 한풀이다. 통계 같은 구체적인 수치에 기반한 건 없고, 오로지 내 TR 경험에 기반한 뇌피셜 그 자체임. 네가 아닌 것 같으면 그냥 아닌 거니까 안심해라. 제목에는 TRPG가 좆망했다고 적었지만, 정확히는 시장이 좆망했다는 거다. 이건 미리 짚어두겠음.

1. TRPG 플레이어의 정체성
1) 사실 플레이어는 모험을 원하지 않는다
A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활기찬 모험가입니다.
오, 진짜?

PC는 모험가라는 전제로 시작하는 캠페인도 흔하고, 이런 수사가 붙은 캐릭터를 다들 한 번 쯤은 했거나 본 적 있을 거다. 그래서 모험을 했나 싶으면 아닐 거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부분 플레이어는 마스터가 준비한 모험 외에는 죽어도 하고 싶지 않다.

모험이란 어떤 위험을 기꺼이 감수해도 새로운 것을 겪어보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그런 경험에 따라오는 보상이다. 그런데 데이터 룰에선 애당초 마스터가 준비한 던전과 전투 외에 위험을 감수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서사 룰에선 다들 눈치만 보면서 해야 하는 일만 하려고 한다.

PC는 모험을 원하는 설정인데, 플레이어는 정작 세션에서 다른 PC나 NPC, 혹은 설정에 대한 호기심, 혹은 자신의 PC를 표현하고자 하는 동기로 "마스터가 시나리오상 제시한 목표 외"에 무언가를 섣불리 시도하지 않는다. 플레이어의 변명은 다양하다.

  • 다른 사람의 시간이 뺏길까봐요/다 같이 하는 플에서 저 혼자 나대기는 쵸큼(이렇게 변명하는 놈치고 정작 다른 플레이어에게 해도 되는지 묻는 놈 못봤다)
  • 별로 흥미롭지 않아서요/보상이 별로 안 좋아보여서요(그런데 보상을 더 준다고 해도 안 함)
  • 어렵고 힘들어 보여서요(사실 모험이 어렵고 힘든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댄디처럼 모험가를 전제하는 캠페인에서 저러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지. 핵심은 마지막, "어렵고 힘들어보인다"는 거다. 기실 1-2번째 대답보다 3번째 대답이 훨씬 많다. 즉, 많은 플레이어는 경험/보상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위험 자체를 회피한다. 이런 성향이 용병 내지 해결사물에서도 마찬가지고.

사회적 장면에서 권위와 계급으로 적당히 찍어누르면 스펀지처럼 찍어눌리고, 보스의 강력함과 부하의 숫자를 어필하면 곧장 도망칠 궁리부터 하고. 이건 레일로드로 학습된 무기력함 내지 적당한 사회성이라고 포장할 수 있는데, 서사 룰에서도 으레 그런가 하면, 마스터에게 도전해도 될는지 혹은 다른 플레이어에게 양해를 구하고 들이박아도 되는지조차 묻지 않는다.

심지어 "그렇게 하면 이러저러해서 안 될 것 같네요", "그러면 얘가 그렇게 반응할 텐데, 더 위험해지지 않을까요?" 등 다른 플레이어의 제안조차 먼저 깔아뭉개는 케이스의 플레이어도 봤다. 저런 성향의 플레이어 서넛 모아두면 웹소에서 으레 보는 던전에서 마석 캐는 야가다꾼 파티가 나온다.

현실에서 그렇게 위험을 회피한다면야 그건 개인의 성격이고, 선택이라고 이해라도 할 텐데, 취미생활이랍시고 하는 TRPG에서 그러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면 웬만한 게임에서는 다들 꼬라박도 하고 그렇잖아. 그런데 왜 TR에선? 왜냐하면 사실 플레이어는 모험을 하기보다도 캐빨을 받기 위해 TRPG를 하기 때문이다.

2) 사실 플레이어는 캐빨을 받길 원한다
중요한 차이점: 플레이어는 캐빨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캐빨을 "받고" 싶어한다.
전자는 자캐딸이지만, 후자는 거의 모든 플레이어가 공유하는 음습한 욕망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저걸 얼마만큼 잘 표현하고, 조율하는지가 플레이어의 실력이라고 본다. 근데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그런 욕망을 일단 부정한다. 유치해보이잖아? 근데 유치한 거 맞고, 이 취미가 원래 그렇다.

그래서 저런 욕망을 일견 그럴싸하게 포장한다. "모험을 좋아한다.", "빌딩을 좋아한다", "특별한 이야기를 보고 싶다" 등. 하나하나 따져볼까? 모험을 좋아하는 플레이어치고 실제로 그런 플레이어의 비율이 극히 적다는 건 이미 얘기했고, 빌딩을 좋아한다는 플레이어는 파워빌딩, 그러니까 "내 딜 다이스가 얼마나 뛰어난지"를 보여주고 싶어한다.

정말 "빌딩을 깎는 것"을 좋아하면 다른 취미도 많다. 롤이나 스타도 빌딩이란 게 존재하잖나. 빌딩이란 게 승리를 위한 효율적인 장비, 스킬, 테크트리 등을 일컫는 거면 거의 웬만한 게임에서 다 빌딩이 있는데, 왜 하필 TR에서 빌딩 깎냐고. 결국 자랑하기 위해서다. "내가 이만큼 빌딩을 열심히 찾아보고 만들었는데, 개쩔지 않냐?" 라는 것.

그렇게 빌딩을 깎는 게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실제 욕망은 "나 개쩔지? ㅎㅎ"인데, 저걸 은근슬쩍 포장하는 게 짜증난다고. 다른 플레이어나 PC에게 "님 개쩔어요", 내지 마스터의 전투 디자인을 자신의 빌딩으로 완벽하게 공략하고 마스터가 좆같아하는 걸 보고 싶어하는 걸 애둘러서 "빌딩 깎는 걸 좋아해서 TRPG를 해요"라고 말하는 게 빡치는 점이다.

"특별한 이야기를 보고 싶다."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넷플릭스왓챠쿠팡플레이유튜브닌텐도캡콤와우인디겜에서 보지 못한 새롭고 독특하고 재밌고 개연성과 몰입감 있는 스토리를 원한다." 하지만 내가 그 스토리의 주인공이어야 하고, 나머지는 마스터가 알아서 깔끔하고 센스있게 잘 해야 함.

저런 포장을 걷어내고 플레이어가 대체로 세션에서 불만을 겪는 순간을 짚어보면 "내 캐릭터가 무시되거나/활약할 수 있는 때를 뺏길 때"이고, 또 재밌어하는 순간을 짚어보면 "특히 내 캐릭터가 활약한 때(빌딩, 높은 주사위, 좋은 대사 등)"이다. 사람으로서 당연하다고? 그런데 그 외 요소에서 재밌어하는 플레이어... 본 적 있나?

설정, 세계관은 마스터의 고유한 재량과 권한이다. 그런 미명 아래에 치워두고 철저한 관객 내지 독자다운 감각으로 접근하는가 하면, 다른 플레이어나 마스터를 따로 좋아하는 플레이어는 얼마나 됨? 다른 PC... 알빠노? 슬프게도 내가 겪은 플레이어 대부분은 자기 캐릭터에만 관심이 매몰되어있었다.

거기에 캐릭터마다 활약하는 방식은 다르다. 캐릭터가 활약하는 무대, 연출, 표현은 자기 스타일에 맞아야 한다. 바바리안하고 로그가 활약하는 매드무비가 같을 리가 없다. 로그는 대체로 훔치거나 뒤에서 푹찍하는 모먼트를, 바바리안은 "너, 죽는다"하고 협박하거나 힘으로 문을 여는 장면을 좋아한다.

근데 마스터가 상대하는 플레이어는 3-4명이고, 그걸 다 신경 써야 하는데, 플레이어마다 활약하는 욕망은 미묘하게 다르다. 당장 스토리 진행하랴, NPC 연기하랴 바쁜데 그런 걸 신경쓸 여력이 있는 시점에서 이미 대단한 마스터다. 그러다보니 마스터는 플레이어의 미묘한 욕망을 포착하지 못하고 넘어간다.

플레이어는 노잼 세션마다 하차 스택을 쌓거나 은근히 피드백을 한다. 전투가 노잼이다, 스토리가 밋밋하다, 너무 어렵다 등. 대체로 핵심은 "내 캐릭터가 활약할 순간이 없다"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마스터가 어지간히 큰 실수를 하지 않는 한, 스토리나 게임성 자체를 문제삼는 피드백은 드물다(그런 문제도 사실 플레이어나 캐릭터에게 유리하거나 재밌으면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플레이어는 자신이 바라는 걸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뭘 원하는지 잘 모르거나 설령 알아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 소위 "자캐딸"로 비칠 위험 때문에 결코 제 입으로 뱉지 않는다. 캐빨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받고 싶어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위를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근데 마스터가 그 게임을 다 만들어야 함.
거기에 플레이어는 주사위 딸깍만 하고 싶음.

3) 결론: 사실 플레이어는 책임 없는 쾌락을 원한다
대다수의 플레이어의 본망은 "내 캐릭터가 이야기에서 활약하면서 주인공이 되는 감각"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겪는 난관과 위험은 딱히 원하지 않는다. 그 난관과 위험을 극복하는 과정은 귀찮고 어려우니까. 취미에서 뭣하러 그런 고생을 해야 함? 그냥 주사위 딸깍으로 넘어가면 안 됨? 전자는 원초적이라 당연하다면, 후자까지 겹쳐지면서 지금 우리나라 TRPG 시장이 좆망한 단초가 됐다.

이런 역설적인 욕구의 조합으로 플레이어의 웬만한 행태를 설명할 수 있고, 이에 따라 마스터의 정체성도 규정할 수 있다. 마스터는 공짜로 해주는 사이버 호빠다. 창녀는 고객이 대체로 셀프로 세우기라도 하지 호빠는 적셔줘야 하잖아? 딱 그 꼴이다. "내가 원하는 걸 말하지 않을 테지만 해줘." 저런 역설을 해결하는 방법은 플레이어가 서로서로 캐빨을 해주는 거다. 그런데 그것도 하기 귀찮아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뒤틀린 황천의 욕망의 항아리 같은 플레이어가 메인스트림을 차지한 이상, 이 시장이 제대로 돌아갈 턱이 없다. 다들 책임 없는 쾌락을 바라는데, 누군가는 플레이에서 가장 위험한 포지션인 마스터를 해야 하잖아? 이런 플레이어의 기제에 따라 우리나라 TR 시장이 어떻게 좆망했는지 씨발 글이 존나 길어진다. 여튼 다음에 또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