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창작 자체는 매우 긍정적으로 봄. 애초에 TRPG 자체가 아마추어 창작 행위 아니던가?


이 살기 힘든 각박한 세상에서 누군가가 소중한 시간을 들여서 낭만적으로 창조해낸 물건인데,

비록 그게 금전적, 상업적 가치가 없더라도 그것에 들인 노력은 존중받을 만 하지.

나도 입문 세션에서 다른 PL에게 받았던 그림을 아직도 컴퓨터 하드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음.


그런데 티알 룰의 소비는 일반적인 글, 그림 소비 행위와는 전혀 다름.


글이랑 그림은 컨텐츠 소비자(편의상 이렇게 부름)가 사전 준비 없이 언제라도 접할 수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언제라도 떠날 수 있음.


그렇지만 티알 룰은? 일단 마스터와 플레이어들이 룰북을 읽으면서 사전 규칙 숙지를 해야 하고,

플레이어는 캐릭터를 짜야 하고, 마스터는 그 캐릭터들이 노닐 세계를 구축해야 함.

이것만 해도 사전 준비 시간이 꽤 걸리는데, 실 세션도 10분 20분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할 게 아니잖아.

최소 서너 시간은 넘게 너덧 명이서 한 자리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진행해야지.


비유하자면 글과 그림을 보는 행위는 웹툰, 웹소설, 넷플릭스 시리즈 같은 것들 가볍게 보는 거고,

티알 세션을 하는 건 2박3일 국내든 해외든 단체 여행을 갖다 오는 거임.


아무도 여행갈 때 여행지 정해지면 바로 비행기 타고 떠나지 않지?

여행지 근처에는 어떤 관광지가 위치했는지, 숙소는 어디가 좋을지, 관광 스케줄은 어떻게 짜고 식사는 어떻게 해결할지...

여행을 가서도 신경쓸 게 많지. 사전 스케줄이 틀어지면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거나, 일행들의 의견 조율이라던가.

여행 과정 자체를 모두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함.


자작룰에 대한 평가가 깐깐해질 수밖에 없는 건 이런 이유 때문임.

티알 룰은 일반적인 컨텐츠처럼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떠먹여주는 구조가 아니야.

소비자가 그 룰을 가져간 뒤에도 생산자처럼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만족스러운 컨텐츠가 완성되는 거라고.

자작룰을 공개한다면 그건 암묵적으로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내 룰을 연구하고 준비하고 플레이하는 데 소비해 보실래요?' 라고 선포하는 것임.


그래서 자작룰을 공개할 거라면 그 전에 이 룰이

정말로 나와 우리 팀원들 말고 제3자 또한 관심을 가질 만한 물건인지,

그 사람들이 이 룰에 귀중한 여가 시간을 쏟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많이 고심한 뒤 결론지었으면 좋겠다.


인정욕구에 대해선 개념글에 걸린 링크글이 조금 과하게 일반화했다고 생각하긴 함.

단순히 불특정 다수에게 피드백을 받고자 올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사실 이건 보통 자작룰 올리는 놈들이 빌런에 가까운 경우가 많아서 그런 반응이 나왔을 거라고 봄.


그렇지만 그 링크글 자체의 취지는 나도 공감함.

https://ko.wikipedia.org/wiki/%EB%A7%A4%EC%8A%AC%EB%A1%9C%EC%9D%98_%EC%9A%95%EA%B5%AC%EB%8B%A8%EA%B3%84%EC%9D%B4%EB%A1%A0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이론에서도 분명히 존중의 욕구, 즉 자존감과 타인으로부터의 존중을 받고 싶어하는 욕구를 인간의 기본 욕구 중 하나로 꼽음.

간혹 창작자들이 타락해서 자기 에고에 깊이 빠지는 것도 이거 때문임. '이거 개쩔지 않음? 내가 이거 만듦' 같은 논지인 거지.

실제로 자작룰 '빌런'들은 전부 이 존중의 욕구로 마음의 그릇이 전부 꽉 차버려서, 피드백을 전혀 수용하지 못하고 고집만 부림.


모두가 그렇게 타락한다는 건 아니지만, 주의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서 나쁠 건 없다고 봐.


세줄 요약:

1. 자작룰은 다른 아마추어 창작인 글, 그림 등과 달리 소비자의 시간과 노력이 부가로 들어가야 한다.

2. 당신의 시간과 노력을 존중받기 위해서는 타인이 그 룰에 들일 잠재적인 시간과 노력도 존중해야 한다.

3. 모두가 빌런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존중의 욕구 자체는 인간 심리 기전에 깔린 거라 아마추어든 프로든 창작자가 제일 경계해야 하는 건 맞다.



나도 일개 턀갤러일 뿐이라 틀린 구석이 있을 테니 얼마든지 댓글에 말해 주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