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을 어떻게 해석하든 서로 편하면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건 양 쪽 모두 알고는 있는데


약간 본질적으로... 판타지를 뭐라고 생각하느냐의 문제라서 타협이 안 되는 거 같기는 함.

막 칸트 윤리학 이야기까지 나오는 게 그런 이유 같어.



솔직히 '가이던스가 문제라면 바딕 인스피레이션도 경계를 사야 하는 거 아님?'에서 좀 그런 기분이 들더라.




내 개인적으로는, 하이 판타지는 마법이 '충만한', '일상적인', '자연의 일부인' 장르라고 생각하고 있음.

뒷산의 버려진 돌탑에는 잊혀진 정령신들이 잠들어 있고.

집 앞에 왼새끼를 꼬아두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턴 언데드 효과를 얻을 수 있으며.

한 인간의 일생에는 '마법의 가을'이 찾아오고.

헤르메스 신전에 공물을 바치고 눈을 감은 채 시장에 달려와,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물건이 진짜로 '신의 계시'인 그런 세상.


20레벨 파이터가 용암에 빠져도 살아남는 것이 '자연적'인지 '마법적'인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는,

그냥 마법과 자연 현상의 구분이 사라진 그런 곳 말야.



물론 D&D는 룰에서 '자연적인 것' '초자연적인 것' '마법적인 것'을 엄격하게 구별해 놓았기 때문에,

내가 이런 심상을 가지고 있는 건 그냥 로어에 안 맞는 거기는 함.



다만 나는 '무엇이 마법인지가 매우 엄격하게 정해져 있는 세상이라고 하는 건

결국 마법이 일종의 공학적 기술에 불과한, 말 그대로 환상이 없는 세계 아니냐' 하고 느껴지더라.

(실제로 그래서 D&D에 영 재미를 못 붙였고...)






결국 이렇게 이야기를 진행하다 보면, 모든 상인들이 1분 길이의 모래시계를 옆에 둔 다음에

문장 한 마디를 말할 때마다 1분 이상의 시간이 걸리도록 천천히 말하는 것이

소서러의 수작질마저 봉쇄하고 공정한 거래를 하기 위한 필수적 선결조건이 된다는, 그런 결론밖에 안 나지 않나.



이거 너무 헌터X헌터에서 제육볶음 먹는 농담이랑 비슷한 느낌 아니냐 ㅋㅋㅋㅋ

가능한 모든 넨 능력을 모두고려 하다 보면 제육볶음도 먹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


이거랑 비슷한 식의 논의를 친구 판타지 소설에 대해 좀 했더니만

친구는 나를 무슨 편집증 환자 같은 걸로 취급하던데

이 정도로 사고가 느슨한 사람이 적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함.





어쩌면 판타지는 적당히 구멍이 있어야 성립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가이던스는 상대의 자유의지를 왜곡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요소가 개입한다기보다는,

그냥 가이던스 대상자의 잠재력을 이끌어내거나, 우연한 행운을 유발시키는 거에 가깝다는 '묘사'가 좀 더 재미있을 거 같다는 생각은 한다.

(그게 D&D 실제 로어에 얼마나 부합하느냐와는 별개로)


걍 ADHD 환자가 총명탕 먹거나, 긴장하면 말 더듬는 사람이 베타 차단제 복용하는 정도의 느낌인 거지.





P.S. 간만에 Roll20 질문글이 올라와서 재미따 재미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