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기대가 컸다. 

주변에서 하도 내러티브 중심이라 마스터링 자유도 높다

규칙이 단순해서 입문용으로 최고라는 말을 들어왔으니까.


댄디하면서 룰북 들고 씨름하는 게 지쳐있던 참이었고, 뭔가 더 유연하고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는 시스템이 끌렸다. 그래서 냅다 세션을 잡았다.


문제는 처음부터 있었는데, 내가 못 알아봤다.


던전월드의 핵심은 Fiction First다. 룰보다 이야기가 먼저고, 마스터는 상황을 밀어붙이는 구조다. 들으면 그럴듯하다. 

그런데 실제로 테이블에 앉아보면 이 유연함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깨닫게 된다. 


판단의 기준이 룰북이 아니라 마스터의 감각에 있기 때문에, 테이블 전체가 같은 감각을 공유하고 있어야만 굴러간다. 우리 테이블은 그렇지 않았다.


플레이어 중 한 명이 계속 그럼 이건 됩니까?를 물었다. 

던전월드에서 그 질문은 사실 대답하기가 어렵다. 왜냐면 규칙상 된다/안 된다가 아니라 지금 장면에서 그게 과연 가능한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매번 즉흥으로 판단했고, 판단이 쌓일수록 일관성이 흔들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플레이어들이 납득이 안 가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결정타는 전투였다. 던전월드의 전투는 HP 관리와 피해 구조가 기존 d20에 익숙한 사람 눈에는 너무 추상적이다. 


몬스터가 반격한다고 내가 말했을때 한 플레이어가 대놓고 말했다. 그게 왜요? 제가 잘 굴렸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나는 설명을 못 했다.


세션이 끝나고 단톡방이 조용해졌다. 

며칠 후 한 명이 슬쩍 다음엔 그냥 5e 할까요? 라고 했다.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던전월드가 나쁜 시스템이라는 게 아니다. 분명 잘 맞는 테이블이 있을 거다. 이미 서로의 플레이 감각을 깊이 아는 사람들끼리, 픽션을 공동으로 구성하는 훈련이 된 그룹이라면 빛을 발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닌 테이블에서 단순하니까 해보자고 덤볐다가는, 나처럼 된다.



당분간은 룰북이 두꺼운 게 차라리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