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랑 맥주 갖다 놓고 홀짝 홀짝 마셔가며 주사위를 굴리고 있는데, 플레이어 한 놈이 마침 자기 캐릭터가 나오지 않는 장면을 틈타서 소주병이랑 종이컵, 나무 젓가락 같은 걸 갖고 로봇 같은 걸 만들기 시작함. 다들 술기운이 올라선지 그 과정이 기묘하게 재미있더라고. 다들 한 마디 씩 거들면서 왜 이런 부위가 붙어 있는지 설정을 짜서 붙이고... 그러면서 놀다가 플레이 좀 더 진행하다가를 반복하다가, 보스가 나와서 뭔가 중요한 교섭을 해야 하는 장면이 됐음. 그런데 처음 그 로봇을 만들던 플레이어가 그 로봇(?)에게 "믿나이다" 라고 하면서 오다리를 제물로 바친 뒤 주사위를 굴림.
 
...........20?
 
다들 빵 터지고, 나는 즉석에서 설정을 바꿨음. 원래 이 보스는 반쯤 골렘 비슷한 게 되서 설득이 안 통하는 놈이었거든. 하지만 모처럼 20 띄웠는데 안 된다고 하면 마음 아프니까 좀 봐줘서... 반응이 있다고 했지. 플레이는 계속 진행되고, 전투가 이어짐. 다른 플레이어가 그 로봇에게 "믿나이다" 한 뒤 100원 짜리 동전을 제물로 바치고 주사위를 굴림.
 
.......18? 
 
그래서 원래 그 전투에서 안 죽고 도망칠 예정이었던 악당 마법사는 그 플레이어의 캐릭터에게 훈훈하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전투 재개. 그런데 뭔가 삘 받았는지 다른 플레이어 놈이 또 그 로봇에게 "믿나이다" 하며 반쯤 마신 소주잔을 제물로 바치고 주사위를 굴림.
 
........19?
 
상황이 이쯤 되자 웅성웅성. 다들 경쟁적으로 주사위 굴리기 전에 제물을 바치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20면체를 굴리면서 단 한 번도 10 이하가 나오지 않는 기적을 보여줬음.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어젯밤의 충격을 회상하면서 낄낄대며 그 로봇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단 한 번도 10 이하가 나오지 않는 미칠 듯한 위엄을 보여주던 그 주사위는 그 이후로 1만 주리줄창 나오는 저주받은 주사위가 되었다. 


그래서 그 1만 자꾸 나오는 주사위는 이후 TR로 플레이할 때+내가 마스터가 아닐 때 마스터한테 빌려주는 용도로 자주 썼는데 최근 몇 년 간은 OR만 하게 되서 그 주사위는 지금도 내 책상 서랍 속에서 잠들어 있다. 로봇의 저주를 봉인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