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게 단정짓기는 어렵습니다.


일단 '주작'이라는 말부터 일단 '조작' '사기' '거짓말'이라는 뜻을 함의하고 있으니 이 '주사위 주작질'이라는 말을 다시 정의해봅시다.


'마스터링 기법'이라는 말로요.


먼저, 마스터는 플레이에 참여한 모두의 즐거움을 위해 선의로 룰북을 집어든 사람이며, 플레이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그 어떤 PL보다도 더 많은 준비를 하며, 그 어떤 PC들보다 많은 자원과 정보를 가진 채 게임에 참여합니다.


즉 이러한 비대칭적 지위에 있는 이가 (특정한 악한 의도를 갖고 행한 것이 아닌 이상) 플레이에 참여한 모든 플레이어의 공동선을 위해 한 행위를 단순히 '주작질'로 폄하하는 것은 어폐가 있습니다.


어쨌거나 플레이어를 속인 것임에도 불구하구요.


불공평하거나, 파렴치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스터링 기법'은 TRPG라는 게임 외에도 수많은 게임에도 굉장히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인간 마스터가 아닌, 냉혹한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돌아가는 '공정한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게임들에도요.


먼저, 데미지 조작이 있습니다.


걸작 FPS게임인 '시스템 쇼크'에서는 플레이어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조작이 가해져 있습니다. 주인공이 쏘는 총의 마지막 남은 총알은 어떤 상황에서든 적에게 두 배의 데미지를 준다는 것입니다. 플레이어들은 마지막 남은 총알 한 발로 적을 쓰러뜨리면서 카타르시스를 더욱 쉽게 느낄 수 있게 되지만, 게임의 개발자들은 플레이어들에게 그 사실을 숨겼습니다.


플레이어들이 마지막 한 발로 적을 쓰러뜨리고 통쾌해 할 때, 그것이 결국 개발자들이 카타르시스를 쉽게 느끼도록 안배한 정교한 주작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사실 팍 식게 되잖아요?


플레이어들이 가하는 데미지 뿐만 아니라, 받는 데미지도 물론 '주작질'이 가해져 있습니다.


유명한 액션 게임인 '어쌔신 크리드'와 '둠'에서, 체력이 간당간당 상황에서는 피해가 적게 들어옵니다. 플레이어들이 아슬아슬하게 살아남는 듯한 기분을 주기 위해 개발자들이 '주작질'을 해놓은 것이지요.


비단 이 두 게임 뿐만 아니라, 바이오쇼크 시리즈는 아예 피가 0이 되었을 때 1~2초 정도 무적 시간을 부여해줍니다(물론 플레이어들은 피가 0이 된 사실을 모릅니다). 플레이어들이 그 사이에 힐팩을 먹든 자힐을 하든 해서 '간신히 살아남았다'라는 경험을 주기 위해서 개발자들이 의도적으로 숨긴 '주작질'이지요.



데미지 뿐일까요?


아까 언급했던 FPS 게임 '바이오쇼크'에서는 데미지 뿐만 아니라 명중률에도 '주작질'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바이오쇼크에서 적들이 플레이어들에게 쏘는 '첫 발'은 무조건 빗나가게 설계되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플레이어는 1인칭으로 세상을 보는 이상, 옆이나 뒤에서 날아오는 적의 공격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눈 먼 총알에 너무 쉽게, 너무 자주 맞아 죽는다면 이건 플레이어에게 불쾌함을 남길 뿐이죠.


그렇기 때문에 적들이 쏘는 모든 사격의 '첫 번째 사격'은 의도적으로 빗나가게 '주작질'이 되어 있고, 플레이어는 빗나간 총알을 인지하고 '운좋게' 적들의 사격을 피해 엄폐물을 자연스럽게 찾게 되는 것입니다.(이런 의도적 빗나감은 스펙옵스 더 라인에도 가미되어 있는 주작질입니다)


이 것은 액션 게임 '데빌 메이 크라이'에도 적용되어 있습니다. 데빌 메이 크라이에서 주인공 단테는 거의 매순간 일대다의 전투를 이겨내야만 합니다. 이때, 개발자들은 이런 일대다의 전투를 너무 어렵게 하지 않게 주작질을 해놨습니다. 바로 '화면 밖에 있는 적들은 움직임이 아주 느려지고, 공격을 멈춘다'라는 섬세한 배려입니다. 이런 '의도적인 트롤링'을 통해 플레이어들은 단테를 조작하며 일대다의 전투를 뚫고 나갈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런 것은 턴제 게임에도 적용되어 있습니다. 엑스컴 시리즈의 확률이 게임 내 실제 표기되는 확률과 진짜로 다르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아군의 숫자가 줄어들수록 적이 아군을 맞힐 확률은 (실제 표기된 확률보다) 낮아지고, 아군이 적을 맞힐 확률은 (실제 표기된 확률보다) 높습니다. 하나 둘씩 아군이 쓰러져나가고, 마지막 남은 한 명이 기적처럼 적들을 쓰러뜨리는 그런 짜릿한 것은 사실 제작자들이 의도적으로 넣은 확률 조작에 의한 것이지요.

(이건 아까 나왔던 클레릭 썰과 비슷한 사례네요)


여기까지 싱글플레이 게임에 적용되었던 조작 사례입니다.


누군가는 멀티플레이 게임은 그런 '주작질'을 넣으면 안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플레이하니까 모두에게나 동등한 규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면서요.


하지만, 멀티플레이에도 그런 '주작질'은 사용되고 있습니다.


'기어스 오브 워' 멀티플레이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게임 내 표기되지 않는) 추가 데미지 보너스가 적용되어 있습니다. 게임을 오래 해서 고인 플레이어에게는 이런 추가 데미지 보너스가 점점 줄어들고(킬을 딸 때마다 데미지 보너스가 점점 축소됨), 뉴비 플레이어에게는 이런 추가 데미지 보너스는 (킬을 많이 못 따니까) 보존되는 형식으로요.



여튼 여러분들이 접했던 수많은 게임은 개발자 vs 플레이어를 위해 만들어진게 아니라, 플레이어들에게 즐거운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TRPG의 마스터도 마스터 VS 플레이어가 아닌, 자신의 테이블에 방문한 여러 플레이어들에게 환상적인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기꺼이 룰북을 집어든 것이구요.


이런 마스터의 노력을 '주작질'로 단순히 폄하하고, 깎아내리는 것은 너무 편협한 일 아닐까요?


모두 마스터를 아껴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