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1990년대 = 현대 세팅은 CoC에서 좀 많이 애매한 물건이라고 생각함.
시대상을 설명하는 것 자체는 1920년대보다 훨씬 유리한 대신 그 밖의 문제들은 대부분 키퍼가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고, 불편하거든. 그러면 왜 이렇게 됐냐.... 답은 간단하다. 카오시움이 현대에는 그렇게 많은 신경을 안 썼거든. 물론 1920년대 다음으로 서플먼트가 많은 시대이긴 한데 그래도 CoC의 메인 세팅은 1920년대고, 확실히 부족하다고 생각됨. 그러면 CoC 현대 세팅에 뭐가 부족했냐 좀 설명해 보면...
일단 1920년대에는 없던 것들이 많이 생겨났고, 그것들로 인해서 세계관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초자연적인 비밀"이 흔들리게 됨. 윳툴루 TRPG의 클리셰 중 하나인 "이성이 까일 만한 장면을 인터넷에 올려서 불특정 다수의 이성을 까버리는" 장면이 그걸 가장 잘 보여 줌. 이 장면은 단순히 개그 요소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키퍼 입장에서는 "비밀의 일부가 대대적으로 세상에 공개되는 장면"임. 크툴루 신화는 원래 "미-고는 사진으로 찍히지 않고 시체는 시간이 지나면 증발한다" + "인간 조력자를 활용해 정체를 감출 수 있다"는 설정을 통해서 "정보의 은폐"를 다루었고, 또한 주로 "고립되거나 폐쇄된 환경"을 배경으로 하던 물건인데 말이지. 그러니까 비밀은 훨씬 손쉽게 폭로될 수 있고, 또한 고립되고 폐쇄된 환경 자체도 점점 보기 드물어짐. 1920년대에는 충분히 비밀을 감추거나 폐쇄된 환경을 만들기 쉬웠기 때문에 이런 건 걱정 안 해도 됐단 말야....? 근데 현대 세팅에 생길 수 있는 이런 시대적인 변수에 대해서 카오시움이 대답을 잘 했는가...? 적어도 현대 인간 사회와 현대 무기 및 기타 장비, 쳐맞는 부위 판정(Hit Location. 원래 BRP 룰에 나오는 요소임) 등을 다루는 데 몰두한 1990년대 핸드북이나 크툴루 나우에서는 아니었던 거 같음. 물론 상식적인 키퍼라면 그런 상황에서 "이상하게도 기계는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정도로 처리해야한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그러니까 현대 세팅 시나리오에서 키퍼가 신경을 안 쓰면 누군가가 스마트폰으로 이성이 까일만한 장면을 찍은 뒤 인터넷에 올려서 불특정 다수의 이성을 까고 비밀을 만천하에 폭로해도 이상할 게 없다 이거임. 반대로 키퍼가 작정하면 사교도들이 어딘가 짱박힌 그레이트 올드 원들을 찾아가 촬영한 뒤 영상을 인터넷에 올려서 대량의 광인을 양산하는 대참사를 일으킬 수도 있는 시대고.... 아니면 "황색의 왕"을 영화화해도 될 것 같다. 저거 공연해서 참사를 일으키려 드는 건 나름 인지도가 높은 시나리오니까.
또한 이런 시대의 변화가 초자연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에 대해서도 카오시즘 쪽은 딱히 설명을 안 함. 근데 충분히 인간들의 기술이 발전한 게 얘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법하고, 반대로 얘들이 여기에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거거든. 그러니까 시나리오를 짤 배경은 어느 정도 설명해주면서 그걸 "제대로 된 시나리오"로 짤 때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대거 빠짐. 거기다 현대 세팅 시나리오라고 나오는 물건 다수는 몇 가지 현대적 요소가 도입된 거 빼면 굳이 현대가 아니어도 돌아갈만한 물건임. 그 몇 가지 요소라는 것도 잘해야 컴퓨터 / 헬리콥터 정도라 자물쇠가 달린 하드 커버 일기장이나 경비행기 같은 걸로 충분히 치환가능한 요소임. 사실 대부분의 CoC 시나리오가 시대나 지역은 맘대로 뜯어고쳐도 어느 정도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지기 때문인데, 그래서 역으로 현대 세팅으로 하는 맛이 훨씬 떨어지게 되는 효과를 낳는 거임. 현대 기술을 제대로 밀어넣으면 시나리오 전개가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확 틀어져버리기 쉽고, 기본 설정은 리얼 1920년대나 먹힐만한 설정에서 출발하는 게 다수거든.
이렇게 불완전한 현대 세팅은 당연히 강력한 적과 마주치게 됨. 그게 뭐냐.... 당대 흥하던 오컬트 / 음모론 요소와 크툴루 신화를 결합시켜 페이건 퍼블리싱이 내놓은 델타 그린. 거기다 델타 그린은 시대적인 변수와 현대의 세계관 / 상황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인 설명 / 설정을 하고 소설도 좀 내면서 나름대로 스토리를 진행시킨 결과 이래저래 기존 현대 세팅의 "상위호환" 수준으로 취급되기 시작함. 사실 카오시움의 현대 세팅이라는 게 그냥 현대에 추가된 요소들 설명 / 룰 추가한 거 말고 없다시피 했거든... 게다가 1990년대는 전설의 명작인 The X-files 같은 게 흥하던 시기라 "요원들이 초자연적인 악에 맞선다"는 컨셉이 먹혀들기도 훨씬 쉬웠고. 그래서 그렇게 인지도를 쌓은 델타 그린은 이제는 기존의 음모론에 이어서 테러리즘과도 세계관을 연계하려 들면서 스탠드 얼론으로 새 살림을 차리려 드는 거임. 그리고 어느 정도 플레이가 가능한 플레이어용 핸드북 + 시나리오 서플먼트만 나온 상태로 에니상 후보에 3건이나 올라가면서 여전히 잘 나갈 걸로 보인다.....
내가 coc 현대 배경 서플들 보면서 느낀 짜증들을 잘 정리해준듯. 개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