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두서는 없음. 말카비안의 광기에 대해 평소에 갖고 있던 생각들임.


 처음 보는 WoD 플레이어가 와서 어떤 클랜이 하고 싶다고 할 때, 코어 룰북에 있는 것 중 가장 꺼림칙한 클랜이 말카비안 클랜이다. 왜냐면 대개 말카비안을 하고 싶다는 사람들은 둘 중 한 부류였기 때문이다.


1. 나는 트롤링을 할 예정인데, 면죄부를 받고 싶다: 존나 흔함. 내 캐릭터는 일단 비정상이고, 원리는 알 수 없지만 운명의 커튼을 젖히고 진실을 일부 볼 수 있고, 그걸 이용해서 남들 괴롭힐 수 있고, Revised 판본 이후부터는 Dementation으로 남들 미치게 할 수도 있다. 그것도 Obfuscate 이용해서 남들 모르게 숨어서. 내가 본 이 부류는 모두 목졸라 죽이고 싶은 자들이었다. 상황에도 안 맞고 인물성에도 안 맞는 트롤링 선언(주로 "쟤를 Dementation으로 미치게 해요")을 철저히 플레이어 흥미본위만으로 던지고, 왜 그런 선언을 하냐고 물어보면 어깨를 으쓱하며 "재밌으니까요"라고 한다. 문제는 그게 남들한테 재미가 없고 이해도 안 간다는 거지.


2. 나는 미친 캐릭터를 하고 싶다: 바로 위의 부류보다는 낫다. 하지만 속터지기는 마찬가지다. 대개 이러한 사람들은 사이코시스에 시달리는 캐릭터를 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남들과 소통을 잘하지 못하고,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회에서 소외받고 겉돌며 괴로워하는 고독한 인물을 연기하고 싶어한다. 문제는 이러한 사람들은 대개 그들 자신이 소통에 지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RPG를 일종의 사이코드라마로 접근한다. 너무 과도한 해석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당사자 입으로 "사이코드라마같은 RPG"를 하고 싶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플레이어는 이제는 RPG를 접고 결혼해서 해외이주를 한 사람이지만, 당시에는 가족 및 친구 문제로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며 소통장애를 겪고 있었다. 물론 이런 시도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이코드라마는 사적인 문제에 관계된 적응장애를 연기를 통해 극복하라고 고안된 거다. 여러 사람이 같이 게임하고 놀라고 나온 RPG랑은 목적이 다르다. 그런데 RPG 하면서 자기만의 사적인 고통을 미친 캐릭터의 비비꼬인 인격과 행동장애를 통해서 재현하면, 다른 팀원들은 제대로 게임을 즐길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건 어떻게 보면 미친 PC의 문제지만, 말카비안 클랜을 "미친 PC를 하는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르는 경우도 많으므로, 결국 말카비안 클랜의 문제라고도 하겠다.


 하지만 말카비안은 이런 식으로 미친 사람의 정서와 행동을 플레이어가 제멋대로 해석해서 트롤링하라고 나온 클랜도 아니고, 정신병자 수용소에 갈법한 캐릭터를 연기하라고 나온 것도 아니다. 게임 시스템적으로도 말카비안은 단 하나의 Derangement만을 갖고 있고, 이마저도 언제나 작용하고 있지는 않다. 얘들은 머리에 꽃꽂고 미쳐서 널뛰기나 하는 애들이 아니다.


1. 말카비안의 컨셉은 그냥 미친 뱀파이어가 아니라, "진실을 보는 대가로 미친/저주받은 예언자"다

얘들은 그보다는 일종의 환시나 광기어린 예지의 힘을 가진 예언자들이라는 컨셉이다. 그래서 클랜 말카비안은 정해진 광기를 통해서 어떠한 진실의 편린을 본다. 이는 클랜 말카비안이 인간의 정신(뱀파이어지만, 기본적으로는 인간의 정신을 지닌 이들이니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논리적 인과를 뛰어넘어 직관하는 데서 오는 일종의 역효과이고, 이 광기를 통해서만 스스로도 그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 광기-예지는 말카비안 자신도 통제할 수 없다. 또한 오직 특정한 트리거가 작동했을 때만 불가해한 광기의 방식으로 표출된다. 도시의 모든 뱀파이어들이 엘리시움에 모여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파티를 벌이고 있을 때... 모두가 프린스의 축사에 집중하고 있는 도중, 불현듯 한 말카비안은 홀의 닫힌 문에서 피가 흘러나오다 이내 문이 떠밀려 열리며 홀 전체가 거대한 피의 홍수에 잠기고 마는 환시를 보고 혼자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른다. 마치 샤이닝의 Redrum처럼 말이다. 그리고 모두는 그 말카비안의 헛소리에 불편해하거나 조소를 흘힌다. 하지만 유독 프린스 차일드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는다... 누군가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쩌면 저 말카비안이 자신이 몰래 계획 중인 피로 얼룩진 쿠데타 음모를 알고 있는 것인지 불안해한다. 모든 상황이 지나고 나면 말카비안은 자신이 왜 그런 환시를 보고 흥분했던 것인지를 부끄러워하고 모두에게 사과한다. 그러나 뭔가 떨치기 힘든 불길함이 계속해서 남아있다.


 메타설정으로 이는 Malkavian Madness Network라는 거대한 정신적 연결의 역효과다. 모든 클랜 말카비안은 피를 매개로 정신적으로 조금씩 연결되어있고, 전세계 모든 말카비안들이 지식, 지각, 인지, 정서, 생각을 일부분씩 공유한다. 그리고 이 "정보"들은 어느 말카비안도 통제할 수 없는, 마치 고장난 라디오가 흘리는 노이즈처럼 서로에게로 조금씩 흘러든다. 평소에 이 정보는 의식적으로 인지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뭔가의 자극으로 그 정보가 연상될 때, 말카비안은 자기 Derangement에 맞는 발광을 하며 그 정보를 왜곡되고 광기에 젖은 형태로 인지하고 토해내는 것이다. 그 덕분에 말카비안들은 자신은 절대 알 수 없는 정보를 때때로 광기를 통해 파편적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정보들은 거의 늘 통제불가능하고 불가해한 방식으로 말카비안에게 투사된다. 따라서 이 광기어린 예언이 무엇에 연관된 것인지, 혹은 이 예언을 어떻게 해석해서 행동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심지어 대부분의 말카비안들은 Malkavian Madness Network의 존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오직 가장 강대한 메두셀라들 중 일부만이 Madness Network의 존재를 유추하고 있을 따름이며, 그 중에서도 일부만이 아주 조금 Madness Network를 자의로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Madness Network 설정을 알았다고 해서 이걸 이용하겠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이 설정은 그저 "말카비안들이 파편화된 진실을 광기를 통해 보게 되는 원리는 무엇인가"를 플레이어에게 말해주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adness Network는 말카비안들 사이에 묘한 공동체를 이루게 할 때도 있다. 아주 강대한 말카비안 메두셀라들은 소위 "Calling"이라고 하는 일종의 말카비안 전용 소환술을 사용할 수 있다. 자신의 의식을 인근지역의 다른 말카비안들에게 퍼뜨리는 것으로, 동족이 자신에게 모이게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느 지역의 말카비안들은 소위 "Malkavian Time"이라고 해서,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특정시간 특정장소에서 모이기도 한다. 때때로 Malkavian Time에 강하게 동조된 말카비안들은 같은 도시 내에서 다른 말카비안들이 느끼는 강한 감정이나, 죽음의 고통을 같이 느낄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 해도 Malkavian Time의 원리에 대해 이해하는 말카비안은 거의 없다.


 물론 모든 말카비안들이 이러한 거대한 정신적 연결(혹은 공유)과 광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일반적인 말카비안들이 미치는 것도 어느 정도 정신력이 강한 인물들이라 미치는 선에서 끝나는 거다. 이러한 말카브의 "저주"를 감당할 수 없는 정신의 소유자는 포옹과 함께 완전히 광인이 되어버린다. 이런 이들은 거의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되며, 소위 "씹힌 자(Gnawed)"라고 불린다. 이들은 대개 포옹과 동시에 처분된다. 이들은 정상적인 "Kindred"로 활동하며 Masquerade를 지킬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2. 말카비안은 발작을 일으킬 때를 제외하면 정상적인 사회의 일원으로 기능한다

다르게 말하면 일반적인(?) 말카비안들은 Masquerade를 지키며 "Kindred"로 활동할 수 있을 정도의 지성과 "정상성"을 지니고 사회의 일원으로 충실히 기능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의외로 이상의 정신적 연결 및 환시적인 광기-예언을 제외하면, 말카비안들은 놀랄 정도로 정상적인 인물들도 많다. Aristotle de Laurent이나 Douglas Netchurch, Willium Timothy같은 유능한 학자이자 예의바른 신사인 말카비안들도 다수 존재한다. 찾아보면 말카비안 쉐리프도 있고 프린스도 있다. 얘들이 아무 때나 미쳐 날뛰는 애들이라면 당연히 Kindred 사회가 이런 애들을 인정하고 사회적으로 중요한 자리에 앉히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도 이런 애들이 있다는 건, 클랜 말카비안도 발작할 때 빼면 충분히 상식적이고 건전한 Camarilla의 성원으로 활동한다는 뜻이다. 만약 얘들이 전부 제멋대로 미쳐 날뛰었다면 아마 Camarilla에서 Maquerade를 지키기 위해 모두 척살했겠지.


 그러니 말카비안을 플레이할 때는, 얘가 발작을 일으킬 때 뭘 할지도 중요하지만, 발작을 안 일으킬 때는 어떤 사람인지도 생각해둬라. 그냥 미친 뱀파이어를 하고 싶으면 차라리 카이티프를 고른 다음 Flaw로 Derangement를 몇 개 박아라. 일단 그런 캐릭터를 받아줄 이해심 깊은 팀부터 찾고 말이지... 말카비안도 당연히 안 들키고 사냥해야 하고, Domain 관리해야 하고, 자기 위장신분 지켜야 하고, 인간 끄나풀들도 만들어야 한다. 얘들도 뱀파이어다. 그냥 미치광이 초인이 아니다.


3. 말카비안의 광기는 하나고, 24시간 발작 중인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스토리상으로 의미있게 쓰여야 한다

물론 나중에 더 미치면서 Derangement가 몇 개 더 달릴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처음 Clan Weakness로 주어지는 건 "하나의 Derangement"다. 누누이 얘기한 것처럼, 꼭 늘 발작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서 Obsessive가 Derangement로 박힌 말카비안이라면 자기 강박을 자극하는 요소가 등장했을 때만 발작할 것이다. Obsessive로 "모든 사물들의 위치를 상호 직각으로 맞추기"가 있다면 그런 물건들이 보일 때 강박에 시달리는 거지, 눈을 감고 있어도 머릿속에서 "직각직각직각..."하는 생각이 멤도는 건 아니다. 다른 종류의 Derangement들도 마찬가지다. Sanguinary Animism이라고 해서 24시간 자기를 쫓아다니는 귀신들을 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24시간 미친 헛소리를 중얼거리거나 날뛰지도 않는다.


 더 중요한 건 이 광기가 스토리상으로 의미있는 상황을 만드는 데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냥 "발작해서 트롤링했어요 히힛"하면 안된다. 사실 모든 클랜의 단점들이 그렇다. 예를 들어서 클랜 노스페라투의 단점은 "난 못생겨서 남들 앞에 못나가"라는 행동제약만 거는 것이 아니다. 그로 인해 PC가 육체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위축되고, 고통받고, 뒤틀리게 만들며, 바로 그로 인해 뱀파이어가 된 후 트라우마와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인물성을 만들어준다. 이렇게 확보된 인물성은 특정 상황이나 다른 캐릭터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인식이나 반응을 보여주며 협력과 대립을 이루고, 여기서 드라마가 나온다. 클랜 말카비안도 마찬가지다. 클랜 말카비안의 광기는 "Wis -4, 매 라운드 d10을 굴리고 1이 나오면 Confused 상태가 됨" 같은 단순 디버프가 아니다. 이들의 클랜 단점도 그저 캐릭터를 제약하고 플레이어를 불편하게 만드는 디버프가 아니라, 일종의 스토리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한 비극의 도구인 셈이다. 광기는 곧 말카비안의 힘인 동시에 저주다. 이 광기로 인해 남들은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는 대신, 자신도 스스로를 통제 못하고 이해 못하며, 남들의 불신을 사는 존재가 된다. 마치 카산드라처럼 말이다. 말카비안의 광기는 스토리에 복선을 깔아주고, 불길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캐릭터를 불안하게 만들며, 자신이 (때때로)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다는 공포를 느끼게 한다.


 만약 말카비안의 광기가 그렇게 스토리상으로 의미있게 쓰이지 않는다면, 사실 이 광기라는 도구는 짜증만 유발할 뿐이다. 기본적으로 미친다는 건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애초에 미친다는 게 정신에 이상이 생겨서 남들과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뜻이 아닌가? 심한 사이코시스를 겪는 사람들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기란 대단히 힘든 일이다. 따라서 미친 PC가 발작을 일으킬 때는 플레이어들도 그 행위의 동기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RPG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이란 대체로 혼란을 유발하거나 지루함을 유발한다. 이것이 반복되면 짜증을 유발한다. 따라서 이 반복적인 광기의 발작가 팀원들 전원에게 어떠한 종류의 흥미를 주지 못한다면, 높은 확률로 짜증만 나게 할 수도 있다.


4. 예언이랍시고 아무 소리나 뇌까리지 말고 마스터랑 상의해야 한다

이건 사실 플레이어의 문제라기 보다는 룰의 문제. 클랜 말카비안의 광기가 예지의 방식으로 사용되는 건 전부 옵션 룰이다... 얘들의 광기가 예지를 하게 해주는 룰이 코어에 없다. 즉 말카비안의 광기가 예지의 편린을 품기 위해서는 마스터랑 상의해서 따로 스토리에 반영을 해줘야 한다는 거다. 어떻게 보면 이건 마스터의 책임+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말카비안 플레이어가 조심해야 하는 게 있다. 기분난다고 갑자기 광오하게 온갖 상징들로 점철된 예언을 자기 멋대로 풀어내면 곤란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스터가 플레이어가 쏟아낸 "예언"에 맞춰서 스토리를 조정해줄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사실상 플레이어의 예언은 무의미하게 묻히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마스터가 아무리 혼자 환시를 보여주고 머릿속에 속삭임을 불어넣어도, 플레이어가 이를 PC의 적절한 광기로 연출해주지 않으면 묻힌다. 그러니 말카비안 PC를 하고 싶은 플레이어가 있다면, 마스터랑 늘 긴밀하게 상의하자. 최소한 미리 짜놓고 고스톱 치는 건 아니어도, 플레이 도중 광기가 발작하면 마스터랑 잘 상의해서 상호 연기/연출을 맞추자. RP할 때 내가 함부로 던진 걸 상대가 알아서 잘 받아서 반응해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RPG에서 RP는 기본적으로 상호작용이고, 같이 즐기면서 해야한다.


 근데 이 부분은 룰적인 결함이 맞다... 그러니 내가 클랜 말카비안 골라도 룰/마스터가 알아서 잘해줄 거라고 생각하거나, 나는 잘났으니 어떻게든 잘될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하지는 말자.